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배려하라는 말도, 너 자신을 위한 자제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모두 무시한 채 무표정으로 일관한 네 얼굴은 철옹성 같은 고집으로 가득해 이를 꺾기란 불가능해 보였지. 무엇이 널 이토록 꼬이게 만들었을까, 애당초 너의 과거엔 너의 심연엔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토록 깊은 어둠에 자신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어. 따뜻한 조언도, 따끔한 꾸중도 네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겨우 그 정도 방법으로 널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내게 이런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테지. 맞아, 난 이걸 기회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골이 깊어 그 속으로 빛 한 움큼 들어가기도 힘든 빽빽한 숲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데에는 필시 어떤 연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보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어이 어두컴컴한 그 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적극적으로 만류하기도 했지만 난 육감적으로 알았어. 마지막 날, 떠나며 스쳐 보던 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아픈 사연의 빛깔을 말이야.
그래서 한동안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어
네가 오가는 길목에서 너의 아침과 저녁을 보았고, 긴 오후를 보내는 동안 네 얼굴에 드러나는 다양한 표정과 그 표정의 원인이 무엇인지 고심하며 날마다 가슴속에 기록했지. 혼자 먹는 밥이 퍽이나 맛이 있을까. 넌 휴대폰조차 보지도 않고 무심히 꿀꺽꿀꺽 밥과 반찬을 씹어 삼키고는 물 한 모금과 함께 조촐한 점심을 마무리했어. 습관적으로 꽂은 유선 이어폰은 시대를 역행하며 드러내고픈 네 존재와 세상 사이의 소심하고 미세한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을거야. 혹시라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나중에 알려줘 네 기록을 고쳐줄 테니.
그러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어. 알고 보니 네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듯 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네 행동의 단서였던거지. 그 단서는 주변 사람들. 바로, 가족 그리고 친구들. 그 사이에서 발생한 무의미한 행동, 이기적인 마음, 넘치는 욕심으로 인한 상처까지. 사소한 것 하나에도 무한의 의미를 추론하며 고통받던 넌 서서히 입을 닫고 말았어. 그렇게 깊숙한 마음의 바닷속 동굴로 들어간 넌 네가 꾸던 꿈과 바라던 평범한 일상조차 바다의 들판 속에 묻어버렸어.
그렇게 오래도록 널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어. 너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넌 그냥 방법을 몰랐던 거야. 잘하고 싶은데 잘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로 인해 생긴 티끌만 한 과오가 눈덩이 같은 오해와 아픔이 되어 널 깊은 심연의 수렁 빠트렸을 때 빠져나오는 방법을 몰랐고, 이후 오래도록 홀로 고통받다 겨우겨우 먼지만 한 용기를 내 수면 위로 올라와 큰 날숨을 내뱉는 방법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사람들 틈에서 오래도록 들숨을 들이마시는 방법, 마침내, 아주 오랫동안 굳게 다물었던 네 입을 벌려 큰 소리로 세상에 너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방법을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알려줄 순 없었어. 내가 손을 뻗으면 넌 마치 내 손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내 손을 거절하며 살짝 내려다본 네 눈에서 예전에는 끝이 보이지도 않던 까만 고독의 터널 끝을 보았거든. 맞아, 넌 시간이 필요했지만 시간 만으론 충분하지 않았어. 사실, 관심이 더 필요했던 거야.
이젠 나도 다 알아
잠못이루던 겨울밤의 길고 긴 새벽의 끝을 마무리하던 네 일기장에 쓴 따뜻한 네 마음의 기록을 알고, 아무 말없이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던 네 소소한 미덕을 알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타인을 위해 서슴없이 내어주던 사소한 희생도 사실 알고 있었어. 꽁꽁 싸매어 나조차도 몰랐던 너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흘 밤낮이 모자랄 정도지만 굳이 네게 말하진 않을 거야. 너도 이젠 알잖아.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말이야.
고독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해
그건 어쩌면 세상에 있는 네 나이, 네 또래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담아낼 수 있을 정도야.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제아무리 밝은 사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상적인 배려와 선행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때론, 누가 알아줬으면’하는 귀여운 심술이 툭하고 터져 나올 때가 있거든.
몰라줘서 미안해
네게 기대했던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은 어쩌면 네가 나에게서 기대하던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그리고 이젠 잘 알아.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특별한 것도, 값비싼 것도, 귀중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저 그토록 오랫동안 잊힌 네 이름,
이젠 내가 알아줄게. 잊지 않고 불러줄게. 네게 달려가는 목소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새벽의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