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마당에는 포도부장이 바닥에 넘어져 쓰러져있었다. 그의 칼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듯 검은 자국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포도부장님,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정만은 기력이 다 빠졌는지 천검이 부축해 주자 겨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아.. 아무도 못 봤느냐.. 헉헉.”
“악귀들 말입니까? 귀신들이라면 지금 우리가 제압하는 중입니다. 여기 축사패까지 왔으니 이젠 시간문제입니다.”
정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수십의 악령들이 우글거리며 자신을 잡아가려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리 조용해졌지만 꼭 쥔 칼만은 놓지 않았다.
“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야. 헉헉. 그 자.. 그 자가 왔어.”
“그 자라니요..?”
포도부장의 말에 천검과 소백 그리고 일행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무량.. 그 자가 자신을 이무량이라고 불렀어. 이 환난의 중심에.. 이무량이 있다. 정말 돌아온 거야.”
“네에?!”
“히익.. 지, 진짜요?”
포도부장의 말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포도부장의 얼굴에도 공포가 어린것을 보니 천검은 새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입니까? 그 자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 그렇다니까. 그자가 나타나니까 갑자기 모든 귀신들이 사라졌어. 사방이 너무 조용해져서 문을 열었더니 솥뚜껑보다 갑절은 큰 손이 나를 잡으려는 듯 문 안으로 들어오려 하더라.. 그래서 있는 힘껏 달려들어 손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이후에 너희들이 여기로 들어온 게야.”
“네..?”
‘뭐야.. 그럼 이무량이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건가..?’
포도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봐라, 저기 멀리에는 아직도 집들이 불타고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아. 그런데 유독 여기만 조용한 게 이상하지 않느냐?”
포도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신은 준비한 부적을 모조리 꺼내 들었다. 이미 입으로는 항마진언부터 축귀경, 팔문진경(八門陳經)까지 욀 기세였다. 차선과 소백 그리고 천검과 진둘까지 긴장하며 각자 무기를 들고 사방을 살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한데. 혹시 이미 다른 곳으로 간 게 아닐까요? 만약 있었다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소백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만약 그 거인귀가 이무량이었다면 지금 자신의 난장판을 바로 잡으려는 축사패와 갑사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무량은 이미 도망간 것 같으니 그럼 우리도 이만 여기서 각자 갈 길을 가죠. 우리는 아직 수백의 악귀들을 더 잡아넣어야 하니.”
“어..”
소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신이 하늘을 하라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형, 지금 저 하늘에 저 불빛, 금정이가 말한 거랑 비슷하지 않나요?”
“뭐? 금정이가 꿈에서 봤다는 거 말이지. 그.. 어라, 그 눈동자 말이냐?”
“엇, 그러고 보니 눈동자, 눈동자같이 생겼어요!”
“아니, 으아앗!! 깜, 깜빡이잖아?”
순간,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깜짝 놀란 소백과 전신은 얼른 자신들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이에 덩달아 놀란 천검과 차선도 허공에 뜬 불빛을 확인하곤 얼른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 이.. 이무량이다!”
허공에 뜬 불빛은 다름 아닌 거인귀의 눈동자였다. 금정이 며칠 전 꿈에서 본 그 눈동자 말이다. 그때만 해도 그들은 이것이 이무량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들 머뭇거리고 있었다. 공포에 손과 발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던데다 상대는 이무량이었다. 전설로만 들어오던, 아니, 어른들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못하게했던 바로 그 이무량 말이다.
하지만 신무패는 이를 기회로 생각했다. 전설의 이무량을 잡을 수 만 있다면 그 부적은 수백 냥의 가치 혹은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쏴! 잡으러 가자!"
소백의 고함이 끝나자마자 차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십 장의 부적을 녹인 장촉 화살을 연발로 쏘아 올렸고 전신은 축귀경으로 부적을 허공에 띄어 가지고 있던 부적의 절반을 이무량이 있는 곳으로 날려 보냈다.
녀석의 크기는 십 척이 아닌 이십 척도 넘어 보였다. 신무패가 그동안 만난 그 어떤 악귀나 요괴보다 컸고 덩치와 분위기가 전달하는 압도감은 영력과 공력이 뛰어난 자들 수십이 있어도 의지가 안될 정도로 대단했다.
‘휙휙. 슈수슉’
‘슈와아아아아-‘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녀석은 차선이 쏜 화살은 모두 한 손으로 받아내버렸고 전신의 부적은 허공에서 모조리 불살라버린 것이다.
“다 끝났냐.”
이무량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동시에 소백이 달려가서 담벼락을 딛고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봉을 휘둘렀다.
“이야아, 이무량이든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신무패..”
“크헉.”
‘쿵.’
“으아악..”
호기롭게 날아 달려든 소백은 이무량의 왼손에 마치 하찮은 벌레처럼 나가떨어져버렸다.
“형, 형, 괜찮아? 정신 차려봐.”
상황을 파악한 천검은 도저히 자신들은 이무량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포도부장과 진둘을 데리고 부엌 쪽으로 살며시 숨어 들어갔다.
소백은 땅바닥에 떨어진 후 기절이라도 한 듯 정신을 못 차렸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다. 차선과 전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감을 느꼈다. 자신들의 주 무기 공격이 통하지 않음은 물론, 가장 의지하던 신무패의 대장이 한방에 나가떨어질 정도라 수준의 차이를 절감했던 것이다.
“끝났냐? 별 것 없네.”
이무량은 말을 끝내자마자 씩 하고 웃어 보였다. 양쪽으로 찢어져 길이가 일척도 넘어 보일 정도로 큰 입을 쩌억하고 벌리자 그 안으로 검붉은 속이 보이며 보는 이로하여금 오금이 저릴 정도의 공포감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자, 그럼.”
‘후욱-‘
‘쿠와아아아, 쿵!!!’
이무량이 솥뚜껑보다 더 큰 주먹을 땅바닥에 내리꽂자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땅에 있던 소백, 전신 그리고 차선의 몸이 공중에 붕하고 떠올랐다가 내동댕이쳐졌고 인근에 있던 집들의 담벼락이 모두 우수수하고 무너져 내렸다.
“으악.”
“아아악.”
‘이무량이다. 정말 이무량이야. 내 생에 이렇게 강한 악귀는 본 적이 없어. 어쩌지 소백 형님도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전신은 몸이 땅 위에서 튀기듯이 날아다니면서 방도를 생각해보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이무량은 마치 이들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듯 땅바닥을 연신 내리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땅 위에 사람들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길 반복했다.
“잠깐, 포도부장이 어디로 갔지?”
이무량은 마치 이들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하듯 포도부장을 언급하며 찾기 시작했다.
“분명 다 같이 있었는데. 으히히히히. 여기에 있지?”
‘콰과과과광. 쩌억.’
이무량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오른손으로 포도부장과 천검 일행이 숨어든 집 부엌의 천장을 날려버렸다. 이무량의 손짓에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사라진 천장에 겁에 질린 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게 왜 이 고을까지 찾아들어와서 들쑤셔 놓는 거야. 응? 이히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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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젠장,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겸세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쿵하는 소리에 영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가뜩이나 귀가 밝은 데다 밤잠이 없어서 힘들었던 터에 겨우 잠이 들라할 쯤 대벽산을 넘어온 지축을 흔드는 소리에 완전히 잠이 깨고 만 것이다.
“아씨, 잠은 다 잤네. 도대체 어떤 놈이 또 이렇게 장난을 치냐. 으유.”
겸세는 어디서 구했는지 누렇게 얼룩이 진 도포를 둘러 입고 길을 나섰다. 멀리서 쿵쿵대는 소음도 거슬렸지만 어디서 누가 자기 얘기라도 하는지 영 귀가 간지러워서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으하아아암, 피곤은 하고 잠은 안 오고 내 이것들을 그냥.”
산 아래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순식간에 성주산을 내려온 겸세는 또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대벽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어디 보자, 어디야. 어, 대벽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네. 뭐야, 불도 나고 난리 났잖아?”
겸세는 대벽마을을 둘러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저 마을에는 정말 마가 끼이기라도 했나..”
순간 또 겸세의 귀가 간지러웠다. 필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기 얘길 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야.”
겸세는 불타고 있는 대벽 마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피신하고 군사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어디서 저런 잡귀들이 또 우르르 들어왔냐. 귀문이라도 열린 건가. 아, 정말 신경 쓰기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