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의 가치

도피와 탈가치가 가지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

by Rooney Kim


세상은 항상 변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그랬고, 부모님의 어린 시절도 그랬다. 변화는 새로움과 동시에 두려움이다. 변화라는 것은 마치 삶과 같아서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비극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그게 무엇이든 관계없이 '내 고통’이듯, 나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이 변할 때 가장 귀찮거나, 낯설거나, 괴롭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국 변화 앞에서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투쟁하거나 혹은 도피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거대한 변화 앞에 가장 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주도했고, 변화에 대한 권한이 없던 대다수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투쟁했으며, 그 외 대부분은 변화로부터 도피하거나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비율의 법칙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도하거나 투쟁하는 극소수가 될 수 없다. ‘난 달라, 난 투쟁할 수 있어!’라고 해도 당신을 제외한 80%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피가 과연 나쁜 것일까.


도피, 새로운 주도권


10년도 더 넘게 지속되어온 패션 업계에서의 스키니 열풍에 이상 조짐이 생겼다. 사람들이 자신의 멋을 위해 몸을 드러내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패션은 20년 정도에 한번 크게 변한다고 하더니 드디어 그 거대한 변화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 개개인 패션의 다양성은 더욱 풍부해져 유행과는 달리 자신의 멋을 지키는 사람들도 많지만, 소위 말하는 ‘트렌드’는 역시 현대 1020 남녀의 패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던 크롭티와 통바지가 다시 젊은 여성의 패션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로, 당장 지금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패션을 90년대 명동이나 압구정동의 패셔니스타들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나 역시 내가 대학생 시절, 캠퍼스나 길거리에서 보았던 2000년대의 패션들을 2021년의 거리에서 다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타인에 의한 변화는 괴롭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의 측면에서 패션은 훌륭한 도피처다. 내 마음대로 입어도 되고, 유행하는 트렌드를 직접 선택해 결정해도 된다.


언뜻 보면 트렌드를 쫓는 것 같지만 이를 선택하는 결정권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비록 ‘트렌드’라는 거대한 조류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이에 편승하느냐 마느냐는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10~20대가 지난 20여 년간 시장을 장악했던 패션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제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도망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고, 현실을 극복해 변화를 주도하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시대의 패션을 이끄는 젊은 층에서 패션 트렌드가 크게 유행해왔던 것도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불만족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인 자기만족, 자기 보상에 따른 결과다. 패션이야말로 기성세대 혹은 이전 세대의 굴레에서 탈피하고 자신들만의 것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내세우기 가장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이는 도피에 가깝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변화를 스스로 선택하고 다른 세대와의 차이를 스스로 구분 짓는 결정이라는 점에서, 아직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청춘의 가장 확실한 자기 제어, 자기표현 방법이다.


탈가치, 가치의 새로운 규정


2030 세대는 스스로를 탈가치 세대라고 한다. 하지만 탈가치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탈가치는 기성의 가치를 벗어나 현실에 알맞은 새로운 가치를 쫓는 중이다. 이는 이제 제아무리 노력해도 이루기 힘든, 전통적인 사회가 규정한 현실에 대한 반항을 넘어, 새로운 세대인 그들이 규정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뜻한다.


사회에는 그 안에서 획득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무수히 많은 가치가 있다.


자취방에서 전세 그리고 주택 구매로 이어지는 ‘주거 가치의 상승’이 그렇고, 연애에서 결혼 그리고 출산으로 이어지는 ‘생활 가치의 상승’이 그러하며, 작은 기업에서 큰 기업 혹은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거나,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회적 위치 가치의 상승’이 성인이 되면 누구나 꿈꿔온 대표적인 전통적인 가치들이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신체와 불굴의 의지밖에 없는 청춘들에게 위 세 가지 가치를 이루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이를 두고 기성세대는 ‘야, 라떼는 이래이래 저래 저래 해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어. 요즘 것들은 의지와 노력이 없어. 쯧’이라는 방구석 할아범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현실을 너무나도 모르는 소리다.


단순 평균 급여 대비 물가와 현재의 집값 그리고 그 상승세만 봐도 80~90년대의 20대와 현재의 20대가 동등선 상에서 경쟁할 순 없다. 물론, 지금도 좋은 기회가 있겠지만 그런 기회는 역사적으로 그걸 눈치챈 혹은 미리 알게 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려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보통 현대 청춘들의 아픔에 대한 시각을 정의 중이다.


모험은 언제나 두렵지만 짜릿한 법


전통의 가치를 포기한 그들의 탈가치가 지향하는 곳은 무가치한 곳이 아니다. 스키니 패션에서 크롭티와 통바지로 패션을 갈아탔듯, 현대 청춘의 가치도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지 가치 자체가 사라진 세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어른들이 보기엔 ‘도피’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주도적인 변화’이자, 생존을 위해 선택한 DNA의 본능적인 행보다.


현대의 젊은 이들은 ‘우리’ 보다는 ‘나’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중에 또 다른 세대는 분명 ‘우리’에 집중하겠지만 미래의 그들 현실과 현대 청춘의 현실은 또 다르기에 무엇 하나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나에게 집중하고, 주변 사람들이나 직장 생활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무게를 두고, 집을 살 수 없으니 좋은 차를 사는 젊은 이들에게 어른들은 꼭 이렇게 한마디를 거든다.


‘너네, 그렇게 해서 노후에 어떻게 살려고? 그러다 큰일 나.’


만약 정 좋은 잔소리를 한마디 하고 싶다면 적어도 주머니에 십만 원 정도는 챙겨주면서 잔소리를 해라. 하지만 그것도 한 번에 십만 원이다. 열 번 하려면 백만 원은 준비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고하니, 현대의 청춘은 그들의 노후는커녕, 당장 1년 뒤의 직장과 6개월 뒤의 월세와 이번 달의 생활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생계의 시험을 매번 목전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삶 속에서 그들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건 전통적인 ‘집’이나 ‘결혼’이나 ‘직장’이 아닌 그저 자신의 상황을 100% 알아주는 자신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대의 젊은 세대를 완전히 이해, 아니,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가치’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 생각해보아야 한다.


두 손이 묶인 채 접시 물에 코가 박혀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당장 그를 들어 올려주거나 접시를 치워주거나, 두 손을 풀어줘야지, ‘숨도 못 쉬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스스로 일어나라고 다그치며 거기에, 접시 물에서 빠져나오면 뭐할 건지에 대해 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젊은 세대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들에게 묻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자. 그게 반가운 인사든, 화해의 손짓이든, 도움이 손길이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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