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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필 무렵
41화 귀문(鬼門) - 처연한 새벽 1
by
Rooney Kim
Jun 10. 2023
'탁'
곧 신문실의 문이 닫혔다. 문창살에 거적을 매달아 놓아 외부의 불빛이 모두 차단된 채 오로지 방 중앙의 촛불만이 물포와 포도부장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일이냐?"
"그렇소만."
"어허, 포도부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물포가 여전히 불량한 태도로 일관하자 포도부장 뒤에 있던 무관 하나가 버럭 하며 소리 질렀다.
"깜짝이야. 됐다. 너 때문에 괜히 나만 놀랐네."
그러자 포도부장 뒤의 무관이 자세를 고치며 다시 고개를 정면을 향해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 양귀비 밭에는 왜 간 것이냐?"
"간찰을 받았소. 선창이 놈이 보낸 건지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다짜고짜 정오에 거기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갔더니 양귀비 밭이다?"
"그렇다니까요."
포도 부장은 물포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왕방울만 한 두 눈으로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보는 포도부장의 눈에서
발광하는
안광에 제아무리 겁 없기로 이름난 물포도 마른침을 삼키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탁.'
"자, 이거 맡아봐라."
"이게 뭐요?"
탁자 위 포도부장이 내려놓은 잔 안에는 갈색의 즙액이 있었다.
'킁킁.'
"엇. 이게 무슨 냄새야."
잔을 들고 냄새를 맡던 물포가 갑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냐? 혹시 처음 맡아보냐? 산적 놈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처음엔 달달한 단내가 나서 꿀인가 했더니 뭔가 톡 하고 코를 쏘네. 이게 당최 뭐요?"
포도부장은 다시 한번 물포의 얼굴과 손을 살폈다. 물포가 모른 척 연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편 즙액의 향에 대한 반응이나 손떨림이 없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물포는 양귀비 밭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나참, 이것들이.. 거기 산적 양반."
포도 부장의 목소리가 묘하게 변하자 물포는 조금 긴장했다. 제아무리 떳떳하고 죄가 없다지만 포도부장의 힘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였으니 포도부장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없는 죄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때 그 간찰 가지고 있소?"
"그.. 그렇소만. 근데 그건 집에 있소."
포도부장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좋소. 단, 지금 당장 그 간찰을 가져오시오."
"네? 정말이오. 가도 되오?"
포도부장은 물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뒤의 무관에게 이어 말했다.
"관아의 아전 중 선창이라는 자를 불러와라.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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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일이. 잘은 모르겠지만 그간 어려운 일이 굉장히 많았을 텐데.."
"삶이 다 그렇지요. 어디 이 조선 땅에 사연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도 그런 게 선준의 기구한 운명과 행장이의 끔찍했던 그 밤만 해도 그랬고 자령의 딱한 사정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게다가 모두 다 부모를 잃거나 실종된 사연이었다. 그런 한과 분노는 그들을 어느 한 지점에서 똘똘 뭉치게 만드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 한이 서린 자들이군요. 은진 씨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곧 자시(23시~1시)입니다. 이제 준비를 하시지요. 저는 전에 보셨던 안방에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행장이를 깨우고 곧 들어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할멈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그곳에서는 약한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서 동요해도 안됩니다. 영계는 모든 상상과 소원이 눈앞에 나타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산 채로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선준의 은진의 당부에 답하자 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작 주막은 어떤 면에서는 안전지대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히 거기서 못 나올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할멈이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산 자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니 꼭 명심하십시오."
은진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곧 촛불이 켜졌고 때는 자시에 이르렀다.
"자야, 가자꾸나. 이제 짐을 다 챙기거라."
"하아암, 네, 아까 다 챙겨뒀지요. 근데 또 배가 고프네."
선준은 건넌방의 자령에게도 준비를 알렸다.
셋은 곧 은진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백여 개에 가까운 부적과 수십 개의 촛불로 가득했다. 선준과 행장이, 자령 모두 그렇게 많은 부적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장이는 수많은
부적이 어찌나 신기한지 동그랗게 뜬 두 눈을 감지 못했다.
"자, 이제 준비되셨나요?"
"네."
선준과 행장이 그리고 자령은 고개를 끄덕였고 은진은 귀문을 열기 위한 의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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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궤는 어디에 쓰려고요?"
"다 생각이 있지. 그런데 넌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말이 그뿐이냐?"
그러자 정법이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할멈을 바라보았다.
"이제 갈 날도 얼마 안 남은 사람들끼리 이승의 안부가 뭐 중요하오. 그저 그날까지 궂은 일 없이 우리의 책임만 다하고 가면 이제 극락의 휴식을 누릴 텐데, 안 그러오?"
"시끄럽다. 그나저나 영 심상치 않아."
반가움도 잠시, 할멈의 얼굴에는 무언가 전에 없던 수심이 보였다.
"뭔데 그러오?"
"정법, 자네 혹시 최근에 수상한 낌새라거나 그런 거 못 느꼈나?"
"수상하다면..? 절에 오래 있다 보니 너무 평화로워서 수상한 것 말인가요?"
"에이, 그런 거 말고. 쫌 이상해. 최근 내가 사는 봉우리에 강철이가 지나가질 않나. 이무량이 나타날 것 같다는 예지몽 얘기를 듣질 않나.."
그러자 정법이 큰소리고 껄껄하고 웃었다.
"아니 누이가 그걸 제일 잘 알지 누가 알겠소? 조선 제일의 무당이 모를 일이라면, 그건 나라에 큰일이 벌어진다는 뜻 아니오?"
강철이와 이무량의 언급에 정법도 흠칫하고 놀라는 듯했지만 어쩐지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보였다.
"이무량은 없을 겁니다. 영이 사라졌어요."
"정법, 엄밀히 말하자면.."
"이승에서 말이죠. 이제 조선 땅에 이무량은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이무량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을 뿐인데 정법의
낯빛이 영 달라졌다.
"대신 또 문제가 생겼지. 호랑이가 없는 산은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않는가."
그러자 정법은 껄껄하며 한 번 더 호탕하게 웃었다.
"왜 누가 또 나타났습니까?"
"영 감이 안 좋아. 내가 점은 안 본 지 꽤 되었잖아. 신빨도 안 좋고 이제 갈 때가 된 거라. 암튼, 지난 여름에 대벽 마을의 환난도 그렇고.. 또, 최근에는 예지몽을 꾸는 영특한 아이가 꿈에서 거인귀를 본 것 같아. 대인족일 수 도 있고."
"호랑이가 없으니 토끼도 여우도 자기가 모두 산의 주인이라 우기는 상황이군요."
"악령이 된 한 대감도 골치야. 무서운 속도로 세를 늘리며 전국을 다니며 난을 일으키고 있어. 여기저기 떠돌던 악귀와 마귀들을 다 불러들이는 모양이야. 이번에 우리 집에 왕도깨비가 지키는 애랑 같이 온 한 선비가 있는데 그 선비랑 관계가 있더군."
"왕도깨비요? 히야, 왕도깨비를 보았다고요?"
"응. 그리고 그 선비가 일령을 가지고
있어."
눈꽃이 필 무렵은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 리그와 문피아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 리그: https://novel.naver.com/my/myNovelList?novelId=1020387
• 문피아: https://novel.munpia.com/245153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snow-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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