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칼부림과 인권의 잣대에 관한 소시민 의견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by Rooney Kim

우선, 이 글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혼동을 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힌다. 혹시라도 나의 의견서에 이견이 있다면 당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


괴물의 탄생: 평범한 시민이 흉악범이 될 수 있는 시대


살아오면서 다양한 강력 범죄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의 끔찍한 사건들도 뉴스와 다큐를 통해 많이 접했다.


“끔찍한 범죄야.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흉악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지?”
“갈 거면 혼자가지. 왜 무고한 시민을 해쳐?”


보통 사람들은 강력 범죄나 테러 등 ‘인간’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사건에는 자연재해 또는 대형 참사와는 조금 다른 류의 분노를 표출한다.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법이 약해서, 공권력이 약해서, 처벌이 약해서, 또 시간이 흐르면 감형도 되고 수년 내로 출소’ 하니, 국민들은 범죄자들이 저지른 죄의 크기만큼 처벌을 받고 반성을 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한국의 교도소가 해외의 흉악범들의 환경에 비해 훨씬 좋다 보니 오히려 교도소에서 지내는 게 불편함이 없어 보일 정도이니 이에 대해선 더 할 말이 없다.


이 시대의 문제는 갑자기 그냥 만들어진 건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고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찌르고 죽이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는 왜 생겨나게 된 걸까. 나는 아래와 같은 요인들에 문제가 생기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태의 범죄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개인적 요인


최근 묻지 마 흉악 칼부림 사건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10~20대의 젊은 남성이었다.(물론, 이런 범죄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살기 힘들어서,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다른 사람들은 잘 사는데 나만 못하는 게 싫어서 등’ 이들의 진술로 말미암아 범죄자들은 ‘자신 안에서 자란 분노의 원인’을 대부분 외부에서 찾았다.


인성적인 요인일 수 도 있고 가정환경적인 요인일 수 도 있지만, 사실,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통의 원인을 타인, 집단, 사회, 국가 등 외부에 돌리고 한탄하거나 분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겪는 감정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때문에 타인을 찌를 수는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때 발생할 타인의 고통과 나의 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처벌’이라는 ‘부정적인 요인’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화’를 조절하고 억누를 수 있는 것이다.


범죄 억지 요인


이 말인즉슨, 우리는 이미 이런 형태의 ‘묻지 마 강력 범죄’를 억지할 수 있는 요인들, 즉,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보통 문명화된 그리고 현대화된 사회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규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가정 내 안전망이다.

부모, 형제, 자매의 역할에 따라 한 개인은 해도 되는 것과 참아야 되는 것 등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운다. 즉,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이유, 조절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둘째, 학교 및 집단 내 안전망이다.

교사, 친구, 지인 등의 역할 및 그들과의 관계에 따라 한 개인은 가족과의 관계와 비교해 더 엄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화를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물론, 이 경우 밸런스가 무너질 때마다 다툼이 오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각자의 상한선을 두고 있으며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면, 이 상한선은 보통 폭력 그리고 그 이상의 강력한 행위는 키우지 않는 걸 당연한 규율로 지켜왔다.


셋째, 치안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규율이 있다.

이 단계는 죄에 따라 구치소 수감, 재판, 판결에 따른 형벌 또는 엄벌이 따르는데 이 때, 가족, 지인의 인식은 물론, 사회 속에서는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이유로 인해 세 가지 안전망 중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


즉, 가족의 일원, 학교나 집단의 구성원, 국가와 사회의 한 시민으로 제약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한 개인이 지켜야 할 것은 꽤나 많고 덕분에 우리 개개인은 모두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과도 문제없이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회의 문제를 방지하는 ‘억지 요인들’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이를 최대한 잘 유지해 왔다. 아니, 잘 유지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20여 년 전 혹은 그 전이나 이후로 사회 전반에 걸쳐 안전망의 요인들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 나는 것 그리고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것만 나열해보겠다.


사회적 요인


가정

우선, 아이를 하나 둘 낳는 사회가 40여 년째 가까이 이어지다 보니 자식이 귀해진 시대가 되었다. 과거 1960년대만 해도 ‘농업’이 국가의 최대 산업 중 하나라 자녀를 많이 낳는 게 곧 국가의 경쟁력이었지만, 이후, 산업화, 정보화를 거치면서 ‘인구 조절’의 이유로 한 가정에 최대 둘만 낳도록 장려했다.


여기에는 세대 특유의 문제도 투입된다. 새로운 세대의 부모들 ‘자신이 어린 시절 누리지 못한 것’을 하나 둘 밖에 없는 내 자녀들에게 다 누리게 해주고 싶다 보니 자연스레 형제, 자매 간의 질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보다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욕망 충족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부모세대가 된 지금은 이제 더 나아가 ‘내 자녀의 감정’이 가장 예민한 주제가 되었다. (실제 어린이집 등에서의 학대는 차치하더라도)


학교

나의 학창 시절만 해도 교사에게 뺨을 맞거나 몽둥이로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맞는 것은 당연했다. 자녀를 귀하게 여긴 부모세대였음에도 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우러러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사의 미친 권리가 문제가 되던 시절임에도 그런 일들은 그저 ‘학생을 위한 교육’이라는 전제하에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나 ‘인권’이 강조되면서 촉법소년이 등장했고 어느새 교사들은 학생들을 ‘친구야’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그게 선도든, 타이름이든, 잘못에 대한 꾸중이든 ‘학생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아동 학대’가 되는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사실, 바르게 자랄 아이들은 환경의 요인을 떠나 알아서 바르게 자란다. 억지력과 지도력이 필요한 이유는 소수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과 그럼에도 절망에 빠진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사회

그런데 참 기가 막히게도 범죄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형벌과 처벌은 여전히 20여 년 전보다 나아지지 않아 보인다. 음주와 마약 등 제정신이 아닌 환각 상태와 정신병력은 이제 ‘심신 미약’이라는 이유로 감경의 재료가 되어 많은 범죄자들이 이를 애용하고 있다. 음주, 마약의 경우 더 강력하게 처벌하는 해외의 법률과는 아직도 괴리가 크다.


뿐만 아니다. 왜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우리는 ‘우리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온 범인’을 다치지 않고 제압 후 타이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길거리에서 흉악범이 흉기를 들고 덤비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때에도 ‘범죄자의 안전’을 고려하여 제압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범죄자가 고소를 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역인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왜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의 사람들을 지나치게 보호하고(촉법 등), 특정 집단의 힘을 지나치게 낮추고 (경찰, 교사),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인권에 더 눈치를 보게 되었을까. 도대체 인권은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이를 해석하는 잣대는 왜 항상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까.


계층

사회의 경쟁은 갈수록 심화된다. 당연히 빈부격차는 커진다. 취업도 어려운데, 주택구매는 더 어렵고, 사람들의 눈은 높아지는데 SNS 속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잘 사는 것 같다. 웃긴 건 덩달아 자신의 눈은 높아진다. 그렇다 ‘나만 빼고 잘살아’와 같은 착시가 현실화되고 물질 만능과 재력 숭배는 동시에 ‘평범한 사람이나 평범한 삶을 더욱 경시’하는 정확히는 ‘루저 취급하는 기현상’도 발생하는 중이다.


게다가 보통, 부자, 중산층, 서민층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하는 사회적인 부의 경계 역시, 계층 간의 사다리가 사라지거나 혹은 그마저 남은 사다리마저 너무 높은 지경에 이르러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잘 살고 싶은 사람마저 ‘자신의 삶이 잘못된 건 아닌가 고통스럽게 만드는 개탄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고통에 빠졌다는 이유가 ‘남을 해하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범죄 억지 요인인 세 단계의 안전망을 다시 정비하고 이를 어겼을 경우 받게 되는 처벌 역시 강화해야 한다.


자꾸만 ‘강한 처벌’에 대해 인권과 관용, 민주주의의 침해로 언급하는 이들이 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국제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이 ‘평화’의 근원이듯, ‘강력한 법’은 ‘사회 평화’를 위한 장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나치게 강력한 공권력은 ‘억울한 피해자’를 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과거, 공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는 ‘없는 죄’도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잡아가기도 했으니 그런 걱정을 할 법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강한 공권력과 법의 판단은 그 시절의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럼에도 억울한 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보통 이 경우는 경찰, 형사들의 ‘성과 압박이나 권력의 명령’에 의한 것일 확률이 높으므로 오히려 ‘경쟁, 성장, 성과주의’의 논리를 약화시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내'가 범죄자’로 누명을 써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과 '내'가 '피해자'가 되어 세상을 뜨거나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 중, 지금 우리는 어떤 형태의 결과에 닿을 확률이 높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소시민이 바라는 것


나는 공포를 기반으로 한 공권력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경찰의 힘으로 범죄 억지력이 강화되길 바랄 뿐이다. 즉, 강력 범죄자에게 존댓말로 부탁한다거나, 범죄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강력하게 제압하지 못하거나, 이에, 경찰이 오히려 불합리한 피해를 보지 않길 바랄 뿐이다.


관용과 민주주의는 사회의 존속을 위해 굉장히 중요하고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다만, 강력한 범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판결로 엄벌하여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길 바라고,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의 선택적 잣대를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누구나 갑작스러운 불특정다수의 피해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엄격한 법집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집에 불법으로 칩입한 사람에 대한 정당방위도 인정받기 어려운 이 시점에서, 공권력 마저 약하고 법조계의 판결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20여 년이 넘어가니 촉법소년들이 양산되고, 잠재된 범죄자들의 재범, 삼범을 하며 날뛰는 거 아닌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이유가 있더라도 지나치게 끔찍하게 흉악한 강력 범죄를 저지른 이에 대해서는 인권의 잣대보다는 비정상 범주의 인간에 대한 정상 범주의 시민 보호 차원에서라도 인권의 해석은 일차적으로 반드시 일반 시민과 피해자를 향해야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조건


인간의 아니, 생명의 본성은 이기적임에 더 가깝다. 생존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법은 물론, 도덕도 수치심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기에 모든 것을 끊어낸다.


즉, 어이없는 끔찍한 사건이나 강력 범죄가 최소화되고 억지될 때, 평범한 다수가 안심하고 본업에 매진할 수 있고 우리는 비로소 다시 '아름다울 수 있는 사회'를 꿈꿀 수 있기에 질서를 위한 힘의 조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민의 권리를 포기한 인권 탄압을 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안전과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적어도 ‘나의 평범한 일상에 발생한 끔찍한 사건’이 내 일이거나 우리 가족, 주변의 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범죄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한 공권력은 시민을 향한 공포 조성이 아니다. 범죄자든 예비범죄자의 범행을 미리 억지하기 위한 안전망과 이미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합당한 처벌을 바랄 뿐이다.


우리는 강하지만 친절한 경찰을 원하고,
우리는 엄중하고 중심이 잡힌 검찰을 원하며,
우리는 피의자보다 피해자의 권리와 삶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재판부를 원한다.


이미 우리 공동체는 언제 큰 사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면역력이 약화되었다. 즉, 칼부림이 공동체를 흔들어 놓은 사건은 맞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우리 사회의 질서와 공권력의 대응, 법안정망, 집행체계가 이미 얼마나 취약 해져있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경검, 재판부가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모자라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훨씬 윗선에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문제 해결은 커녕, 인식까지 되지 않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서 윗선은 '국민의 살림과 사회의 안전망'을 살피고 '법이나 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진 이들을 지칭한다.


중대한 피의자를 강력히 처벌한다고 해서 관용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집단은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수호하되 억울한 일이 없도록 보살피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억울한 피의자’가 생겨도 안되지만 무엇보다 ‘억울한 시민의 피해가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시민들은 준비되었다. 이젠 이를 ‘법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이들’의 답변을 들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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