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영계라는 걸 잊었네. 괜히 귀신들의 세상이겠나.’
"선비님, 제가 왼편을 맡을게요!"
상황을 파악한 자령이 곧 자리를 잡고 앉아 활시위를 당겼다.
'지이잉-'
선준의 일령 역시 다섯 자가 넘는 진노란 기검이 솟구쳤다.
"행장아 넌 자령 뒤에 숨어 있거라."
'슉. 슈슉.'
'끄아아. 끼아아아아.'
자령이 먼저 부적을 녹인 단촉 화살을 여러 발 날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역귀나 마귀는 부적에 약해 비명과 함께 금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소멸이 아닌 이상 언제 다시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영계의 영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부적에 가두거나 아예 저승으로 보내야 했다.
대규모 악귀들과의 대전은 속전속결이 중요했다. 선준은 녀석들이 몰려오기 전에 하나씩 처리하기로 했다.
'휙. 휘휙. 휙-'
'끄아아아악-'
가벼운 몸놀림으로 벌써 마귀를 셋도 넘게 처리한 선준은 역귀 둘이 동시에 나오는 다음 골목으로 달려가 공중으로 붕하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어? 뭐지.'
선준이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갑자기 두 역귀 사이로 억세고 거친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몹시 이질적인 모습에 누가 봐도 두 역귀의 팔은 아니었다.
'에잇'
선준 역시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악귀들과의 대전은 꽤 경험이 많았기에 변칙적인 공격에도 익숙했다.
'휙-'
일령으로 튀어나온 팔을 벤 선준은 땅으로 착지한 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찜찜한데..?'
분명히 녀석의 팔을 베었다고 생각한 선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녀석의 팔이 닿은 일령의 오히려 불기둥이 활기를 잃고 색이 바랜 것이다.
"선비님!"
"아재, 아재! 앞이요. 앞을 보시오!!"
'뭐야..?'
선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마자 크고 둔탁한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와 선준의 가슴팍을 세게 찼다.
"크아악."
선준은 가슴팍의 묵직한 통증으로 고통에 찬 신음 함께 열자도 넘게 뒤로 구르며 날아갔다.
"아재!!"
깜짝 놀란 행장이가 선준을 향해 달려갔고 자령이 활을 꼭 쥔 채 후방과 전방을 주시하며 뒤 따랐다. 여전히 다른 골목들에서 역귀와 마귀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재, 아재 괜찮응교? 으앙.."
"자야, 난 괜찮다. 뒤로 물러나 피해있거라. 저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당장 처단해야 한다."
하지만 선준을 강타한 그것은 여전히 두 역귀 뒤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령의 기운을 일부 흡수했다. 필시 보통 녀석은 아니야.’
곧 자령도 선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비님, 괜찮으세요?”
“괜찮소. 위험하오. 행장이랑 뒤로 물러나 날 엄호해 줘요.”
선준은 자령과 행장이를 뒤에 두고 튀어나가듯 역귀에게로 달려갔다. 일령의 기검은 다시 강렬한 진노란 빛이 되었고 선준은 역귀 둘을 일시에 베어버릴 기세로 다시 한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야앗!”
‘휘이익-‘
“끄아아아아악”
선준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한 두 역귀는 둘 다 몸이 두 동강이 나더니 기화하듯 사라졌다.
‘된.. 건가?’
‘쑤우욱-‘
“으아, 으허허어업.’
선준이 마음을 놓는 순간 누군가 크고 억센 자가 몸을 들어 올리기라도 한 듯 선준이 허공으로 붕하고 떠올랐다.
“아재! 아재!!”
이에 놀란 행장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려 하자 자령이 붙들어 말렸다.
“행장아, 위험해.”
“아재는, 아재가 더 위험하당께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의해 들어 올려진 선준은 일령으로 그것이 있을 만한 곳을 휘둘러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뭐지.. 도대체 뭐길래.. 크흑.’
선준은 보이지 않는 귀신을 처단하기 위해 당황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에 다시 일령을 꼭 쥐고 기를 모았다.
“일령, ㄱ..”
‘휙-‘
‘쿠당탕.’
“크아악..”
선준이 광 공격을 하려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선준을 내동댕이치듯 던져버렸다.
“아재, 아재!”
선준이 내동댕이 쳐지자 행장이가 곧장 달려가 선준의 상태를 살폈다.
“아재, 괜찮응교?”
선준은 고통에 신음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곤 두 눈을 슬며시 떠 앞을 바라보았다.
칠 척에 가까운 키, 황소 다리보다 두꺼운 팔뚝, 갑사의 둘은 합쳐 놓은 듯한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해괴하게 웃는 듯한 표정의 얼굴.
‘맙소사..’
선준의 눈앞에 선 자는 두 해 전 악귀를 소탕하던 중 선준이 유일하게 처단하지 못한 경상도의 한 마을에서 마주했던 두억시니(지역 도깨비들의 우두머리)였다.
“아재, 아재, 뭐요. 뭐가 보인당가요?”
전방을 바라보는 선준의 얼굴에 공포가 일자 자령 역시 선준이 보는 것을 찾기 위해 전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령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야, 자령 씨, 얘들아, 달아나, 달아나거라..!”
“낄낄낄낄낄.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서운할 뻔했잖아.”
선준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행장이와 자령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저기 골목으로 골목 안 집으로 숨어..”
“왜, 아직도 내가 두렵냐. 이 선비 놈, 그동안 어디에 숨었나 했더니 제 발로 여길 찾아왔네.”
녀석이 천천히 선준에게 다가오자 선준은 행장이를 등 뒤로 숨기고 일령을 다시 쥐었다. 일령의 기검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두렵긴.. 난 나의 할 일이 있다. 그래서 그땐 자리를 피했을 뿐.”
“그러냐? 그럼 다시 한번 해볼까?”
‘슈욱-‘
“쿠웅-“
두억시니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아직 두억시니를 못 본 행장이와 자령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네이놈, 저 아이들을 다치게 하면 내 오늘 널 가만두지 않겠다.”
“껄껄껄. 그래 진작 그런 표정을 지었어야지.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두억시니는 오랜만에 같이 놀 상대라도 만난 듯 광기에 번뜩이는 눈 아래로 장난기가 잔뜩 어린 입을 가로로 크게 벌려 씨익하고 웃으며 선준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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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포야!”
“형님..”
“물포야, 너 괜찮냐?”
대벽산의 거처로 들어온 물포는 마치 귀신에게 홀렸다가 살아난 것처럼 핼쑥한 얼굴로 들어왔다. 근중과 장태 역시 어쩔 수 없이 물포를 관아로 보냈지만 내심 마음이 불안했고, 밤이 깊어지기 전에 찾아가서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닌가 고심하던 차였다.
“네, 생각보다는 오래 안 걸렸습니다. 옥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포도부장이라는 자를 만나고 왔는데요. 정말 그 대마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니 풀어주더라고요.”
물포가 말하는 동안 근중은 물포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너, 정말 아니지?”
장태는 물포를 믿으면서도 일말의 의구심까지 확실히 제거해야 속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아, 장태 형님, 저 아니라니까요. 관아에서도 저 아니라는데. 하..”
“됐다. 이제 그만해라. 물포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우리도 알지 않냐. 산적질하기도 바쁜데.”
“아, 그러게 왜 산중턱에 올라가 가지고 붙잡히고 그러냐. 딱 봐도 함정 아니냐, 함정.”
“간찰이 있었다니까요, 간찰. 아니, 그러면 형님은 거기에 왜 왔수? 보시오. 우리 다 같이 함정에 걸린 건데 뭘..”
장태와 물포가 서로 지지 않고 말꼬리를 잡자 근중이 정리하며 말했다.
“일단, 이 함정에서는 빠져나왔으니 다행이다. 그러니 둘 다 이제 그만해. 지금 문제는 이게 아냐.”
근엄한 근중의 한마디에 둘은 씩씩거리다가 다시 근중을 바라보았다.
“근데 지난 미월에 그 참변을 보고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아니 이 동네는 무슨 마가 끼었나, 저주가 내렸나. 난이 끝없이 생겨 참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며칠 전부터 갑사들의 동태도 그렇고 포도부장까지 와 있다는 건 여기에 뭔가 큰 게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데..”
“하아.. 그러게요. 당최.. 그게 뭘까요, 형님?”
근중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알게 된 대마밭이었지만 이 때문에 대벽마을에 크고 작은 괴사건들과 참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지난 미월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더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