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세속적인 이야기

목적에 대한 수단의 이유 있는 변명

by Rooney Kim


짧은 크롭 티셔츠에 와이드 팬츠와 소위 힙합 바지로 불리는 펑퍼짐한 바지들이 이렇게 다시 유행할지 몰랐다.



학생 때나 보던 옷들이 다시 길거리를 지배하고 오래된 패션들이 현대적인 감성과 스타일로 재해석되어 다시 세련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역시 사람들의 욕망과 시선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쫓나보다. 촌스러운 것이 다시 괜찮아 보일 정도가 되었으니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욕망은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재현해 다시 그 목표를 이룰 정도로 긴 시간 침묵할 줄 아나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것이 내면이든 외면이든 그건 어디까지나 취향과 현재 상황에 달린 선택사항일 뿐 ‘아름다움’을 가지거나 닮거나 혹은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욕망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욕망의 목적


사회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돈을 잘 벌고 싶다는 욕망,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욕망, 좋은 차를 타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까지. 사회는 각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저마다 서로 재고 평가하며 순위 매기기에 급급한 '인간들의 야생’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적인 등급이 매겨진다. 가장 작은 사회적인 집단인 가족부터 학교는 물론, 성인이 된 이후 개인의 가장 큰 울타리가 되는 회사에는 공공연하게 용인되는 등급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집, 좋은 학벌, 대기업’을 가려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더 나은 곳’이라는 ‘등급’이 주는 안정감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영향력은 곧 타인의 시선을 압도하는 지배력이 되어 ‘사회’라는 ‘야생’에서 ‘조금 더 쉽게 자녀를 생산’하고 또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조금 더 쉽게 등급이 높은 학교’를 가고, 또 ‘조금 더 쉽게 연봉이 높은 직업’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게 인간의, 아니, 생명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참 아니러니 하게도, 또 욕망을 억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라고 강요한다.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수많은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니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타심 또한 생명의 본능이고 이는 때로 종을 넘어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마저도 무너뜨리는 따스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별 개체의 판단 영역이다. 막상 사회로 나오니, 그렇게 좋은 학교와 좋은 회사를 가야 한다고 소리치던 부모님, 선생님, 주변 사람들은 또 온데간데없이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니’, 무한대에 가까운 유혹과 선택지 중에서 겨우 한 곳을 정해 그것만 바라보며 달려온 이 시대의 무수한 청춘들에게 그 한마디는 하루아침에 눈앞에 보이던 결승점이 사라져 쉬지도 뛰지도 못하는 마라토너로 만들어 버렸다.


욕망은 수단일까


‘수단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생의 목표가 뭐냐라는 물음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이요!’는 좋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대답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나와 가족이 먹고살고 또 그다음 욕망의 계단을 좀 더 쉽고 빠르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을 버는 것’은 수단이고, ‘가족과 내가 행복한 것’이 목적이다. 나 역시 이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매우 동의한다.


그런데 솔직히, ‘소원, 꿈이 뭐냐’는 질문에 ’ 부자가 되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좋은 차를 타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편안한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운 거실의 소파에 앉아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기며 따사로운 글 한 자락 음미하는 게 행복(목적)’이라면 지금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행복을 ‘장기간 연장 및 조금 더 나은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돈과 건강’이다. 그 행복을 연장하고, 나뿐만이 아니라 ‘낚시나 하며 유유자적한 삶은 원하는 아빠’와 ‘쇼핑을 다니며 친구들과의 모임을 원하는 엄마’나 ‘시즌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니길 원하는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과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가 필요하다.


즉, 목적의 ‘지속적인’ 달성을 위해, 수단을 향한 끝없는 ‘집착과 업그레이드’는 필수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수단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타인에 피해를 주거나 범법을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순수히 자신과의 싸움을 통한 세속적인 욕망의 달성’에 한 한다.


한 때,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어떤 고급 브랜드의 자동차를 가지는 것’이다는 답변을 한 친구가 여러 친구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차라리, ‘대기업에 입사를 하겠다’ 거나 ‘사업을 해 성공하겠다’는게 더 목표와 꿈에 가깝지 않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고급 승용차를 가지는 것과 대기업 입사, 사업의 성공은 사실 모두 ‘수단’이다. 대부분의 사회 활동과 그 결과물은 모두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수단이든 달성 이후 ‘삶의 목적’은 대개 ‘나와 가족의 행복이라는 방향'으로 좁혀진다. 그리고 이 행복에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좋은 식사를 하며 좋은 집, 좋은 차 그리고 좋은 환경에서 지내며, 때때로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보내고 휴가 때는 해외에 며칠을 다녀올 수 있고, 그럼에도 돈이 남아 저축도하고 또 원하는 것도 살 수 있으며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조금 더 업그레이드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모두의 ‘인간적인 꿈’은 거의 비슷하다. 달리 말하자면, 어쩌면 ‘수단’은 인간 생의 '비슷한 큰 꿈'을 달성하기위한 무수히 많은 ‘작은 꿈’이 아닐까 한다.


조금은 세속적인 변명


그렇다. 세속적이다. 우리 모두는 세속적이다.


좋은 글을 쓰고, 좋은 말을 하면서도 ‘그 좋음’은 어쩌면 핑계에 가깝다. 그럴싸한 세속적인 변명으로 대중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는 연예인, 작가, 예술가들도 결국, 좋은 집과 차를 원한다. 그리고 이를 ‘조금 더 오래 지속’하기 위해 부동산을 사고 크고 작은 사업을 해 ‘수입의 부피’를 키우고 ‘자산의 물리적인 규모’를 늘린다.


‘아니, 이미 수백 억 원의 자산가이면서 또 빌딩을 사? 도대체 얼마나 더 해 먹으려고??’


월급쟁이 일반인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저들 역시 저들 레벨에서의 ‘안정과 두려움’이 있다. 이런 본능은 ‘처단’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동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정당화된다.



‘고급 승용차를 갖고 싶다는 꿈'이 사실 뭐 어떤가?


카푸어를 제외하고, 보통 자신의 드림카를 가졌다는 말은 여러 의미에서 수많은 수단의 단계를 달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뒤, 야근, 좌절, 성취, 도전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직도 하고, 그렇게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며 진급도 했을 테고, 성장과 성과를 보이며 연봉도 올렸을 것이다. 그 혼란한 와중에 연애도 하고 청혼도하여 결혼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이후 자녀가 탄생해 자신의 삶을 더 격렬히 불태웠을 것이다. 그게 다인가, 고시촌의 1.5평 방에서 시작한 청춘은 반지하와 옥탑방을 거쳐 월세, 전세 그리고 마침내 소중한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까지 ‘목적’을 위한 무수한 ‘수단’의 계단을 오르며 몇 번은 넘어져 자빠지고 굴렀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많은 계단을 올라 그토록 바랐던 ‘드림카’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 고급 승용차로 가족과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부모님도 만나고, 명절에는 전국을 누빌지도 모른다. ‘고급차’를 가지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은 ‘수단’의 달성과 함께 ‘목적’들도 함께 달성하는 중이다. ‘고급 승용차’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가 살아온 지난 삶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적어도 자신과 가족들’은 이해해 줄 것이다.


어쩌면 ‘저 차를 꼭 가지고야 말겠어!’라는 다짐에는 위와 같이 십 수년에 걸쳐 사회와 가족이 원하는 바와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사회,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한 뒤, 개개인의 적절한 시점에 이를 ‘구매’하여 나의 삶을 더 낫게 만들겠다는 긴 연대기가 압축되어있는 것과 같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글(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대개 글을 쓰고 싶다는, 그저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이유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한두 명의 사람들이 글을 읽어주고 칭찬을 하면 이는 곧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 대한 갈구’로 이어진다. 그렇게 자신의 글 조회수가 천 명이 넘고 만 명이 넘어가면 이제 자신의 글로 돈도 벌고 먹고살고 싶어 진다. 여전히 ‘글을 쓰는 것’ 자체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만족에 이르기 힘들어진 것이다.


비슷하게 시작한 주변의 작가들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작가들이 출판을 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연재가 성공하여 회당 수백만의 사람들이 글을 읽을 정도로 유명해지면 이는 곧 부러움을 넘어 질투가 되고 심하면 배알이 꼴려 심사가 뒤틀리는 지경에도 이른다. ‘내가 보기엔 그 정도의 글이 아닌데 왜 이렇게 인기가 많지?’, ‘차라리 이 사람의 글은 내가 봐도 훌륭한데 조회수는 왜 세 명을 넘기기가 힘들지?’ 이런 생각이 단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아마 다음 ‘욕망의 수단’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책을 내서, 글 쓰는 것 만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이런 욕망과 좋은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이 다를게 뭐가 있을까? '좋은 차를 샀다는 전제’가 '사회에서 밥벌이하고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십수 년간의 노력과 고통을 지나왔다'라면, ‘글 만으로 먹고살고 싶다는 것의 전제’는 '타고난 글솜씨, 십수 년간의 글쓰기, 수십 번의 공모전 도전, 독립 출판 또는 전자책 발행, 출판사와의 크고 작은 우여곡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열정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온 시간의 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열망도 삶의 에너지이기에


‘글만으로 먹고사는 꿈’


만약, 아직 어린 나이의 작가지망생이 이런 꿈을 가진다면 이는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이겠고, 이미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오른 작가라면 이는 아마도 곧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일 것이다.


남들의 눈에는 철없고 세속적인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튀어나가려는 감정을 제어했고, 폭발하며 분출하려는 태도를 고쳤으며, 칼날에 베이는 듯한 고통을 삼켰고, 자신을 억눌러 짓이기려는 절망을 깨부수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듬어내는 정당한 방법과 시간을 통해 성장했고, 크고 작은 것들을 이루어내며, 결과적으로 ‘세속적인 욕망’도 달성했다. 이후, 그 세속적인 욕망은 이제, 그저 ‘자신의 성공과 가족의 평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회라는 야생에서 얻은 작은 전리품이 되었다.


조금 세속적이면 어떤가. 조금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내가 잃을 것은 ‘속물 또는 변했다’는 지극히 현재의 상황만 반영하는 평가라면 내가 이를 이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건 ‘사회가 정의하는 보이지 않는 상위 등급의 달성과 나와 내 가족의 편안하고 안전한 현재와 미래’다.


물론,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그저 꾸준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노력과 시간을 태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세속적인 욕망’도 괜찮다. 자신의 꿈이,


‘고급 차를 가지는 것과 글만 써서 먹고살고 싶다’는 것이 되어도 충분히 이해된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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