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진화

by Rooney Kim


습관이 변한다. 삶의 사소한 패턴이 변한다. 옷을 갈아입는 패턴, 잠자리를 정리하는 습관, 샤워를 할 때 씻는 순서 등 너무 중요하지 않아서 평소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일상의 작은 조각들은 시간이 흐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한다. 그런데 종종 그 변화의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꽂힐 때가 있다. 남자라면 가령, 입대 후 난생처음으로 훈련소에서 샤워를 할 때, 여자라면 처음으로 남성과 격하게 구분되는 생리적인 현상을 겪었을 때 등 살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강렬한 변화가 있을 때 우리의 사소한 습관은 의도하지 않은 변화라는 대혼돈의 시기를 맞는다. 평소라면 클렌징 폼으로 세수를 먼저 하고 후에 머리를 감았겠지만, 훈련소에서 과거의 습관은 비용에 관계없이 모든 것이 사치일 뿐, 삽시간에 비누로 얼굴과 머리를 동시에 감고 비눗물이 채 몸을 떠나기 전에 그 거품으로 몸을 씻는다. 이 모든 것은 단 몇 분 안에 끝이 난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체득된 이후에는 좀처럼 예전의 습관을 찾기 어렵다. 물론, 제대 후에는 폼 클렌저로 얼굴을 씻고 꽃향기로 샤워실을 가득 메우는 꽤나 비싼 샴푸와 바디 클렌저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과거의 샤워 패턴으로 돌아가지않는다.


습관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나서 놀던 장소와 놀이는 패턴이 되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었다. 그 사이에 친구가 바뀌고 장소도 변했지만 친구를 대하는 방식은 습관처럼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이라는 큰 변화는 이런 친구들과의 습관에도 변곡점을 안긴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친구들은 한 학기에 한 번 볼까 말까 하게 되었고, 서울, 대구, 부산 등 서로 다른 지역으로 진학한 친구들을 한 번에 모두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내 삶의 여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의 시간과 습관은 점점 변해갔다. 과거, 친구들과 놀던 장소와 방식은 마치 파도가 지나가며 흐트러트린 모래성처럼 말끔하게 지워졌다. 오랜만에 연락해도 여전히 반갑게 가벼운 욕설과 놀림으로 서로에 대한 우정의 깊이와 존재감을 확인하지만 그뿐이다. 그 친구들의 습관과 나의 습관에 '우리'는 이제, 마치 퇴화된 기관처럼 사라진 습관의 흔적일 뿐이다.


그런데 승희는 달랐다. 승희의 편지를 받아 든 내 마음에는 학창 시절에 느꼈던 청초한 설렘과 미지의 동경과 같은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마치,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를 읽고 억압받는 여성성과 다양한 역할과 계층의 인간 군상들이 행하고 느끼는 죄의식,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치솟는 실존에 대한 가치와 분노에 대해 독설을 퍼붓다가도 갑자기 소루우의 ‘월든’ 속으로 빠져들어 포크너에서 기인한 감정의 격랑에서 빠져나와 어느 새 그 모든 얽히고설킨 감정들마저 그저 사치일 뿐, 언젠가는 생의 모든 허영을 집어던지고 자유인으로, 그저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고백한 뒤 슬며시 눈웃음치며 아련한 황홀경에 젖던 모습은 다른 친구들에게서는 결코 얻지 못했던 지적인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승희의 편지를 통해 정확히 십 년 만에 단단히 굳은 내 감성의 피부를 뚫고 나왔고 그때 깨달았다.


‘맞아. 승희와 나의 습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구나.’


하지만 분명 조금은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승희가 내게 보낸 메시지가 불한당들끼리 통하는 일종의 암호는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승희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매우 나쁘고 불순한 의도로 나를 꾀는 건 아닐까. 물론, 승희의 인성과 태도를 생각하면 결코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었지만, 십 년.. 무려 십 년이 지나지 않았나. 게다가 승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진행 중인 모종의 범죄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그동안 단 한 번의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편지로 연락이 왔다는 점 거기에 나와 승희와의 그런 독특한 추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편지의 내용이 무척 황당할 수 있다는 점이 또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이를 핑계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아주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덜컥 휴가를 냈던 것이다. 게다가 혼자 괌으로 3박 4일을 떠나는 게 아닌가. 따라서 미지에로의 탐험과 같은 설렘없이 휴가를 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


참 얄궂고 짓궂은 게 인생이다. 간헐적으로 그에게서 쓸데없는 연락이 오는 건 그렇다 쳐도 내 눈앞에서 그가 보이기는 건, 그것도 자주 보이는 건, 결코 원했던 것이 아니다. 분명, 이직한 그의 회사가 서너 정거장 차이라고 했는데 한 번은 우리 회사 빌딩의 입구에서 그리고 두 번은 퇴근 후 지하철의 반대 입구에 그가 그의 동료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 멀리서 우연히 지나가는 걸 보는 것 정도, 딱 그정도의 우연 한 번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유인즉, 내가 그를 발견할 때마다 난 등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반대로 뛰어가거나 아예 건물을 빙그르르 돌아 다른 입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그를 발견하고 나니 뻣뻣하게 굳은 내 몸이 마치 방금 포장을 뜯은 구체 관절 인형 마냥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없었고 찌들고 찌든 일상에 기력을 잃어 딱딱하게 굳은 온몸에 전기적 감각이 가시 돋듯 일어나 번쩍하고 나의 정신을 깨워줬던 것이다.


'마주치지 말자.'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가 나의 동선에 등장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다행인 건 아마도 그는 아직도 나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는 사실. 난 굳이 떠나간 슬픈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 현실의 감정이 엉망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렇게 몇 번의 우연한 발견이 쌓이다 보니 항상 그의 옆에 딱 붙어있는 어린 이성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에서 시종일관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니 굉장히 친한 동료라는 걸 직감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위트 있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배려심이 넘쳤다. 센스 넘치는 매너는 기본이고 누군가 그에게 의지할라치면 단박에 달려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그런 인류애로 똘똘 뭉친 매력 덩어리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잘 알 거다. 모두에게 매력을 나눠주고 내어주는 사람은 정작 자신의 가족이나 연인에게는 오히려 소홀할 수 있다는 점을. 평소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하다가도 여기저기 회사 동료, 카페 바리스타, 건물 입구 데스크 직원 등등 나를 제외한 외부에 모든 에너지를 뺏긴 뒤 만난 날에는 종종 맥락 없이 버럭 하며 감정적이 되곤 했다. 마치 텅 비어버린 자신의 에너지 게이지에 대한 짜증과 분노를 나에게 풀며 보상으로 에너지를 채우는 것처럼 말이다. 뭐 지난 일이니 그에 대한 험담은 여기까지.


아무튼 그렇게 그와 원치 않는 마주침을 여러 번 하며 관찰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의 매번 그의 옆에 붙어있는 그 이성 직원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를 않는 것. 크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가 다른 곳을 볼 때에도 놓칠세라 그에게 자석처럼 붙어있는 시선, 다른 직원들보다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몸짓 등등으로 말미암아 그는 또 여러 이성들의 총애를 받고 있을 것이고 저 젊은 직원은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처음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과거의 기억과 관계없이 난 이제 나만의 삶이라는 새로운 습관에 접어든 지 삼 개월이 되어간다. 진심으로 정말로 과거의 습관은 지나가는 개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호기심은 오로지 그녀, 승희를 향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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