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혐오의 학습

내가 느낀 감정은 정말 내 감정일까

by Rooney Kim


경험의 공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전이된다. 어떠한 방해와 조작이 있더라도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과 정신력으로 버티려 해도 소용없음을 느낄 때가 많다. 쉽게 전이된 감정은 쉽게 변질된다. 여기서 변질은 한 방향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때론 검게, 때론 하얗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티끌만 한 이유로 변한 감정을 보고 있자면 마치 자아가 두 개 이상은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게 전복된 감정의 회랑에서 배회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굳이 내 일도 아닌 것에 이렇게 사로잡혀 내 일상의 평온한 감정을 날려버렸을까?


망가진 기분은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때문에 평이했을 휴일의 오전도 즐거웠을 오후도 휘발되어 날아간다. 나의 일상에 생채기가 났고 망친 기분은 내 과거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렇게 망가진 감정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 분노로 이어진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여?
그런 일을 벌인 게 여자라고?
맞아, 그 범인, 남자일 줄 알았어.
이게 다 외국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그런 거야.
20대라고? 그럼 그렇지.
4,50대 아재들이 또?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가 넘쳐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던 일들도 어느새 나의 감정이 되었고 분노로 이어졌으며 이는 곧장 혐오를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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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누적된 분노의 총합이다. 단 한 번의 분노로 혐오가 발생할 수 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직간접적으로 노출되고 체험한 다중의 경험을 바탕으로 혐오가 탄생한다. 직접과 간접을 떠나 경험만큼 주관적인 것도 없지만 개개인에게 경험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주변을 떠올려보고 나의 말을 복기해 보면 금새 이해한다.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거기 갔다 왔잖아. 내가 직접 경험한 거라니까.
TV에서 봤어, 유튜브에 다 그 얘기더라.
뉴스에 온통 그 소식이다. 치가 떨린다 아주.


이제 ‘그것’에 관해 전이된 감정은 혐오로 까지 발전했다. 그 일에 대한 ‘분노와 혐오’는 이제 내 것이다. 난 이제 주관적으로 ‘그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그것’에 관한 온갖 나쁜 소식과 행태들이 눈에 더 잘 띄고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게 된다.


이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에서 평생에 걸쳐 나의 가치관, 사고관에 영향을 끼쳐, 남녀노소, 인종, 직업, 소득 등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렇게 나의 시각은 편향의 끝을 향해달린다. 이런 감정을 가진 자가 조금이라도 과격하고, 난폭하며,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면 ‘그 일’과 관련된 사건의 주인공이자 가해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는, 우리는 어떻게, 왜 그토록 ‘그것’을 혐오하게 되었을까?


분노, 혐오의 학습


인간의 역사를 근대 이전, 근대, 현대로 나뉘어보자.


근대 이전의 과거에는 ‘가족 -> 마을 -> 군락 -> 국가 -> 민족’으로 이어지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 듣고 보는 것이 달랐다. 따라서 ‘나’라는 개인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은 ‘가족, 친지’였고 이후, 세상에 대한 가장 큰 소식통은 군락의 범위에서 대부분 결정되었다. 이 단계 역시 현대와 같은 점이 있다면 ‘외부에 의한 감정의 변화, 전이’ 역시 ‘누군가의 소식’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현대와 다른 점은 타인에 의해 발생한 ‘이 소식을 보고 듣는데 오래 걸리고 적극적으로 수집하기 힘들다’는데 있다.


잘못된 정보, 주관적 해석, 관점에 따른 곡해, 시간에 의한 왜곡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으니 그런 미세 조정에 대한 변별성은 논외로 하고 여기서는 특정 소식의 노출 방법, 노출 정도, 노출량, 정보의 양에 따른 ‘개인 심리의 변화’에만 집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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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마을 게시판 시대


가족

가족 내에서 내 감정에, 계획에, 삶에 영향을 끼치는 건 단연, 가족 구성원들이다. 가깝게는 형제, 자매에 의한 비교, 서열, 멀게는 친척들의 성공, 무용담, 재산 등등이겠다. 속담으로 따지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정도겠다. 이 단계에서의 정보와 소식의 절대적인 영향권자는 단연, 어른들이었다.


마을/군락

지방 자치에서의 소식, 자잘한 사건 사고, 행사 및 잔치 소식, 어느 집안 누군가의 낭보 또는 부고, 나라에서 내려온 소식 등 지역 위주의 소식들이다. 내게 가장 영향력이 높은 건 여전히 가족들이고,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이웃들의 삶이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타인, 타 집단과의 비교를 통해 사회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국가/민족

나라의 중대사,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다양한 변화, 계획, 사건 사고 및 집행 소식 등 한 나라의 백성이라면 알아야 할 소식에 대한 방을 붙여 알렸다. 이는 주로 농사짓는 법, 세금 제도 개선, 주요 인사 소식, 국가 행사 등 먹고사는 방법부터 중대사 결정까지 다양했고 영향력 또한 컸다.


이런 마을 게시판 단계는 내가 특정 정보에 대해 관심이 가더라도 학문을 파고드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수집할 수 있는 정보나 데이터가 없던 시절이다. ‘게시판’ 자체가 오염되었을 수 도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 그렇게 전이된 감정을 더 큰 분노로 키우거나 혐오로까지 불사를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가 있었다.


근대: 신문부터 시작된 매스 미디어 시대


17세기 독일에서 최초로 신문이 발행되었고 19세기 기차 및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신문은 지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외부의 소식, 며칠을 가야 알 수 있는 곳의 소식을 몇 시간 만에 알게 되었고 사진의 발달로 전쟁의 참상, 유명인의 얼굴 등을 자신의 동네에서 볼 수 있게 되면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는 가족/마을에서 국가 단위, 타국의 소식 등으로 넓어지게 되었다.


신문 덕분에 전국 팔도의 소식을 자신의 집에서, 오직 나를 위해 구독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며 개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것이 생겼다. 가늠하기 힘들고 미지에 가깝던 ‘타 지역’과 ‘상류층’ 사람들의 소식까지 알게 되니 세상이 조금 만만해졌다.


동시에 간접경험으로 인한 감정의 전이와 변화의 폭과 속도는 더 커졌다. 즉, 대형 사건이 발생하면 하루 만에 거의 모든 전 국민이 하나의 감정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TV의 발명으로 더 빠르고 크게 확산되었다. 90년대에 ‘아동 유괴 사건, 조폭 살인 사건, 자연재해, 인재로 인한 대형 참사’ 등에 온 국민이 한 목소리를 내고 권선징악을 외쳤던 행태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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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유튜브 등 개인이 미디어가 된 시대


현시대의 SNS가 생기기 전, 한국은 이미 싸이월드와 아이러브스쿨 등을 경험하며 소셜미디어의 힘을 맛보았다. 따라서, 한 개인의 영향력이 타인,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디어의 힘은 주술과 비슷하다. 한 번 현혹되면 곧장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이 되어 합리화의 골짜기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 합리화의 힘은 굉장하다. ‘합리화=자존심’과 연결되어 있기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미디어가 바라는 지점이다. 뉴스를 던져 놓고 이를 덥석 무는 건 개개인들인데 이후 미디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서 분노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로 개개인이 미디어’가 되면서 이는 더욱 강력해졌다. 기존의 미디어가 한 날, 한 시에 국민들을 가르치고 시각을 돌리고 단합시켰다가 분열시키고 분노하게 했다가 안도하게 만들며 쥐락펴락하며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면, ‘개인 미디어 시대’에는 이제 이 주체가 ‘국가나 특정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는 게 개인 미디어시대의 가장 큰 변화인데, 이들은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수천, 수억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화된 미디어로 거짓말, 불안, 공포, 파괴, 허위에 무차별로 24시간 노출되며 호도된 개인들은 인구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분노와 혐오라는 폭력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현대의 개인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혐오를 학습하고 내재화하며 분노의 화신이 되어 여기저기 화를 발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학습된 감정 그리고 삶의 주의 사항


분노와 혐오의 학습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이로 인해 개개인의 감정과 정서가 무너지고 조작된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를 의심하고 항상 분노에 차, 과거에는 허허실실 웃고 넘겼던 일상적인 에피소드에도 욕설, 폭행이 난무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이어지는 현실이 하루에도 몇 건씩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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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선언과 판단에 나의 감정을 맡기고 의식주를 결정하며 가치관을 갈아엎는다.


우리는 타인의 영향력이 단순한 영향을 벗어나 선전이 되고 조종이 되며 명령이 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한번 발생한 혐오와 분노는 비슷한 주제의 글, 영상, 기사를 찾아 스스로 혐오를 학습하게 만든다. 편향은 본능이라 혐오와 분노를 끊임없이 확증시키고 결국 신봉하게 만든다.


인간의 감정과 판단력은 생각보다 강하지만 의외로 매우 약하다. 그렇기에 항시 자기 검열과 반성 그리고 5초 간의 심호흡이 없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진실과 정의만을 전달하는 순수의 시대는 이미 지나왔기에(진실과 정의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님) 정치, 경제 등 집단의 이익과 목표 달성을 위해 현대의 매스미디어와 개인 미디어는 언제든지 우리를 분노케 할 준비가 되어있다.


절대 간과해선 안 되는 건, 이를 정치적, 사상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편 가르기는 직접적인 이념 전쟁이 아니다. 인종, 종교, 성별, 세대 간, 지역 간, 직업 간, 소득 간 그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등등 갈등과 분열로 나라를 세밀하게 쪼개어 '나'라는 존재가 다수를 대표하며 소수를 차별하게 하거나, 소수에 속해 다수에게 차별당하며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만들어 다들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로 몰아가 결속력을 무너뜨리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개인에게는 정말 명분 없는 전쟁이다.


하지만 현혹된 눈을 개안시키는 것도, 씌인 멍에를 내려놓는 것도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다수가 이에 넘어가 다양한 혐오와 분노를 차곡차곡 적립하며 날로 날카로워지고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쓸모없는 분노와 혐오를 걷어내려 노력 중이다.


이것만은 꼭 기억해야한다.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도 선하고, 이타적이며,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분노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ko/s/%EC%82%AC%EC%A7%84/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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