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준은 상을 들고 들어오는 은진을 도와야 할지 그냥 상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면 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이, 제가 도울게요.”
“어머, 아니다. 호호.”
이번에도 행장이가 빨랐다. 선준은 어쩌면 임기응변은 행장이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짐을 느꼈다.
“처자.. 아니, 아가씨.. 아,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런지요?”
선준의 질문에 은진이 빙긋 웃어 보였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은진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던 선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녀가 상당한 미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은진이라고 부르십시오. 다른 호칭은 저도 낯간지럽사옵니다.”
“그럼, 은진.. 씨도 저희랑 같이 밥을 드시지요..?”
“아닙니다. 전 저녁을 차리며 이미 배를 채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선준은 은진을 붙들어 놓을 묘책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누이, 사실 저희가 누이에게 여쭐 게 있어서 온 건지라.. 그냥 밥만 퍼와서 같이 먹으면 안 된당가요..?”
그러자 은진이 돌아서며 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짐짓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때문이죠? 혹시, 누가 부탁한 게 있나요?”
“아닙니다. 부탁은 아니고..”
“저희가 악령을 쫒고 있는디요. 이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이에 대해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럼.. 식사를 얼른 끝내고 얘기 나누시지요.”
은진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선준과 행장은 천천히 들었던 숟가락으로 급하게 밥을 퍼서 입에 넣고는 거의 씹지도 않은 채 밥을 삼켰다.
"우걱우걱, 다, 다 먹었지라.”
“꿀꺽. 네, 저도 다 먹었습니다.”
그러자 은진은 바깥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은진 역시 필시 이들이 뭔가 원하는 게 있다고 느꼈는데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여기다. 여기가 은진의 안방이야. 어차피 혼자 살 테니 얼른 뒤져보고 나와야겠다.’
자령은 선준 일행이 그녀와 함께 별채의 사랑방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본채의 안방을 향해 발소리를 죽인 채 내 달렸다.
‘평범해. 조용하고.. 그리고.’
‘끼이익-‘
불 꺼진 안방은 고요했다. 자령은 미리 가져온 소형 호롱불을 꺼내 잠시 동안 방안을 밝혔다. 불이 켜지자 자령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맙소사..’
은진의 방안은 온갖 부적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방의 모든 벽에 부적이 붙어있었다. 방의 중간에는 신전으로 꾸며진 단상 앞으로 커다란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 아래로 수북이 쌓인 부적이 그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정말 무당이 맞긴 한가 보네. 근중이 괜한 거짓말을 한 건 아닌가 보군.’
자령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용된 부적을 찾아야 했다. 보통 부적의 경우 한 쌍으로 만들었다. 결계나 효력을 걸면 그걸 풀어내는 부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자령은 아버지에게 사용됐던 부적의 효력을 풀어내는 부적을 찾아야 했는데 도무지 그게 무엇인지 단서 하나도 찾지 못했다.
‘휙-‘
자령이 한창 부적을 뒤지고 있던 중 자신의 뒤로 무언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응? 뭐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한 자령은 다시 부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적의 종류가 너무나 많이 어쩌면 허탕을 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휙- 휙-‘
‘뭐야.. 밖에 누가 있나?’
한 번의 인기척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번의 인기척은 그럴 수 없다.
‘은진 말고는 이 집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자령은 초롱불을 끄고는 방구석으로 자리를 이동해서 바깥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정말 잘못 들은 거겠지?’
‘탁. 탁. 탁. 탁. 탁.’
그때였다. 자령의 정면에 있는 문창살에 사람의 손바닥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곧 삼면의 문에 수십 개의 손바닥이 나타나며 별안간 사정없이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퉁 탕탕탕. 탕탕탕. 퉁퉁. 탕탕탕.’
‘꿀꺽. 이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삼방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로 가득 차자 자령은 긴장을 넘어 점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귀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을 수 도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저.. 저 놈들도 연관이 있는 걸까..’
‘스윽. 스으윽.’
한창 문창살을 두들기던 손바닥 뒤로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는 거야. 이.. 이 놈들.’
자령은 사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눈앞의 것들이 귀신인지 결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단서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덜컹. 덜컹. 덜컹. 덜덜덜덜덜.’
문밖의 기괴한 것들은 급기야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문은 모두 잠금쇠가 없었기에 저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령의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온몸을 감싸는 공포감에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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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들의 무리라고 하셨나요?”
“네.”
“지금은,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혹시 축귀는 하셨는지요?”
은진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려 새하얀 팔뚝을 보여주었다. 은진이 팔뚝을 돌리자 마치 그림이라도 새겨 넣은 듯 새파란 문양이 팔뚝에 있었다.
“이.. 이것이 무엇이오?”
“강력한 놈들이었습니다. 마을에 유명한 무당과 축사하시는 스님들이 오셨지만 모두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이 흔적은 제가 만든 부적이 저를 지키다 타오른 흔적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저도 결국..”
“아재아재, 지금 시기와 지역을 보면 혹시 윤대감 악령 아인교..?”
선준은 행장이와 비슷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조선 팔도에 저 정도의 규모로 저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악령 무리는 필시 윤대감 악령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요?”
“전 제 몸을 부적으로 감싸고 도망쳤습니다. 그 뒤로 무당 하나와 스님이 불에 타 돌아가셨지요. 귀신 씐 사람들도 무서웠지만 그건 척결패가 내려와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건 사람을 쓰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악령들이었지요.”
“모습을 요..?”
“누이, 누이. 그 악령들, 어찌 생겼단가요?”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한 행장이가 악령들에 대해 물었고 선준 역시 은진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덜컹, 덜컹, 덜컹.’
별안간 본채 쪽에서 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이야기하던 은진은 얼굴에 핏기가 가시더니 벌떡하고 일어났다.
“선비님,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사옵니다. 누군가 안방에 들어온 것 같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