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시야가 더 넓어지는 것 같지만 삶의 중요한 계단을 오르내릴 땐 사실 더 좁아진다. 그래서 자고로 식견은 어린 시절에 넓히라고 하는가 보다. 학생 때까지만 해도 꿈도 열정도 넘쳤기에 무엇이든 끌리면 시도했다. 하지만 일단 취업이 되고 나면 이제부터 나의 시야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속한 산업, 회사의 규모, 속한 팀, 그리고 팀장과 선배들의 눈높이에서 결정된다. 즉, 사회에서 계층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정해진 것이다. 그렇게 입사 후 두세 달이 지나면 ‘나는 어느 정도 되는 연봉’을 받으며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회사에 속해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보다 아래 단계의 몇몇 회사와 무수히 많은 윗 단계의 회사를 파악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내 처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몇 년 전의 내가 딱 그랬다. 누구나 알만한 글로벌 기업의 최종 신체검사 이후 어이없게, 아니 이유도 모른 채, 떨어지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작은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이후 난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현 직장보다 조금 더 좋은 근무 조건의, 인지도의, 궁극적으로 연봉의 회사를 쫓아 이직을 했다. 그게 당시 나의 시야였고 식견이었다. 지구를 지키고, 환경을 생각하고, 인류에 봉사하려던 드넓은 눈높이와 세계관은 온데간데없고 당장 내 앞가림과 다음 달 빠져나갈 월세, 카드값, 각종 공과금과 적금 및 펀드 상품 등의 결제와 유지를 위해 나의 급여는 지속되어야 했고 익년의 연봉은 더 높아야 했다. 그렇게 숫자에 집착하며 살다 보니 서른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숫자구나. 숫자가 이렇게 중요하다.
얼마 전에 성수동 소개팅을 해준 친구를 보니 또 그런 생각이 든다. 분명, 어릴 때 어른들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야 비로소 어른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본 친구들은 특히, 몇몇 친구들은 출산 후 묘하게 달라진 양상을 보여주었다. 세계일주를 하며 세상의 모든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꿈이었던 아이는 신혼여행도 마다하고 월에 한 번은 임장을 다닐 정도로 자신과 가정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헌사하는 어머니가 되었고, 비혼과 비건을 외치며 사회 속 여성들의 기회와 가능성에 대한 모임을 하고 글도 쓰던 아이는 평일에는 문센에서 가정 교양, 육식 요리 클래스를 수강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쇼핑몰과 호수 공원을 거니는 엄마 활동가가 되었다.
엄마 활동가가 된 그 친구는 워낙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온 반을 들쑤시고 다니던 소위 인싸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생활 팁을 무수히 쏟아내는 생생정보통 같은 친구다. 학창 시절 ‘얼굴에 자국 없이 몰래 자는 법’부터 ‘면접 패스 답변 팁’은 물론, ‘사수를 내 편으로 만드는 팁’까지 어디서 그런 팁들을 연구하는 모임에라도 나가는지 서비스로 나오면 유료 구독을 하고 싶을 정도다. 결혼 후 애를 낳고 나서는 아직 결혼도 안 한 친구들 앞에서 ‘임신 팁부터 출산 후 갓난아기 달래기 팁’까지 아직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팁을 단톡방에 올릴 정도로 자기 홀로 깊은 식견을 자랑 중이다.
다른 친구들이 그만 좀 올리라고 닦달하면 절대 굽히지 않고 너네들도 얼른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그 엄마 활동가의 덕담을 듣다 보면 고등학생 시절 부터 깬 시민 인척 우리를 가르치던 그 친구의 습성은, 덜컥 얻은 아이와 함께 삼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얄미운 표정에 그냥 확 옆구리라도 꼬집을라치니 웬걸 그 시절 날렵했던 허리는 어디 가고 아마도 그 습성을 허리로 삼키고 소화가 안되었는지 어린 시절 푸근한 동네 이모의 그것 마냥 두툼한 부피감의 물컹한 살집이 되레 영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허리에서 손을 빼고는 웃으며 등이나 두드려주었다.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친구는 내가 꼬집어도 유쾌하게 웃어 넘어가 버리고 집에 갈 땐 뭐라도 먹을 걸 한 주머니 넣어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생의 중요한 계단을 오르내릴수록 시야는 좁아지지만 그 시야로 바라보는 속내는 한 없이 깊어진다는 것.
늦은 시각 야근을 하고 탄 지하철 안에서 그의 연락이 왔다.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가슴에 굳은 딱지와 별개로 내 삶을 살아내는 것도 버거워 피로에 절인채 지하철 의자에 눌어붙은 몸뚱이는 이곳이 자취방 침대이길 바랄 뿐 그런 연락에 움찔하던 미동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디로 이직을 했고 그래서 내가 다니는 회사와는 그렇게 서너 정거장 차이라는 시시콜콜한 얘기도 덧붙였다. 그래서 우연히라도 마주치자는 걸까 아님 가까워진 만큼 한 번 보자는 걸까. 먼저 이별을 고한 사람치고는 꽤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준다. 이런 연락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인사는 못해도 우습게도 멀리서나마 얼굴은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딱 이 정도 마음뿐.
역시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역을 빠져나와 천천히 대로를 지나 빌라들이 빽빽한 동네로 들어섰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지만 사람들은 꽤나 돌아다녔고 난 귀에 꽂은 이어폰에 집중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세상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조차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쉬운 일은 정말 없는 걸까. 현관으로 들어서 우편함을 보니 낯선 편지가 하나 도착해있다. 카드 고지서? 공과금? 전단지? 짧은 시간 동안 별생각이 다 들었다. 곧 편지를 확인한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번개와 같은 놀라움으로 온몸에 시원한 전율이 돋았다.
정. 승. 희.
이 세 글자가 내게 주는 감정은 놀람을 넘어 아찔함에 가까웠다.
고등학생 시절 내겐 그 누구와도 가까웠던 친구였지만 나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누지 않았던 너무나도 미스터리 한 친구. 쉬는 시간엔 카세트 테이프로 8090년대 음악을 즐겨 듣고 엄마 아빠가 찰 법한 낡은 금장 시계에 절대 유행을 타지 않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점심은 항상 혼자 먹으며 산책을 즐기던 아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간혹 문학이나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곡과 파우스트부터 1984와 호밀밭의 파수꾼까지 그 아이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수업시간 내내 몽상에 빠진 적이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꾼이었던 아이. 난 이런 아이가 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며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나 의아해했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그 아이에겐 나도 다른 친구들도 소위 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아이는 입만 열면 서른까지만 살 것이라고 했다. 십 대에 떠올린 서른은 십 수년도 더 남은 아득한 미래라 멀게만 느껴졌던 난 그 아이에게 왜 하필 서른이냐고 묻고 나서 들은 답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더 이상 넓어질 시야가 없을거거든. 더 배울 게 없으면 더 살 가치가 없어.’
그렇게 올해 우리 모두는 서른이 되었고 승희에게서 십여 년 만에 편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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