드디어 월말의 모든 업무를 마쳤다. 나는 격주로 다양한 주제를 가진 텍스트 콘텐츠를 제작해 발행하는 것 외에도 월말에는 한 달간 있었던 회사의 주요한 일들을 정리해서 수천 명의 고객들에게 보내야 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다지 바쁘지 않아 보이지만 글을 하나쓰고 이를 부서장부터 대표까지 컨펌을 받는 동안 이를 위한 포스터 작업으로 디자인팀에 협조를 구하고 각종 소셜 미디어와 블로그, 웹사이트에 업데이트하고 비용을 승인받고 광고를 돌리는 게 내가 하는 가장 단순한 업무 중 하나다. 이런 걸 한 달에 수번에서 열 번은 진행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크고 작은 이벤트와 프로모션도 진행하고 PR 기사도 작성해서 매체에 돌리고 나면 한 달의 스케줄은 이미 가득 차 버린다. 또 여기에 브랜딩을 위한 영상 콘텐츠까지 제작하면.. 음, 아무튼 시시콜콜한 나의 업무 이야기는 여기까지.
바쁜 업무 와중에 그나마 조금 한가한 때를 핑계 삼아 익월 둘째 주에 연차를 냈다. 금요일과 월요일을 붙이는 건 너무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목요일과 금요일을 붙였는데 다행인지 우리 팀에서 그 주와 차주에 휴가를 쓰는 아무도 사람은 없었다. 괜히 혼자 호들갑을 떤 기분이다. 아무튼 부장님이 그냥 휴가를 승인해줄 리가 없다. 곧 습관적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왜? 어디가? 누구랑 가?”
이제 막 애들이 중학생이 된 부장님은 회사의 팀원들에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와이프와 다투고 온 날은 누구라도 붙잡고 퇴근 후 맥주 500ml를 한 번에 들이켜야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더 괴로운 건 저녁 술자리는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렇게나 맥주를 좋아했던 나지만 몇 번 부장님과 같이 술을 마시고 나니 그다음 날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아침에 부장님의 컨디션을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고 부장님이 꼭 술을 마시자고 할 것 같은 날은 무조건 선약을 잡거나 선약이 있다고 뻥을 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물론, 대놓고 거절하는 건 아니다. 그럴 땐 한 껏 밝은 표정으로 하지만 조금은 아쉬운 듯 미간을 살짝 접어주는 건 80%의 매너와 20%의 애교가 합치하여 이룬 결과물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사회생활을 해야 하나 하겠지만 정말 날고 기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정도는 뭐 사회생활 축에도 안 낄 듯.
굳이 부장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진 않았다. ‘오래전 친했던 신비로운 친구가 십여 년 만에 우편으로 연락이 왔는데 ‘괌, 305호’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멘트와 함께 다이어리 자물쇠용 열쇠를 함께 동봉했길래. ‘아뿔싸, 얼른 하던 일을 잠시 쉬고 괌으로 가야겠구나!’라고 해서 휴가를 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퍽이나 ‘어? 그래, 참 멋진 우정이구나. 나도 참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니 걱정 말고 얼른 휴가를 써.’라고 할까 싶었던 것이다. 구시렁거리던 부장님은 “그럼 가기 전에 나랑 맥주 한 잔, 콜?”이라며 딜을 던졌다. 2년 전의 나라면 “아, 네네, 물론이죠!”라며 젊음의 혈기로 대미지를 온몸으로 받아줬겠지만 나도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졌고 그 어떤 레어템으로도 방어할 수 없는 사회생활에서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전문가 수준으로 체득한 바 있다.
“부장님, 작년에 건강검진에서 지방간 나왔어요..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야 하고.. 저 요즘 맨날 샐러드 먹는 거.. 아시잖아요..?”
살짝 힘겨운 얼굴을 하며 역 딜을 던지자. 부장님은 더 이상 질척이지 않았지만 '요즘 애들은 술도 같이 못 마시냐며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는 혼잣말을 주술처럼 뿜어댔고 난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슬며시 도로 자리로 돌아온 뒤, 친구들에게 개별적으로 카톡을 돌렸다. 오랜 시간이 흘러 승희의 옛 번호는 어느새 모르는 아주머니의 것이 되어있었기에, 친구들을 통해 혹시라도 승희의 연락처 혹은 승희 집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난 승희가 남긴 메시지를 보자마자 괌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아 덜컥 휴가를 먼저 냈지만, 사실 그 날짜에 괌의 힐튼 호텔 305호가 비어있다는 보장도 없었거니와, 십 년 만에 승희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을 믿고 아무런 검증도 없이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도 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몇 시간이 지나 퇴근 때쯤 휴대폰 메시지함에는 친구들로부터 온 답장이 잔뜩 쌓여있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승희의 연락처는 물론, 그 아이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며 말을 아꼈다. 아마 더 할 말이 없었을 거다. 그나마 출산 후 육아를 하는 친구가 각종 SNS를 뒤져 어떻게 승희의 언니 연락처를 알아내서는 보내주었다. 친구들에게 얼른 결혼하고 출산하기를 장려하는 그 친구 말이다.
메시지를 읽다 보니 어제 미리보기만 확인하고 읽지 않은 그 사람의 메시지가 보였다. 깜빡하고 내용을 모두 읽지 않아 어떤 메시지인지도 몰랐지만 어쩌면 아직도 나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뿔싸, 메시지를 열어 모두 읽어보니 ‘이런 젠장..’ 미리보기로 본 그의 메시지 중 ‘이번 주말과 다음 주말의 일정’에 대한 언급은 그다음 주 주말에 한 번 더 만나자는 약속을 얻어내기 위한 빌드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 난 괌에 승희가 일러준 미션을 수행하러 가야 하는데..?'
결국 난 그 소개팅 남에게도 진실은 뒤로한 채 그 주 주말에 나도 약속이 있어 만나기 힘들다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오래전 친했던 신비로운 친구가 십여 년 만에 우편으로 연락이 왔는데 ‘괌, 305호’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멘트와 함께 작은 자물쇠용 열쇠를 함께 동봉했길래. ‘아뿔싸, 얼른 하던 일을 잠시 쉬고 괌으로 가야겠구나!’’해서 휴가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아무튼 나 역시 그 사람이 싫지는 않았기에 한 번 더 만나볼 요량은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한 달은 지나야 두 번째 식사를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나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에게 안갯속 손에 잡히지 않는 수증기와 같은 나의 대답은 어쩌면, 결국 그에게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물증 없는 짐작만 남긴 채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신경이 쓰이긴 했다. 분명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의도하지 않은 희망 회로의 배터리에 한 달 치의 충전을 더 요구하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 마저 들었다.
‘따르르르릉’
승희의 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남겼다. 승희의 친구인데 혹시 승희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는지 가벼운 인사말과 함께. 몇 분 지나지 않아 온 답장에 난 소름이 끼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번호를 알고 연락 주셨죠? 미안하지만 저도 몰라요. 연락이 끊긴 지 몇 년이 되었고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도 모르겠네요.’
아, 이런.. 도대체 승희는 어떤 삶을 헤치며 살아온 걸까. 어쩌면 머나먼 정글을 지나 심해의 고대 문명의 언덕을 넘어 나무도 없이 깎아지른 절벽과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를 십 수 개는 건너간 삶을 살아온 게 아닐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무슨 비밀스러운 사연이 있길래 예측하기 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나에게 편지를 보낸 걸까. 십여 년 전의 해맑은 승희를 떠올리면, 엄청난 독서량으로 어떤 질문에도 밝게 웃으며 답을 해주던 오전 햇살처럼 싱그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따라서, 적어도 밝은 가정에서 유복하게만 자랐을 것 같은 소공녀에게 삶은 어떤 잔인한 형벌을 내렸을까. 아니, 적어도 승희 같은 아이가 반드시 달게 받아야만 하는 그런 죄가 애초에 존재하기는 했을까. 나 외에는 그다지 친한 친구가 없었지만 모두에게 친절했던 그 아이에게 지난 십여 년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정말 서른이 되었으니 죽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얼른 호텔 예약 앱을 열고 해당 날짜에 호텔 방의 예약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방은 있었지만 305호를 확정해줄 수는 없다고 했다. 아무리 부탁을 하고 요청을 해도. 호텔 매니저는 당일 괌으로 와서 305호가 남아있다면 트윈베드로 준비해주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떠들 뿐이었다. 이미 휴가도 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나는 딜을 하기로 했다. 3박 4일간의 모든 비용을 예약 단계 없이 당장 결제할 테니 해당 기간 동안 305호를 꼭 비워달라고. 매니저는 나의 불같은 의지를 확인하고는 헤드 매니저에게 물어본 뒤 답을 주겠다고 했고 이튿날, 305호는 내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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