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의 이름은 은진이오. 성은 최가.”
“최은진?”
선준은 자령이 어떤 부탁을 할지 자못 궁금해져 구체적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자령의 표정을 보아하니 필시 당장은 말 못 할 이유가 있어 보였다.
“선비님, 제가 이 부탁을 드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만약 선비님이 제 부탁대로 제가 원하는 것을 얻어오시면 그때 조금 더 알려드리지요.”
“아재 아재, 최은진이 누구인교?”
선준과 자령의 이야기를 곁에서 듣던 행장이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응, 나도 잘 모른다. 일단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구나.”
선준은 자령의 부탁이 자신의 예상에서는 너무 벗어난 것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자신과 행장이의 목숨을 구해준 자령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생각이었기에 꼭 이를 해내리라며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제가 최은진의 댁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만나 함께 저녁만 먹으면 된다는 말이오?”
“네.”
“아재, 우리 저녁밥 먹으러 가는교?”
“그렇단다. 그런데..”
선준은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묘령이 넘어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아무런 관계도, 연도 없는 낯선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 함께 저녁을 청한다니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부탁이었지만, 이를 부탁하는 자령의 속내도 무척이나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를 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을 텐데 낯선 사내인 나랑 밥을 먹자고 해야 한다니.. 이거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선비님, 걱정은 그만하시고 이제 가보시죠. 그녀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지라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릴 것입니다.”
“아재, 가 보아요. 저도 도울텐께.”
“그럼, 저녁을 다 먹고 나면 그걸로 끝이오? 다시 제가 자령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거요?”
자령은 이제야 자신의 뜻을 이해한 선준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네, 혹시 우리의 인연이 더 있다면 또 모르죠.”
“알겠소. 그럼 이만.”
자령은 곧 선준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선준 역시 자령이 일러준 집을 찾기 위해 바로 길을 나섰다.
“아재, 혹시 우리가 찾아가는 집이 그 악령과 관련 있는 집이 당가요?”
“아니다. 전혀 관계없다. 이건 그저 간밤에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저 아이, 자령에 대한 보답으로..”
“그랑가? 난 또 관련이 있는 줄 알았는디.”
선준은 흔쾌히 수락은 했지만 낯선 여인의 집에서 어떤 핑계로 저녁을 얻어먹을지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은진의 집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때는 묘시에 가까워 이미 저녁을 먹을 시간이 가까웠다.
‘저 집인가..?’
선준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는 낡고 허름한 기와집을 하나 발견했다. 필시, 한 때는 지역의 유지나 대감 정도는 살았을 법한 규모였다. 기와집과 별채 등을 포함하면 꽤나 큰 집이었는데 조금 열려있는 낡은 대문 안으로 보이는 마당 여기저기 자라난 잡초와 삭은 문창살들이 이 집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사람이 살긴..’
“아재 아재, 우리 오늘 여기서 저녁을 먹는 당가요?”
선준의 고민을 알 리 없는 행장이가 또 같은 질문을 했다.
“자야, 그렇단다. 그런데 여기는 누가 살기는 사는지..”
행장이는 선준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분명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뭔가 고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라믄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물어보면 될 것 같은디. 아재, 내가 가서 밥 좀 달라고 물어볼까요?”
하지만 선준 단호하게 행장이를 막아섰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도 아직 헷갈리는 마당에 행장이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다. 우선 내가 생각을 좀 더..”
“뉘신지요? 뉘시길래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이렇게 서성이시나요?”
선준은 뒤편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저희는..”
뒤를 돌아본 선준은 한눈에 그녀가 차령이 말한 은진, 최은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생각보다 큰 키에 앳된 얼굴을 한 그녀는 마치 어떤 사연이라도 간직한 듯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 어.. 그러니까..”
은진은 선준과 행장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른팔과 허리춤 사이에 천으로 덮인 바구니를 끼고 있었는데 필시 먹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 저기, 저희가 팔도를 유랑 중 인디요. 제가 다리를 다치고 열까지 나는 바람에 혹시.. 빈 집이나 빈 방이 있으면 묵어 갈 곳을 찾다 여기 대문이 열려있어서 혹시나 빈 집인가 하여 보던 차였어요.”
선준이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헤매는 동안 갑자기 행장이가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남의 집 앞에서 그런 건 아닌디..”
행장이는 어떻게 한 건지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해서는 정말 아픈 아이처럼 연기를 했다. 선준은 갑작스러운 행장이의 행동에 어쩔 줄 몰랐지만, 어떻게든 모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한 행장이의 임기응변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어머, 정말 열이 나는구나. 어쩐다. 이 근방에 버려진 초가집은 모두 아궁이가 무너져서 불도 못 뗄 텐데. 어떡하지.”
은진이 고민하는 사이 선준이 다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나섰다.
“아, 그럼 저희는 이만 다른 곳을..”
‘아앗..’
행장이는 자신이 겨우 만든 다된 밥에 코를 빠트리려는 선준을 막기 위해 일부러 다리를 저는 척하며 선준의 왼발을 밟았다.
“누.. 누이, 혹시 그럼 집에 남는 빈방이 있을랑가요..? 보아하니 집이 대궐 같아 남는 별채가 있을듯한디..”
선준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행장이는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게 아니라 은진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행장이의 부탁에 은진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얼굴에 열꽃이 필 것 같으니 우선 몸부터 챙겨야겠군요. 두 분, 제가 별채로 안내할 테니 그곳에서 잠시 쉬시지요. 이제 저녁에는 몹시 춥습니다. 선비님은 별채 아궁이에 불을 때는 걸 좀 도와주시겠어요?”
행장이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은진이 둘을 집안으로 들였다. 은진은 열에 좋은 말린 헛개를 찾으러 곳간으로 갔고 곧 별채로 들어간 선준과 행장이는 아주 조용히 기쁨의 환호를 나누었다.
“자야, 너,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아재, 나도 이 정도는 도울 수 있당게요. 앞으로 이런 일은 내가 도울게요. 히히.”
“자, 모두 잘들어, 난 병팔이랑 나머지 셋과 함께 쟤들을 쫓을 테니, 진둘, 너는 여기서 이렇게 다섯 명과 함께 입구에서 매복해라. 말봉이 넌, 저기 셋이랑 방금 쟤들이 올라간 오르막 길에서 대기해.”
“네.”
“네, 형님”
“가자!”
도진은 병팔 및 수하들과 함께 곧장 어린 호랑이 둘을 쫓아 올라갔다. 새끼 하나의 엉덩이에 활이 꽂혀 그리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으윽. 슥-‘
“잠깐, 병팔아, 너도 소리 들었냐?”
“네, 형님.”
한창을 뛰어 올라가던 도진은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에 수하들을 멈춰 세웠다. 분명 수풀이나 나뭇가지가 인위적으로 움직여 발생하는 소리였다.
“병팔아, 넌 저기 왼편을 수색해라. 그리고 야, 너희 둘은 저 앞쪽 우거진 수풀을 뒤져봐.”
도진은 수하들에게 명령을 한 뒤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찾기 시작했다.
‘스으윽, 부스럭-‘
도진은 자신의 오른편 아래 바위 위쪽으로 우거진 수풀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저기다, 저기.. 어!”
수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던 도진은 수풀 아래로 아직 그리 크진 않지만 묵직한 털북숭이 발이 하나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찾,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