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도착한 괌의 공기는 촉촉했다. 얼마 전까지 비가 왔었는지 빗물이 말라 가는 도로 위로 가느다란 아지랑이들이 피어올랐고 드문드문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여행의 셀렘을 배가시켰다. 오랜만이었지만 괌은 여전했다. 쇼핑몰에는 누가 봐도 여행 온 사람들의 차림을 한 사람들로 넘치고 푸드 코트와 식당가의 여유로운 활기가 창을 뚫고 나와 내 마음을 개운하게 적셔줄 정도였으니까. 호텔 직원은 나를 깎듯이 반겼다. 미리 3박의 비용을 지불해서 인지 혹은 원래 그렇게 친절한 직원인지 모르겠지만 승희에 대한 기대감과 괌의 거리에서 얻은 여유로운 에너지 그리고 호텔 직원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내 기분은 어느새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가슴속은 마치 막 나온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감성으로 가득 찼다. 직원은 무거운 나의 여행 가방을 객실 내부까지 옮겨줬고 난 늦을 새라 달러 두 장을 꺼내 공손히 건넸다. 그러자 직원은 가뜩이나 웃고 있는 얼굴을 조금 더 환히 밝히더니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역시 그분 말씀대로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 호텔 직원을 뒤로하고 방 안에 들어온 나는 직감적으로 ‘그분’이 승희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승희가 여기에 있다는 말일까. 여기에 와서 나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다는 말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실, 처음에는 괌을 오면, 힐튼 호텔의 305호를 예약하면 승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 잡혔었다. 휴가를 낸 직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 정말 홀린 듯이 휴가를 결정했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버렸다.
‘설사 이 편지를 승희가 썼더라도 과연 내가 괌에서 승희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괌을 왔고 이제 이 미스터리한 여정에 발을 담근 만큼 적어도 여기서 승희가 남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5년을 넘어가는 시점에 가뜩이나 퍼석해지고 건조해진 일상에 한바탕 화끈한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풀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는 내 가슴의 대지를 애써 무시할 수는 없지않나. 한 번 좋아진 기분은 나를 가만두지않고 붕붕 띄우더니 저 멀리 하늘로 날려보냈다. 짐을 풀고 옷걸이에 옷을 걸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가져온 세면도구들을 정리하고 나니 이젠 정말 4일간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이 나의 코앞의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침대와 소파를 오가며 방방 거리던 중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과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이런 스탠다드 디럭스 룸의 경우에는 다과 서비스가 없는데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 한 알을 집어 먹고 카드를 집어 들어 읽은 난 깜짝 놀랐다. 심장은 다시 매섭게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카드를 든 손마저 가볍게 떨렸다. 다과 옆의 그 카드는 다름아닌 승희가 남긴 새로운 메시지였다.
‘시원한 커피 한 잔에 바닷물에 발을 담가 걸으면 난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넌 어떨까?’
카드를 읽은 후 혹시나 저 멀리 해변에 승희가 있진않을까 얼른 창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었다. 나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1층 리셉션 데스크에서 호텔의 카페와 근처에 가까운 카페의 위치를 모두 물어본 뒤 30분이 넘도록 이 카페, 저 카페를 오가며 승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몸에 땀이 범벅이 되도록 돌아다니던 나는 근처의 한 카페에서 시원한 카페 라떼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멍하니 다시 그 편지 내용을 곱씹어봤다. ‘커피 한 잔에 바닷물에 발을 담그라고 했지..’ 갑자기 머리 한쪽이 띵-하는 소리가 났다. 승희는 내가 자신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길 원한 게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던 것이다.
‘승희는 그저 내가 시원한 커피 한 잔에 바다를 거닐고 잡생각이나 하며 쉬길 원했던 게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커피를 들고 슬리퍼를 끌며 호텔 근처의 해변으로 갔다. 아직은 해가 떨어지긴 이른 오후의 평화로운 해변은 내가 그토록 그리던 낭만과 여유가 어우러진 산책 길이었고 한 손에는 시원한 커피 그리고 슬리퍼를 살짝 덮는 모래사장의 잔잔한 파도는 휴가 첫날의 완벽한 오후를 장식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승희도 나도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승희는 매번 지식의 샘이 넘치는 얘기를 하다가도 종종 무얼 하고 싶고, 여행을 가고 싶고, 맛있는 어떤 것을 먹고 싶다며 인간미 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서로가 여행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여행을 통해 힐링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서로 큰 공감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던 것이다.
‘승희는 내가 정말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나에게 카드를 남길 수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타인의 입을 통해 승희의 이야기를 듣고, 카드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승희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 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걸까. 우리는 오랜 친구인데 그냥 짠- 하고 나타나서 나랑 오랜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면 그만이지 않을까.
이런 나의 완벽한 기분을 깨뜨린 건 다름 아닌 그의 문자 메시지였다. 괌에 도착 후 비행기 모드를 다시 켠 뒤 메시지가 왔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나의 온 신경을 승희에게 쏟고 있던 나는 다시 울린 그의 알림 메시지에 산통이 깨져버려 둥실둥실 하늘을 날다 일순간에 지상으로 털썩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의미 없는 메시지였다. 자신의 사무실이 사실 나와 굉장히 가까운 곳으로 배치되는 바람에 지금도 혹시라도 우연히 나를 마주치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으니 조만간 밥이라도 먹으면 어떨까 하는 이젠 구체적으로 비호감이 쌓이는 그런 류의 메시지 말이다. 순간적으로 실수를 할 뻔했다. 우리는 헤어졌는데 왜 자꾸 이런 메시지를 보내냐는 답장을 보낼 뻔했다. 어쩌면 그는 그런 거절의 답장조차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빌미로 한 마디 두 마디 더 거들며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만나서 얘기하자’는 심리전의 덫에 덥석 걸리고 마는 것이다. 과거의 나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의 내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다시 그의 메시지를 잊고 돌아온 방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사람은 역시 환경에 지배당하는 동물인가 보다. 호텔 특유의 깔끔한 방과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편안함에 다시 울퉁불퉁하던 마음이 다리미로 다린듯 곧장 쭈욱 펴지며 평화로워졌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배가 고팠다. 이미 수년 전에 괌에 온 적이 있었기에 맛집 몇 곳은 잘 알고 있었다. 머나먼 이국에서의 첫 끼를 홀로 시작하려니 어색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승희가 남긴 메시지에 다시 싱숭생숭해지며 미스터리한 이 여정의 풀장 안으로 온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승희는 유독 닭요리와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음식에 곁들이는 온갖 종류의 샐러드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 당시만 해도 샐러드는 내가 기피하던 음식 중 하나였기에 샐러드 종류가 그렇게 많다는 걸 알게된건 승희 덕분이었다. 그래서 첫날의 저녁은 닭요리와 샐러드로 정했다. 단호박과 피스타치오 위로 크랜베리와 블루베리가 장식처럼 흩어져있고 그 위로 리코타 치즈 한 덩어리가 무심하게 얹어진 샐러드와 어마어마한 크기의 닭다리와 봉 몇 개가 구워진 메뉴였다. 난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십여 년 전 승희와 약속했던 그 여행을 지금 승희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었기에. 신선한 향기를 뽐내는 아삭한 샐러드와 그릴에 구워 바삭해진 커다란 닭다리의 군침이 도는 풍미에 빠져 정신없이 저녁을 먹던 중, 난 문득, 내가 괌에 온 가장 큰 이유, 가장 중요한 것은 확인도 하지도 않고 다른 것들에 넋이 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괌, 힐튼 호텔, 반드시 305호, 꼭 트윈 베드, 천장 속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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