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죄송하오. 혹시라도 불편하다면 더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머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무사한지요?”
“만약, 그때 무사히 그 일들을 헤쳐나가셨다면 한양에서 잘 살고 계시겠지요?”
“살아계실 수 도 있다는 말이라면.. 연락이 끊겼다는 말이지요? 혹시 어떤 분이셨는지..?”
“저희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한때는 조선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고 들었지요. 지금이야 나이도 많이 들었을 테니..”
선준은 전혀 뜻밖의 얘기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설픈 위로도 어쭙잖은 한 마디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아,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선준은 은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어떤 사연이 있을지 모를 텅 빈 빈집에 머무는 이유를 드디어 듣게 된 것이다.
“아직 구천을 떠돌며 아편의 유혹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제 아비를.. 영영 저승으로 보내버리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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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팔아, 얘들 스무 명 정도 데리고 산 우측으로 올라가라, 말봉이는 열댓 명을 데리고 좌측 골짜기를 통해서 대벽산 중턱까지 쫓아라. 난, 진둘이랑 다섯 정도 더 데리고 중앙으로 올라가겠다. 모두 이해했지?”
“넵!”
“네, 넷! 형님, 그런데 쫓은 뒤에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때 그 호랑이 굴을 기억하느냐?”
“네, 형님.”
천검은 그 사이 관아에 모두 모인 착호갑사패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호랑이 굴 입구까지만 쫓는다. 거기서 나랑 만나자. 이상, 어서 쫓아가!”
천검의 명령이 끝남과 동시에 범사파는 세 무리로 갈라져서 대벽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때는 이미 늦은 유시 (酉時, 오후 5시 오후 7시)에 접어들어 산은 어둠이 내려앉아 횃불 없이는 수색은커녕 산길을 찾기도 힘들 지경이었지만 꽹과리를 치고 나팔까지 불며 산 길을 뛰어 올라갔다.
“헉헉헉, 혀, 형님. 벌써 도착하셨습니까요..? 헥헥.”
“말봉이 너도 올라오는 길에 아무것도 못 보았느냐?”
“헥헥, 네, 형님. 헉헉.”
‘병팔이도 못 봤다고 하고.. 월화 이 녀석, 벌써 호랑이 굴로 들어갔나? 아니면 다른 길로 샜나?’
천검 역시 월화를 쫓아 대벽산의 중턱까지 올라왔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월화가 관아에까지 들어왔고, 관아에는 근중이 갑사들과 대치중이었다? 이게 뭘 의미할까..’
병팔과 말봉, 진둘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천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관아가 업무를 끝낸 시각에 근중은 왜 거기에 있었을까? 게다가 대청에 올라가 있었단 말이지. 참, 동헌 정청의 문도 열려있었어. 사또도 이방도 없었는데 말이야. 아, 이거 참 헷갈리네. 그런데 왜 또 하필 월화가 거기에 끼어들어서 우리를 이리로 불러들였지?’
“형님, 형님..?”
병팔은 이미 술시 (戌時, 오후 7시 오후 9시)가 되어 짙은 밤이 깊어가고 있는 이때,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 호랑이를 쫓는 건 더 이상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천검에게 이후 계획에 대해 물을 참이었다.
“혀.. 형님..?”
하지만 천검은 아까 그 상황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깊게 추론하느라 병팔의 부름을 전혀 듣지 못했다.
‘설마.. 진짜 그게 이유일까?’
“형니임!!!”
병팔은 천검이 또 깊은 생각에 빠져있자 도저히 안 되겠는지 큰소리로 천검을 부르고 말았다. 착호를 위해 자신들의 뒤에서 저녁도 굶고 산 중턱까지 올라온 애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 깜짝이야. 왜 그러느냐?”
“형님, 호랑이는 쥐뿔도 보이지 않고 이제 밤은 너무 깊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내려가는 게 어떨지요..?”
정신을 차린 천검이 주변을 둘러보자 횃불을 든 수십의 착호갑사들이 지친 기색으로 천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아차.. 미안하다. 호랑이 굴까지 오면 녀석을 발견할 수 있을까 했는데. 네 말이 옳다. 자, 이제 모두 하산하자. 착호는 끝났다. 호랑이는 멀리 달아났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이상, 해산!”
천검의 명령에 서로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갑사들은 병팔과 말봉, 진둘의 지시에 따라 하나 둘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팔아, 자 받거라.”
병팔은 천검이 던져준 돈뭉치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형님 이게 뭐요? 아니, 이게 몇 냥이오? 이리 큰돈을..”
“얘들이랑 모두 산 아래로 내려가면 어디 주막에라도 가서 밥을 먹여 보내거라. 술도 좀 사주고.”
“아싸, 키아, 역시 천검 형님이십니다. 이히, 오늘은 술이나 잔뜩 걸치고 자야겠다.”
천검이 던져준 돈에 제일 신이 난 건 역시나 말봉이었다.
“형님은 요? 같이 식사 안 하시렵니까?”
“응, 난 됐다. 난 좀 더 볼 일이 있으니 먼저 내려가거라.”
“네..?! 이 밤에, 이 산속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형님, 저희랑 같이..”
병팔이 천검을 만류하려 다가가자 말봉과 진둘이 스윽하고 다가오더니 병팔의 양팔을 잡고는 끌고 내려갔다.
“천검 형님, 그럼 저희는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히히.”
“형님, 그래도 조심하십쇼!”
“아니, 이것들아, 이것 좀 놔봐. 형님이 이 밤에 혼자 산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아, 병팔 형님, 천검 형님이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소? 어차피 도진 형님도 오랜만에 나와서 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같이 가보시지요.”
“도진 형님?! 다리는 좀 어떠신가?”
“궁금하시죠? 그럼 얼른 같이 내려가시죠.”
천검은 갑사들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돌아보고 있었다. 천검은 필시 월화가 이 근처에 있다고 믿었다. 당장, 호랑이 굴의 주변을 다시 수색하면 월화의 위치는 바로 발각될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챈 천검은 혹시라도 서로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갑사들을 당장 해산시키고 산 아래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검으로서도 깊은 밤 산중에 홀로 호랑이를 마주하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게 제아무리 월화라도 말이다.
“월화야.. 월화야 네, 게 있느냐?”
천검은 사그락거리는 수풀의 부딪힘 조차도 크게 울리는 야밤의 고요한 산중에 대고 조용히 월화를 불러보았다.
‘사부작, 사부작’
그러자 거짓말처럼 호랑이 굴 위쪽의 울창한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그 속으로 무언가 큰 것의 움직임이 보였다. 당연히 천검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월화야, 너냐?”
천하의 용맹한 착호갑사인 천검도 내심 긴장이 되었는지 한 손은 칼자루에서 댄 채 천천히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월화야, 네가 맞다면 나와보거라. 여기에 이제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스르륵, 스르륵.’
‘쏴아아-‘
제아무리 밝은 횃불을 들고 있다고 해도 깊은 밤의 어둠을 모두 밝히기는 힘든 터,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온 월화 때문에 천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르르, 그르르르릉.’
횃불로 월화의 얼굴을 확인한 천검은 월화의 반기는 소리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월화야..! 역시 너였구나. 이리 오너라.”
마침내 천검이 횃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팔을 벌리자 월화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검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그르르릉, 크르르르 크앙.”
“그래그래, 옳지. 반갑다, 이 녀석아. 요 며칠간 나를 아주 여러 번 깜짝 놀래키는구나.”
천검은 자리에 앉아 월화를 마치 어린아이를 안듯 품었다. 월화의 보드라운 이마와 등을 쓰다듬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관아에 들어간 것이냐. 그리고 관아에는 근중과 갑사들이 있었는데.. 혹시 근중이 그리 갈 걸 알고 간 게냐?”
월화가 똑똑하다한들 사람의 말을 알아듣거나 대답을 하진 못할 터, 하지만, 천검은 월화라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신에게 대답해 줄 것 만 같았다.
월화는 당장 천검의 물음에 대답을 하기보단 얼굴과 머리, 등을 천검에게 비비대며 애교와 아양을 떨기 바빴다. 이는 마치, 평생을 못 볼 부모를 다시 만나 어린 시절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같았다.
“허허허, 이놈, 정말 내 새끼 같구나. 그래, 월화 넌 내 새끼 맞지, 맞다.”
“그르르르릉. 크아앙.”
“월화야, 혹시 근중이 관아에 간 걸 알고 간 거냐..?”
월화의 어리광에 한참을 쓰다듬어 주던 천검이 다시 월화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월화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에 놀란 천검이 월화의 대답을 확인할 겸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근중이 위험에 빠질걸 알고 구하러 간 거냐?”
월화는 이제 자세를 고쳐 앉고 천검을 빤히 바라보며 두 눈을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이 몹시 대견한 천검은 월화를 꼬옥 안아주었다.
“정말 용하구나.. 그래, 월화 너, 근중이도.. 근중이 자식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르르르릉. 끄앙.. 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