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열쇠

by Rooney Kim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계단을 올라 3층 구석의 끝으로 향했다. 뻑적지근한 내 하루의 끝. 온몸의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도, 붉어진 얼굴로 사방에 술냄새가 진동을 해도 단 한 번의 싫증이나 거부감 없이 나를 한껏 껴안아주는 나의 집, 자취방, 세계, 드디어 우리 집. 시간은 어느덧 10시보다는 11시에 가까웠지만 집안의 공기는 적당히 촉촉했고 기온은 쾌적했다. 내일 비가 올 수 도 있다는 예보 때문인지 조금은 습해진 기운이 건조했던 계절을 밀어내어 차라리 좋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왼손에 들린 편지의 주소와 이름을 다시 읽어보았다. 승희. 정승희. 가슴 떨리는 이 순간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건 정말로 승희가 보낸 것이다.


먼저 승희와의 지난 삼 년 간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똑똑하고 비밀이 많던 친구. 그러고 보니 난 승희의 집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하긴, 그도 그럴만한 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녀석들이랑은 분식집도 PC방도 숱하게 갔지만 승희와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너무 똑똑해서, 우리와는 대화의 수준이 질적으로 차이가 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때론, 넓은 아량과 식견으로 자신과는 다른 수준의 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더 많이 어울리는 배포는 왜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승희와의 학창 시절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다른 친구들과 딱히 친하게 지내지만 않았을 뿐 누구에게나 굉장히 섬세하고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정도 나이를 먹고나니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사정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이해.


그리고 승희를 만나지 않은 지난 십여 년을 떠올려보았다. 치열하게 살았다. 물론, 양적이나 질적으로 나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삶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로 보아야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런 신념으로 '나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심사관은 오로지 나 자신일 뿐, 타인의 평가는 저마다의 그저 그런 수준에서 이뤄지는 편향된 잣대에 불과하다.'라고 믿으며 살고 싶었지만 세상엔 언제나 그렇듯 인정하기 싫어도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자들, 경험이 많은 사람들, 방대한 지식으로 압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그런 사람들에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새해를 서른 번 정도 맞이하다 보니 어느새 인정하게 되었다. 어떤 날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듯 득도한 사람처럼 세상이 우습게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날은 냉정하고 날카로운 현실의 벽 앞에 지난주에 깨달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가 열쇠 구멍에 조차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쥐구멍도 모자라 옷장 속에 숨어버려 아무도 나를 영영 찾지 못하길 바라기도 했으니.


졸업부터 취업까지 이어진 길은 한 밤 중의 깊은 골짜기를 수십 개는 가진 산속 같았다. 후레시도 없이 길을 찾으며 아찔한 절벽도 피하고 아슬아슬 낭떠러지 옆길을 지나 겨우 찾아간 정상이 그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아닌 일은 흔했고 겨우겨우 취업을 해도 이후의 삶은 마치 맨 뒷장이나 부록까지 아무리 뒤져도 정답지가 없는 두꺼운 문제집과 같았다. 이 시기의 일상은 막연한 책임과 성과라는 숨 막히는 미로 속에서 간헐적으로 정신이 들 때 내뱉은 날숨과 동시에 도로 들이마신 들숨이 채 나의 폐를 가득 채우기도 전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월요일로 나를 던져 압축 프레스기 안으로 들어가는 주와 달과 해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갈려진 시간이 일상이 된 삶 속에서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떠나는 건 오래되어 낡은 앨범 속에서 운 좋게 찾은 곱게 접힌 레어템처럼 느껴졌고 급기야 몇몇 친구들은 대책 없이 퇴사 후 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 역시 결국 퇴사를 했지만 적어도 그다음 주에 출근할 곳은 정해두었으니 돌아보면 지독히 숨 막히는 사회생활 속에서도 새벽짬을 내어 미래의 숨통을 틔운 과거의 나에게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그렇게 이기고 지는 수많은 전투로 점철되어 흐른 나의 십 년 동안 승희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각진 모양을 유지하면서도 유난히 깔끔한 글씨를 자랑하던 승희의 글씨체가 두 눈에 선명하게 와 박힌다. 하루에도 십 수 번씩 이메일로, 직장 동료들에게 듣는 내 이름이지만 그 안에서는 한 줌의 생기도 없이 무광이던 내 이름이 승희가 보낸 편지지 위에서는 방금 세공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서른까지만 살고 싶다던 승희가 보낸 편지. 혹여나 슬픈 소식이 담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그런 소식이었다면 다른 경로로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분명히 저 편지는 기대 이상의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

성수에서 소개팅을 했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냥하고 매너가 좋았던 하지만 그 이상의 관심이 딱히 없었던 사람. 얼른 씻은 뒤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승희의 편지를 열어볼 생각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어 편지 외에 다른 것에는 일말의 관심을 줄 여유도 없었지만 연락을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지라 메시지의 첫 줄을 확인하려 폰을 켰다.


‘잘 지내시죠? 이번 주와 다음 주 주말은 올해 초부터 잡혀있던 일정이..’


첫 줄을 읽어보니 굳이 왜 저런 이야기를 나한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그냥 폰을 침대에 내려뒀다. 문득, 지하철에서 연락 온 그의 문자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매 순간 마음의 위치와 신경 씀의 정도가 다르다 보니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올바른 주파수와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한 마디는 존재하는 법이고 모든 신경을 앗아가는 메시지가 있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짝과 임자는 있게 마련인가 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그도, 매너가 넘쳤던 소개팅 그 사람도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나의 온 마음과 신경은 온통 승희를 향하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편지를 들어 올려 봉투를 매만져 보았다. 손으로 집었을 때의 두께감에 따라 편지가 몇 장쯤 되는지 알 수 있어 나는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가며 봉투를 만져보았다. 그렇게 똑똑하고 풍부한 감성을 가졌던 승희가 보낸 지난 십여 년 간의 업데이트와 메시지가 담겼을지 혹은, 전혀 생각도 못한 엉뚱한 소식으로 놀려켜줄 지 도무지 예상이 안되었다. 칼로 봉투 끝을 예리하게 잘라내자 두 번 가지런히 접힌 편지지가 보였다. 편지를 꺼낸 후에도 가볍게 묵직한 느낌이 들어 안을 보니 쇠로 된 작은 열쇠가 보였다. 보통 우리가 아는 집 열쇠 크기가 아닌 작은 상자나 가방 혹은 학창 시절 쓰던 다이어리에 달린 자물쇠에 어울릴 법한 작은 크기의 열쇠였다. 십 년 만에 다시 느꼈지만 승희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십 년 만에 보낸 한 장의 편지는 무엇이며 도무지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이 열쇠는 왜 보냈을까. 필시 이유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열쇠를 옆에 내려놓고 떨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괌, 힐튼 호텔, 반드시 305호, 꼭 트윈 베드, 천장 속 어딘가.’


무수한 지식의 바닷속을 유영하다 잠시 지상으로 올라온 틈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깊고 짙게 채색한 승희만의 문장과 반가운 필체로 그녀와의 재회를 상상하던 나는 단 한 줄로 요약된 편지에 마치 찬장에 머리를 찧은 듯 멍하니 편지의 앞과 뒤를 뚫어져라 번갈아볼 뿐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채 얼어버리고 말았다.


‘P.S. The key is the key to your new life hack.’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vi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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