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백귀로씨에게 들은 것이라.. 그런데 조선 천지에 그렇게 큰 악령은 이무량 밖에 없지 않습니까?”
“흐음, 글쎄다.”
이에 선준도 이참에 자신의 경험도 얘기할 겸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인귀도 있지만, 제 아무리 거인귀라고 해 봐야 작은 산 만한 정도지, 제 눈의 크기가 하늘 만할 순 없지 않습니까?”
“흐음, 그랴, 그 말도 일리는 있지. 그런데 이무량이 여기에 왔다고? 그럴 일이 없을 텐데.”
“할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정말 이무량이 돌아왔다면 이건 단순히, 대벽 고을만의 일은 아닙니다.”
“응, 그랴 그랴, 조선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지.”
“할멈, 백귀로씨가 그 날 밤 이 무량의 눈을 본 이후, 얼마 안 가 마을에 환난이 일었습니다. 그때 기억 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 때는 그 커다란 눈 이야기를 안 하지 않았냐. 난 인간들 일은 이제 신경쓰기도 싫어.”
“에이, 할멈..! 귀신들린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그건 어디 사람만의 일인가요..? 암튼, 그땐 저도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저 도움만 구하러 온 것이었죠. 그런데 다시 마을로 돌아가보니 백귀로씨가 이미 귀문을 열고 영계로 들어간 뒤였습니다. 전, 어떻게든 혼자 악령들을 막고 다시 귀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은진아, 너도 참. 니 팔자 네가 꼬는 성격이다. 아휴, 처음엔 무당이 되기 싫다고 찾아오고, 한 번은 마을에 악령들을 잡아달라고 오더니, 이젠, 이무량이냐? 그리고 귀로도 같이? 에이. 어째 요샌 나한테 지 팔자 스스로 꼬려는 애들만 이리 찾아오냐. 끌끌.”
할멈이 은진을 보며 혀를 차자 은진은 이내 마치 풀 죽은 아이 마냥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 할미도 이젠 신력이고 도력이고 다 떨어져서 잘은 모르겠는데, 설사, 이무량이라고 쳐도, 난 못해. 그 녀석을 누가 감당해. 이젠 내 말 도 안 들을 거고.. 그나저나, 진짜 이무량이 맞는지, 그것부터 확인해 봐.”
할멈이 다시 말을 이어가자 은진은 마치 사그라지던 희망이 불꽃을 다시 살릴 기회를 얻은 냥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할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귀로 그 양반 만나러 가는 귀문은 내가 열어줄 테니 나랑 날과 시를 맞춰, 모레 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사이에 부적을 준비해. 시작 전에 귀문관살부(鬼門關煞符: 귀신이 들지 못하게 하는 부적)와 축사부(逐邪符: 요괴와 귀신을 막는 부적)를 안방의 벽에 한 쌍씩 붙여둬. 귀문은 아무나 못 여니 내가 여기서 귀문을 열거야. 정확히 자시부터 준비해서, 자시 내내 기도를 해야 한다. 알겠지?”
할멈이 설명을 끝내자 방 안은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며 조금은 오싹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백귀로씨야 영계로 들어가서 어떻게든 데려온다고 해도, 이무량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악령 중의 악령, 악령의 우두머리로 불리는 대악 이무량이 정말 대벽 마을로 들어온 것이라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우당탕, 탕탕’
‘콰다당, 쨍그랑’
‘후다닥, 후다다닥. 토다다다닥.’
“아이, 깜짝이야!”
할멈부터 선준, 행장이까지 모두 다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한참 몰입하던 중 갑작스럽게 바깥에서 들려온 큰 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엥이, 저것들이 또 저런다, 또 혼이 한 번 나야지. 내 요것들을.”
“뭐.. 뭔가요?”
선준이 놀란 눈으로 할멈과 은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긴 뭐야, 흰둥이(해치)랑 불덩이(불가살이)지.”
할멈은 곧바로 방 안을 빠져나갔고 뒤이어 선준과 은진 모두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둘이 먹던 밥그릇이 널브러져 있었고 우물 근처에 세워둔 작은 장독 뚜껑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 있었다.
“하이고, 요것들, 내 우물에 들어갈 때는 천천히 들어가래니까. 엥이. 요 녀석들 내가 오늘은 꼭 혼쭐을 내줘야지.”
“우물요..? 아까, 제가 나온 그 우물말인가요?”
선준이 은진을 보며 물었다.
“네, 무언가가 결계에 걸렸나 봐요. 해치랑 불가살이가 그걸 보러 간 겁니다. 잡령이나 도적이면 잡아먹을 테고, 선한 사람이라면 또 인도해 주겠죠.”
‘꿀꺽.’
선준은 해치와 불가살이가 도적과 같은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곤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이율배반적인 오싹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긴, 아까 결계 속 산에서 만났을 땐 선준도 기겁을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장이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뭐가 좋은지 해치와 불가살이가 귀엽다며 난리였다.
—————
“형님, 형니임..!!”
대벽산 중턱의 바위 산에 앉아 첩보를 기다리던 근중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올라온 정근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헉헉.. 형니.. 헉헉헉, 형님..”
“가, 감사합니다요. 꿀꺽, 꿀꺽”
“그래 그래, 좀 쉬었다 말하거라. 분위기는 어떻냐. 정말 천검의 말이 사실이냐?”
근중은 물론, 정태와 물포까지 대벽 마을의 관아와 인근 훈련장까지 모두 돌아보고 온 정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헉헉, 네, 사실이다마다요. 사실일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갑사.. 헉, 커헉, 큽큭.”
“야야, 쉬엄쉬엄 말해, 너 그러다 탈 난다.”
“켁, 네, 형님.”
천검이 경고하고 간 덕분에 여러 가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병력이 모였다면 이는 척결패에게 가장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를 일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결패가 불한당 같은 검계(劍契)도 아니고, 산중에서 조용히 활동하며 버릇이 안 좋은 중인들만 골탕 먹이는 자신과 척결패에게 이렇게까지 할 정도인가 하는 조금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 천천히 말해보거라.”
“형님,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을에 정찰을 하러 갔을 땐 이미 관아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왜? 뭐 때문에? 아유, 답답해. 도대체 뭔 일이람.”
물포는 이유를 알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내심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서반 아전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몰래 관아에 들어가 객사, 포도청 모두 샅샅이 뒤져봤는데도 서반 아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옥에 있나 해서 거기도 둘러봤지만 허사였지요. 반면..”
“그래, 뭘 또 발견했느냐?”
“훈련장에 굉장히 많은 수의 포졸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행색으로 보아 나졸도 있었고 또.. 그.. 뭐냐, 엄청 강해 보이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
“갑사 말이냐?”
“네!! 가, 갑사들을 보았습니다. 착호갑사로는 안 보였답니다.”
“이 새끼들이..”
근중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상기되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화가 가득 차올랐다. 그도 그런 게 그들이 대벽 마을에 모인 이유가 천검의 말대로 척결패를 치기 위함이라면 너무나도 억울한 누명을 씌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형님, 저들이.. 저, 저들이 정말 우리를 치려고 모인 걸까요?”
물포의 한 마디에 정근은 화들짝 놀라 그들과 근중을 바라보았다.
“얏, 으이구, 입 조심 좀 해. 정근이도 있는데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정근아 수고했다. 자, 여기 세 냥 줄 테니 내려가서 고생한 애들 배를 채워주거라. 우리는 여기에 조금 더 있다 내려가마.”
“네, 넷! 감사합니다요. 흐흐.”
정근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음이 걸렸지만 설사 엄청난 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근중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처신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덥석 받아서는 넙쭉 인사를 하고 다시 급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형님, 아니, 우리가 검계(劍契)나 살주계(殺主契) (둘 다 조선시대의 범죄집단)도 아니고, 지금은 부패한 이들을 털어서 민초들에게도 나눠주는 의적들인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물포야, 그러니까 형님이 생각 좀 하게 조용히 좀 있어봐라. 으이구..”
근중은 먼 산과 마을을 둘러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로지 자신만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 근중은 못할 게 없었다. 하지만, 또 자신과 척결패로 인해 그들이 사지에 몰리는 일은 없길 바랐다. 근중 역시 다른 검계(劍契)들과 척결패의 다른 점은 의로운 일을 행하기 위해 싸우는 것 그리고 이를 민초들과 나눈다는데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얘들아, 가자.”
“네? 형님, 어떻게 하시려구요??”
“일단, 내려가자. 가서 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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