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대악(大岳) - 불타는 밤 1

by Rooney Kim


선창은 자시(子時, 오후 11시 오전 1시)가 가까이 되도록 포도부장에게 붙들려있었다. 하지만 선창 역시 더 이상은 아는 바가 없었다. 기껏 선창이 알려준 것이라고 해봐야 우참찬인 김진립 대감의 지시기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한낱 아전 정도가 그런 상위의 일을 알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이 바닥이 항상 뒷말이 차고 넘치는 곳이라 여기저기 주워듣다 보면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고급 정보도 알게 되기도 했다.


호기심과 의구심에 한양에서부터 직접 나선 정만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예상보다 더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위에 누가 있느냐?”


“사.. 사또 말이십니까..?”


“참나, 도승지 영감은 이걸 모르지 않느냐? 지난여름에도 또 작년에도 아전들이 일을 꾸몄다는 걸 들었다.”


정만이 지난 얘기를 꺼내자 선창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손까지 떨기 시작했다.


‘요것 봐라.’


“저.. 저는 모르는 일이 옵니다. 작.. 작년에는 도승지 영감이 아닌 다른 영감님이 계셨었고 그.. 그땐 저 역시 말단이라..”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이야. 아전으로써 서리 직무를 다하고.. 또..”


“어떻게 일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종 9품이 종 8품으로 승진할 수 있느냐? 내 조선 천지에 그렇게 빠른 승진은 처음 들었다. 혹시, 이 고을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더냐?”


정만의 정확한 지적에 할 말을 잃었다. 이젠 등에 식은땀이 흘러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니, 어째서 그럴 수가 있지? 혹시, 누군가가 녹사(錄事, 주로 중앙관청에서 근무하나 지방에서 근무할 경우 후에 종 6품의 관직을 받고 수령에 특채될 수 있는 특혜도 있었다.)를 시켜준다더냐?”


정만의 떠보는 말에 선창은 급기야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겁을 하며 이를 부인했다.


“다.. 당치도 않는 말씀이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었사옵니다. 소인은 그저 상급에서 시키는 일만 하였사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정만은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선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기껏해야 서리(書吏)를 보는 자가 이렇게 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분명히 한참 윗선에서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알겠다. 그만 가보거라.”


“네, 네..?”


“일어나라. 나가자!"


선창이 한 번에 퍼뜩 못 알아듣자 문 입구에 서 있던 무관이 또 소리쳤다.


“아이, 깜짝이야. 너 자꾸 뒤에서 소리 지를래? 이것이 내가 아주 오냐오냐 하니까.”


“소, 송구합니다.”


“둘 다 나가보거라.”


곧 무관이 선창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정만은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을 꾸밀 수 있는 자는 여기에 없었다. 게다가 대마 밭의 크기도 말이 안 되었다. 개인이 제아무리 크게 해 봐야 밭 한 두 마지기(밭 한 마지기는 약 100평)도 쉽지 않을 텐데 대벽산 북쪽 중턱의 대마밭은 어림잡아도 열 마지기가 넘는 밭이었기 때문이다.


“불이야! 불이야!!”


“사.. 사람이 죽었다! 귀.. 귀신이 판을 친다!!”


선창을 내보내고 관아의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별안간 고을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만 역시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바깥으로 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냐? 거기 나졸들, 어서 관아 밖으로 나가서 확인하거라.”


“네, 넷!!”


사람들의 괴성은 점점 더 크게, 더 많이 이곳저곳에서 전염병처럼 도지고 있었다. 게다가 누군가 불이라도 지르는지 멀리서부터 초가지붕이 불타오르는 더니 어느새 마을의 중심가가 활활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 살려! 귀신이.. 귀신이 나타났다!”


“이무량.. 이무량이야.. 으아아아아아아-‘


정체 모를 무언가에 피해 달아나던 사람들은 급기야 열려있는 관아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 관아 마당에서 동태를 살피던 포도부장과 아전들에게 달려와 호소했다.


“도.. 도와주시오. 이무량이.. 이무량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나리, 나리들, 저희도 목숨을 살려주시오. 얼른 나졸들을 불러 제압해 주시오..”


‘이무량..? 이무량이라면 옛날에 악명 높았던 그 악귀 두목을 말하는 건가? 대악(大岳) 이무량..?’


“아니, 네놈들. 어디 안전이라고, 이 분은 포도부장님이시다.”


‘또 난이야.. 전에 대감님도 말했었지. 아편이 불법으로 유통되면서 난이 끊이지 않았다고, 이건 필시..”


정만은 아전들을 만류하고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냐.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너희들은 가서 갑사들을 준비시켜라. 착호갑사도 함께 간다.”


“넵!!”


“갑사들이 오면 바로 현장으로 투입시켜라. 목표는 백성들을 구하고 화마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대로 전해라. 알겠느냐?”


“네, 넵!!! 포도부장님.”


정만은 무장을 한 채 관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길거리는 자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 들린 사람들과 불난 집으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정만은 그 사람들을 뚫고 마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는 시장에서부터 불이 났다고?’


한참을 달려가던 정만이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의 상황을 살필 겸 빈 집의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동태를 살폈다. 불은 삽시간에 이 집 저 집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기어이 마을의 중앙을 지나 대벽 고을 어귀의 서낭당에 까지 옮아 붙기 직전이었다.


‘설마 신목(神木)까지 건드리려고..? 정말 이무량이 나타나기라도 한건가.. 전설로만 들었는데. 혹시, 지난여름, 미월의 환난도 이 놈 때문에? 어쩌면 대마밭도..?’


정만은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눈앞에서 난을 직면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당장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어디로 먼저 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귀신 들린 자들과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역귀들이 사방팔방 날뛰며 도망가는 사람들을 해치고 불을 지르는 통에 정만 자신조차 위험할 수 있었다.


‘쾅. 쿠당탕-‘


정만이 생각이 잠겨있는 동안 빈집의 대문이 완전히 박살 나더니 사람 형태의 역귀와 마귀 그리고 여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 작은 집에서 저렇게 많은 것들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이하고 기괴한 광경이었다.


‘이힉-‘


무예에 뛰어난 정만이었지만 악귀들을 상대하여 싸운 적은 없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크아아. 끼아아아아-“


정만이 망설이는 동안 마귀 하나가 정만에게 달려들었다.


‘휙-‘


하지만 이것이 귀신 들린 사람인지 마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정만은 우선 허리를 숙여 피했다. 하지만 이미 녀석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에잇. 모르겠다.’


‘푸욱.’


정만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귀의 배를 푹하고 찔렀다.


“크아아..”


‘아직도 힘이 있어?’


사람이 아닌 것을 처음 상대해 본 정만은 얼른 칼을 빼내어 이번에는 그대로 목을 쳤다.


‘휙- 투둑.’


‘쿵.’


정만의 정확한 칼솜씨에 마귀 하나가 쓰러지자 뒤에 뭉쳐있던 마귀와 역귀들이 순식간에 정만에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아아악-“


‘휙. 휘휙. 푸욱. 휙휙.’


정만은 귀신들과 싸우는 게 처음이었지만 곧 감을 잡았는지 번개와 같은 현란한 솜씨로 한꺼번에 달려드는 녀석들 네다섯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 이것들.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하지만, 역귀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아까 수백의 귀신들이 쏟아져 들어온 뚫린 대문으로 귀신 들린 자와 역귀, 마귀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휙. 휘휙.’


“끼아아아아-“


‘헉헉. 안 되겠어. 이대로 계속 상대할 순 없어.’


정만은 이후 열도 넘게 녀석들을 베어 처리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정만은 건넌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방안에 있던 책장과 물건들로 입구를 막았다. 하지만 이를 본 역귀 둘이 달려와 문고리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푸욱-‘


‘푹-‘


역귀와 마귀들은 문이 열리지 않자 문을 뜯어버리기라고 할 작정으로 손으로 문창살을 부셔 방안으로 팔을 뻗어 밀어 넣었다. 정만은 팔이 안으로 들어오는 족족 베어버렸지만 한 팔을 베어내면 두 팔이 뻗어 들어오고 이를 둘 다 베면 네 다섯 팔이 들어오는 통에 쉴세 없이 방어해야 했다.


‘이 미친 귀신 놈들, 정말이잖아. 이 마을은 악귀들의 저주를 받은 게야. 어쩌면 정말 이무량이 나타난 지도 모르겠어.’




눈꽃이 필 무렵은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 리그와 문피아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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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snow-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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