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도화선 - 움직일 시간

by Rooney Kim


순간, 월화와 눈이 마주친 천검은 하마터면 반가움에 달려갈 뻔했다. 하지만, 한양에서 내려온 갑사들과 관아의 아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월화를 반길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월화가 자신에게 달려와 전에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는 척이라도 하면 월화와 천검 둘 다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월화는 영리했다. 월화는 천검이 자신을 알아보자 다시 근중을 올려다보았다. 근중은 여전히 녀석의 행동에 어리둥절했지만 왠지 녀석의 낯이 익어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천검 형님, 말봉이와 진둘이에게 대벽산 초입과 중턱에 애들을 배치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저 호랑이는 필시 대벽산으로 달아날 테니 그리 몰아갈까요?”


“그래, 일단 산으로 가자. 여기서는 위험하다. 아, 병팔아, 애들에게 전해라. 저 녀석은 산으로 몰아 쫓아내기면 하면 된다. 절대, 결코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알겠냐?”


“아니, 형님. 왜..?”


“야, 이 자식, 너 쟤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네?? 쟤가 누군데요..?”


천검의 말에 퍼뜩 이해가 안 간 병팔이 호랑이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위험하고 커다란 범 한 마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에 대벽산에서 나랑 만난 호랑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아아..!”


천검은 다른 갑사들이 듣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면 설명했다. 그제가 병팔을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이 난다는 얼굴로 천검을 바라보았다.


“자, 어서 녀석을 몰아 산으로 보내자. 대벽산에는 우리만 있으니 오히려 안전하다.”


월화는 천검을 다시 그윽하게 바라본 뒤 옆길로 냅다 달리며 사 척이 넘는 높이의 담벼락을 훌쩍 넘어 사라졌다.


“가자! 호랑이를 쫓아라.”


병팔이의 외침에 착호패들은 모두 관아를 빠져나가 대벽산으로 향했다. 천검은 대청 위의 근중과 눈을 마주쳤다. 근중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천검이 눈인사로 답한 뒤 관아를 빠져나갔다. 때는 유시 (酉時, 오후 5시 오후 7시)에 접어든 지 한창이라 해는 이미 떨어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대벽산과 대벽마을을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


선준 일행이 모두 산 아래로 내려가자 할멈도 어딘가로 갈 채비를 했다. 온갖 부적과 지팡이 그리고 먹을 것들을 보따리에 싸서는 선준 일행이 내려간 반대 방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내일 밤까지는 도착하겠지. 이제 다 늙어빠져서 기력도 없었는데. 허허, 이것도 나름 재미라면 재미려나 한밤중이지만 나들이 가는 것 같구만.’


선준 일행과 모레 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시간을 맞춰 귀문을 열기로 한 할멈은 그 시각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길을 나서는 중이었다.


“흰둥아, 불덩아, 너넨 계속 집이랑 봉우리를 잘 지키고 있거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오면 된다.”


“꺄르르르룽.”


“아구랴, 구량.”


할멈이 집을 나서자 흰둥이와 불덩이가 이리저리 날뛰며 할멈을 배웅했다. 할멈은 그런 둘의 귀여운 모습에 한 번 웃고는 돌아서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주사는 진짜 오랜만이군. 거긴 아직도 여전하려나. 정법도 안 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구만. 파계승 소리를 듣고도 아직 거기에 있는 걸 보면 정신력이 대단해. 근데 그놈은 그래도 싸지 뭐.’


할멈이 집을 떠나자 할멈의 뒤로 짙은 안개가 끼며 할멈의 집을 감췄고 할멈은 부지런히 성주사를 향했다.


—————


“아재, 아재, 그랑께, 그럼, 오늘도 은진 누이집에서 하룻밤 더 자능교? 밥도 여기서 먹고? 으히히.”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행장이가 신이 났는지 은진과 자령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연신 물어댔다.


“자야, 이번에 은진씨께 신세를 많이 졌다. 그러니 이번 일을 통해 이 빚을 꼭 갚도록 하자꾸나.”


“빚이라뇨. 저 혼자 감당이 안되던 차에 이렇게 우연히도 나타나 도움을 주시니 저로써는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가 이제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대벽마을에 있는 동안은 사랑채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선준과 행장이가 대화하던 중 은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슬며시 끼어들었다. 사실, 은진 역시 귀문과 관련하여 고민이 많았던 차였다.


“아, 아닙니다. 아무튼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 그런데..”


“네, 말씀하시지요?”


“내일 밤에 귀문을 열고 백귀로씨를 구하러 가는 거야, 자령과 대벽 마을을 위해 하는 건데. 혹시, 은진씨는 이 마을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여쭤도 되겠소..? 만약, 실례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궁금해서 물은 거니..”


은진은 선준의 물음에 두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선준은 은진의 행동에는 필시 특별한 연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아, 죄송하오.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다시 거둬가겠소.”


“아닙니다. 혼기도 훌쩍 넘긴 다 큰 처녀가 빈 집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고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거나 수상쩍을 수 있지요.”


선준과 행장이는 마치 어제처럼 은진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길고 긴 하루였다. 행장이 뿐만 아니라 선준이 느끼기에도 족히 나흘은 지난 기분이 들었다.


“음주가무가 있는 곳에 항상 수많은 귀신이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겠죠?”


“그야 당연하죠. 축귀의 기본은 영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는 것부터 시작이니까요.”


“맞습니다. 영들은, 특히, 백중에 이승을 떠나지 않고 현실 세계에 집착하는 잡령이나, 사람들에게서 기운을 얻어 이승의 삶을 연명하려는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을 먹고 살지요.”


“술을 마시면 정신이 혼탁해지고 잠시 중심을 놓게 되니 더 잘 들러붙지 않소? 그래서 범죄도 더 많이, 더 잘 일어나고..”


“맞습니다. 그런데 술보다 더 강력하고 끈질기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마음을 완전히 파멸시켜 악령에게 바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은진의 질문에 선준은 퍼뜩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보통 술을 마시면 범죄가 잦은 게 귀신이 장난친다고 하는데, 그 보다 더 한 것이라니 청나라 술이나 서방 국가의 묘주라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음.. 혹시, 금이나 돈이오?”


그리고 은진은 입을 가리며 살짝 웃어 보이고는 답했다.


“아니오. 아편입니다.”


“아..! 아편이라, 아편이 있었군요. 그런데 조선땅에서 아편을 쉽게 구하기는 힘들지 않나요? 관아는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단속이 심하고 아편을 한 자들이나 재배하고 판매한 자들은 엄중히 다스린다고 들었는데요.”


“다 마음먹기에 달렸겠지요? 호호.”


은진은 대답 후 살짝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지난 시간을 빠르게 속기하며 지나온 끔찍한 감정들을 겨우 추스르고 극복한 뒤에나 겨우 보일 수 있을만한 웃음이었다.


“선비님, 제가 여기서 혼자 무얼하고 있는지 물으셨지요?”


선준은 은진의 진지하고 담백한 목소리에 자못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저는 아편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를 세상에 낳은 제 어머니는 아마도 그 끔찍한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이미 아편에 찌들 대로 찌들어버린 아버지에게서 저를 떼어 놓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잃으셨지요.”




눈꽃이 필 무렵은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리그와 문피아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리그: https://novel.naver.com/my/myNovelList?novelId=1020387

• 문피아: https://novel.munpia.com/245153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snow-mountain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4화 도화선 - 선의의 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