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와의 조우

by Rooney Kim


아뿔싸, 승희가 객실에 남긴 카드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난 편지 속의 메시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괌에 온 이유는 사실 그 메시지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승희와 함께 느긋한 저녁을 즐기던 중이었지만 내 마음은 다시 조급해졌다. 어쩌면 승희는 내가 여유로운 저녁 식사와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괌의 밤거리를 걸으며 산책이나 하고 서울로 돌아가길 바랐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바빠진 마음은 다시금 여유로워지긴 힘들었다. 난 급하게 식당을 나섰다. 승희가 알려준 호텔방 천장 속에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상상은 어느새 나를 그 시절로 던져 보냈다. 눈은 생기 있게 빛났고 발걸음은 가벼웠으며 마음은 사춘기를 막 지난 풋풋한 학생 마냥 들떠있었다.


‘천장, 천장이라고 했어. 그런데 천장 중 어디를 말하는 걸까.’


서둘러 돌아온 방을 둘러본 나는 그 어디에서도 열린 천장을 찾을 수 없었다. 보통 시설 관리를 위해 천장 한쪽 구석에 작은 통로가 있게 마련인데 여긴 아무래도 객실이라 그런지 모든 천장이 막혀있었던 것이다. 허탈한 마음이 들어 소파에 털썩 앉았다가 드러누웠다. 어딘가에 분명 승희가 남긴 물건이 있을 텐데, 그 물건이 내가 괌에 온 가장 큰 목적이자 이유인데 도무지 305호의 어느 천장에 그 물건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에 또다시 답답함이 엄습해왔다. 이제 겨우 괌에서의 첫날 밤이지만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잠에 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참 사람이 우습게도, 답답함에 밤을 새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소파에서 잠에 들었는지 눈을 뜨자 어느새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토록 간사한 게 인간이다.


입구에도 방에도 옷장과 옷장 천장까지 살펴보았지만 뭔가를 숨길만한 곳은 없었다. 혹시나 천장이 아닌 다른 곳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온 사방의 벽도 두들도 보았다. 덕분에 옆방에서 시끄럽다는 항의 전화도 받았다. 그래서 몸이나 좀 씻고 정갈한 마음으로 다시 승희의 메시지를 읽자며 샤워실로 들어간 나는 그 안에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샤워실의 천장에 위쪽으로 열릴 수 있는 문이 있는 것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난 샤워고 뭐고 때려치우고 의자를 가져와서는 올라가 샤워실의 천장을 손으로 슬쩍 밀어보았다. 문을 가볍게 열렸고 난 심호흡을 하고는 휴대폰의 후레시를 켜고 미지의 천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장 입구 근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발을 받칠 만한 것들을 더 가져와서 다시 의자 위로 올라갔다. 한창 두리번거리던 난 어두운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녹색 끈을 발견했다. 이 끈이 어디에 연결되어있는지 몰라 약간 망설여졌지만 지금 당장 이 천장에서 승희가 남긴 것이라고 생각될만한 건 녹색 끈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승희랑 내가 학창 시절에 좋아하던 색이 녹색이다.


‘슥-‘


끈을 당기자 뭔가 묵직한 게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육감적으로 끈에 연결된 무언가가 승희가 내게 남긴 물건이라고 느꼈다. 내친김에 미지의 물건이 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끈을 잡아당겼고 마침내 그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승희가 내게 남긴 것. 정말 있었어..!’


샤워실에서 물건을 끄집어낸 나는 당장 방으로 돌아가 테이블 위에 승희가 남긴 물건을 내려놓았다. 투명한 봉투 안에 신발 상자 만한 박스가 있었고 난 두려운 마음과 동시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최근 들어 이토록 가슴 뛴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기쁨의 긴장과 미지의 궁금증으로 온몸의 세포가 깜짝 놀라 펄떡이며 내 몸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살아있다고 느낀 적이 언제쯤이었을까. 봉투에서 박스를 꺼낸 뒤 나는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있는 흰 봉투와 카드 그리고 또 무언가가 담긴 작은 박스가 있었다. 나는 얼른 카드를 집어 들어 열어보았다.


‘넌 날 찾아낼 것 같았어.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가슴이 똑똑한 친구니까.’


카드를 읽자마자 알 수 없는 눈물이 핑하고 돌더니 뚝뚝 떨어졌다. 우리가 친했던, 즐거웠던 푸른 십 대의 그 시절에는 그토록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지난 십 년 간 뭐가 그렇게 바쁘고 힘들고 어렵다고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다음 달에 연락해야지, 내년에는 한 번쯤 봐야지 하며 공허한 다짐을 하던 지난날 십 수장의 못난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후회하고 또 후회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만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이런저런 후회에 묵직한 흰 봉투를 집어 들어 열어보았다.


‘세상에.. 돈이잖아..?!’


깜짝 놀라 봉투를 돌려보자 또 다른 메시지가 나왔다.


‘언젠가 꼭 같이 놀러 가자고 다짐했었지. 내가 네게 주는 휴가비야. 좀 쉬었다 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땅 밑 지하 깊숙이 묻어버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마치 봄날의 푸른 줄기처럼 사방에서 솟아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승희는 도대체 이걸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걸까. 승희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도 십 년이 넘게 보지 못한 승희는 먼발치서 날 보기라도 한 걸까. 본능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승희가 넣어둔 돈 봉투의 액수는 자그마치 백만 원이었다. 이번 여행의 비행기와 호텔 비용을 모두 내고도 남는 돈이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마지막 박스를 열었고 난 박스 안의 물건을 보자마자 막혀있던 기억이 뻥하고 마치, 댐의 수문이 열리듯 지난 추억이 폭발하듯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박스 안에는 승희와 내가 함께 쓰던 우리 둘이 함께 쓰던 다이어리가 있었던 것이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또 코끝이 찡해진 나는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두 시간이 넘도록 다이어리를 읽었다. 그 시절 우린 참 별 얘기를 다했었다. 집에서 있었던 일, 부모님께 서운한 일, 시험을 망쳐서 울었던 것, 짝사랑하던 다른 반의 그 아이, 호감이 갔던 성당의 그 사람 등등 이젠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 정도의 추억이라면 앞으로 몇 년 간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승희가 사무치게 그리웠고 그동안 무심했던 내가 너무나도 야속하고 후회되었다. 도대체 승희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미스터리한 상황을 차치하고 그냥 승희가 보고 싶었다. 승희가 반드시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이 오로지 날 위로해주었고 지금 당장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누군가에게 전화해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는 사실도 안타까웠고 승희가 준비한 이런 미스터리한 모험의 여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 또한 해줄 이가 없다는 현실이 아쉽기만 했다.


그저 승희가 보고 싶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vi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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