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나에겐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고 평소 습관의 껍질을 깨는 건 언제나 그렇듯 예삿일은 아니다. 감긴 눈을 억지로 비벼 후다닥 짐만 챙겨 찾은 공항에는 활기가 넘쳤다. 이는 아마도 이른 새벽에 도착한 사람들과 그보다 더 일찍 공항의 새벽을 교대한 직원들 덕분이리라. 그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현재 직장의 인간적인 근무 시간에 감사했다. 따지고 보면 타인과의 비교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차피 비교는 평생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꼬리표와 같기에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지 않나. 가만히 들여다본 비교의 얼굴 속에는 인간이 생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극적인 감정이 녹아있지만, 이는 항상 부정적인 감정만 전달하진 않는다. 비교에는 욕심, 욕망, 갈망, 자존감, 자신감, 질투, 분노, 자만, 교만, 에너지, 동기부여, 질책, 자극, 전환 등 삶에 꼭 필요한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가 적절한 비율로 응축되어있는데 이는 필요한 순간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집계되어 프린트될 뿐이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잣대는 지극히 개인적 일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비교는 시대가 집계한 공공 지표이며 특정 지역, 개별 집단, 특수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관습이자 기준이다. 즉, 누가 뭐라 하든 내가 애써 무시하며 그만이지만 혹여나 그 경계 아래에 있으면 무시당하고 이를 훌쩍 넘어버리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무언가 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곧잘 비교가 나쁘다고 하지만 비교 없이는 흑과 백, 유와 무, 잘함과 부진함, 성장과 정체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다. 간혹 좋은 게 좋은 거 다며 중상모략에 가까운 글 놀림으로 자기 계발서를 발간하여 사람들의 눈을 흐리고, ‘포기해도 좋다, 쉬어된 된다’는 달콤한 혀놀림으로 범인의 귀를 흐리는 장사치들도 있지만 그들의 강연료 역시 타 강사와의 비교 우위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을 잊진 말자. 게다가 그들은 이미 쉬어도 될 만큼 큰돈을 벌었지 않나. 그들의 공감되는 한마디가 꿀같겠지만 대부분 시중의 꿀은 사양벌꿀이고 이는 설탕 먹은 꿀벌들이 만든다. 단당류에 가깝다는 말. 비교에 대한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종종걸음으로 검색대를 지났다.
매번 느끼지만 공항에는 묘한 기운이 있다. 예전에는 공항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넘치는 기운 때문에 일부러 공항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이 기운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이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만들 색다른 추억을 향해 날아가는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총합이기도 하다. 이런 에너지로 넘실거리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난 ‘모험의 설렘이 가득 찬 풀’에 온몸을 던졌다. 이 풀에 나의 에너지까지 더해지자 묘한 기운의 총합은 조금 더 거대해졌다. 몽실몽실 몽글 해지다 못해 둥근 마음이 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가와 면세점을 지났다. 공항의 아케이드는 눈으로만 물건을 사도 즐겁다. 짐을 부치고 면세점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은 저 하늘 위로 붕떠 비행 중이니까. 면세점의 명품 부띠끄와 신상품들이 내 눈을 현혹했지만 곧 울린 안내 방송이 날 흔들어 깨웠고 곧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비행을 위해 내가 신경 써야 할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자 내 생각은 다시 나의 내면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누가 직장인이 아니랄까 봐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을 회사가 먼저 떠올랐고 출장 가는 것으로 알고 있을 가족이 떠올랐으며 다음 달에나 만날 그 사람이 떠올랐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작은 기념품이라도 사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괜히 혼자 오버하는 것 같아 바로 그만뒀다.
‘지이잉’
갑작스레 울린 메시지 진동에 깜짝 놀라 폰을 들었다. 깜빡하고 미처 비행기 모드로 바꾸지 못한 휴대폰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음.. 찜찜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그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여행의 첫 페이지를 그의 메시지로 펴고 싶지 않았기에 난 미련 없이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 막 이륙하는 비행기에 우울한 감정을 실어 날려 보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이 자꾸 연락을 하는 건 무슨 마음에서 일까. 처음엔 분명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헤어지고 나니 남 주기 아까운 마음에 다시 한번 자신의 어장에 넣어두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러는건 아닐까싶다. 순수한 의도로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헤어진 후 두 달이 채 되기도 전부터 연락을 하더니 요즘엔 1~2주에 꼭 한 번 이상은 연락이 온다. 그리고 이번 주엔 벌써 두 번의 연락이 왔다. 이별의 선언 후 얼마 안 가 이렇게 무너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거면서 우린 왜 헤어진 걸까.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의 풍선이 점점 부풀다 ‘팡-‘하고 터지더니 그 파편이 주변 단어들에 닿았고 그중 우리를 갈라서게 만든 가장 결정정인 단어가 아직도 가슴속을 표류 중이다. 헤어지기 한 달 전 우리는 그 단어에 대한 마음의 편차가 심각하게 벌어졌음을 느꼈다. 서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가 달랐고, 방법이 달랐으며, 미래를 기약하는 마음 가짐이 달랐다.
그는 멀지 않은 시간에 결혼을 원했고 나는 결혼이라는 한 날의 ‘점’이 아닌 그 ‘점’ 이후 길게 이어질 ‘선’과 같은 나날들, 그 일상을 어떻게 채우고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아주 심도 있는 고민을 터놓았다.
세상 긍정적이고 만인에게 친절한 그에게 중요한 건 ‘그날’ 올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유효기간과, 이를 통해 얻어질 지인들로부터의 인정과, 보상과 빚으로 축약된 축의금을 통한 단기적인 큰 수익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주택 구매’ 일지, ’ 2세’ 일지 모를 또 다른 ‘점’을 향한 무의식의 뜀박질에 대한 단적인 목표뿐. 커다란 점 이후 이어질 얇고 긴 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한 번 도 없었다.
결혼에 대한 나의 의식과 신념은 그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다. 사실 그럼에도 난 이별을 원치 않았지만. 내게 결혼은 한 날 ‘점’ 같은 이벤트가 아니었다. 세대마다 이어지는 낡은 걱정일 수도 있지만 내게 결혼은 책임에 대한 서약이었고 그 책임은 나보다 가족, 여가보다 생존, 기쁨보다 고통에 대한 삶의 새로운 방점을 찍는 커다란 결정이었다. 게다가 결혼 후 종종 이어지는 2세의 출산은 생에 겪어보지 못한 가장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2세가 가져다줄 행복감과 충만감은 아직 겪어보지 않아 여전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결혼은 마하를 훌쩍 넘는 속도로 다가오는 현실적인 고민에 대해 냉철한 플랜 A와 후속으로 이어지는 B, C 정도의 계획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하는 지극히 철학적인 고민이었지 그저 오래 사귄 연인이 가장 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대형 이벤트 소재 중 하나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혼에 대한 진지함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언하던 애들 중 둘은 우리 중 가장 빨리 결혼했고 나머지 하나는 이미 임신을 한 뒤 내년에 결혼 예정이다. 이대로라면 ‘비혼 선언’은 결혼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치트 키라는 학계의 정설이 맞는 듯하다. 그 친구들에게 왜 결혼하냐고 물으니 하나같이 ‘안정감’을 얘기했고 이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미래가 보여서였다고 한다. 재밌는 건 그 셋 중 둘은 우리들더러 천천히 결혼하란다. 막상 결혼을 하니 미혼 시절 더 놀지 못한 것, 여행을 못 다닌 것, 더 많은 남자를 만자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며 복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넋두리를 질척 질척 해댄다. 넋두리야 말로 비빌 언덕이 있을 때 행할 수 있는 단조를 가장한 장조다. 따라서 저런 넋두리 공격을 해도 사실 결혼을 하지않을 생각은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직 미혼이다. 다들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만 아직은 아무도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몇 해가 더 지나면 몇몇은 결혼할 테고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절반 이상은 결혼을 하지 않을까. 그러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 쫓기듯 혹은 때가 되어 친구들은 부랴부랴 다들 결혼을 서두르겠지.
비혼은 아니지만 종종 결혼과 독신에 대해 막연한 망상이 펼쳐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상상의 너비와 경계는 내가 정할 수 없다. 그저 펼쳐지는 대로 한 번 걸어가 볼뿐이다. 만약 혼자 산다면, 만약 아이 없이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50, 60대가 되어 홀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장 아플 때 나를 케어해 줄 수 있는 배우자나 자녀가 없다는 건 어떤 두려움일까. 아프지 않더라도 자잘한 일상의 사소한 흥이나 재미를 공유하며 한바탕 깔깔 웃어넘겨 속의 거품과 잡내를 끄집어내 함께 탈탈 비울 수 있는 가족이 없다면 내 미래의 일상은 행복할까. 그럼에도 그런 역할을 위해, 나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외로울지 모를 노후의 고독에 대비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 게 맞는 걸까. 어떤 친구는 원래 인간의 삶이 상호적이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출산’은 종의 보존과 지속을 위해 당연히 행해야하는 것이니 우리가 굳이 나서서 미래세대가 짊어질 부담에 대해서 논하거나 고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어떤 친구는 그런 이기심으로 가족을 만드는 것은 결국 미래의 다툼과 상처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주제는 아직 서른이기에, 급하지 않기에 이러쿵저러쿵 떠벌일 수 있는 술상의 안주거리로 그저 어느 하루, 결론이 필요없는 젊은 밤을 소비할 뿐이다.
역시 여행은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마구마구 펼쳐 놓을 수 있어서 좋다. 보통 여행을 통해 이런 잡념의 들판을 산책하다보면 복잡한 문제가 절로 해결되기도하고, 미친듯이 집착하던 고민이 어느 새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내면의 산책은 종종 필요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의 산책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괌에 도착했다. 곧 승희를 볼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승희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여전히 미지에 싸여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봄볕에 발가벗겨진 꽃처럼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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