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작(羅勺) 주막 3

by Rooney Kim


선준과 자령은 한참을 달려갔다. 하지만 사방은 고요했고 그 어떤 것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 선비님, 저기, 저기에 불이 켜진 집이 있고 그 앞에 웬 여인이 서 있는데요?"


자령이 말한 곳에는 정말 불이 켜진 집과 그 앞에 여인이 보였다. 그 집 옆으로 불이 켜진 등에는 주(酒)라는 주막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나작 주막 (羅勺 酒幕)’


선준은 행장이를 들쳐 엎고 등불이 빛나는 집으로 달려갔다. 허름한 초가지붕에 다 낡아빠진 벽면 그리고 반쯤은 사라진 싸리 담장까지. 선준은 멈칫했지만 지금 영계에서 그나마 악령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만난 건 처음이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혹시 여기에 의원이 있소? 지금 아이가 아프고 역귀에 긁혀 역병에 걸린 것 같소만.."


그러자 여인은 선준과 선준의 등에 업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행장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여자 아이도 같이 온 자요?"


집 앞의 여인은 자령은 쳐다보지도 않고 선준을 쳐다보며 다짜고짜 물었다. 가만히 보니 여인은 이승에서는 명절에나 한 번 꺼내 입을 진한 붉은색 치마에 깨끗하게 다려진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이런 말끔한 차림의 여인을 영계에서 마주치다니 이질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동공은 묘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준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만..?"


"아주 재미있는 조합이군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여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검은 물결이 다시 뭉쳐 일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규모가 더 커졌다. 일령의 방어에 튕겨나가며 잔뜩 약이 오른 두억시니까지 다시 각성하고 덤벼들 테니 도깨비들도 여럿 더 올 분위기였다.


"보시오. 우리가 시간이 없소. 이 아이도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오. 만약 여기에 의원이 없다면 다른.."


"꽤나 골치 아픈 녀석들이 쫓아다니는군요. 호호. 제가 의원입니다. 자, 이쪽으로 따라 들어오시지요."


두루마기의 여인은 그제야 몸을 돌려 안으로 안내했다. 선준은 기뻤지만 한편으론 다 낡아빠진 초가집이 여귀, 역귀 떼와 두억시니로부터 안전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여인을 따라간 선준과 자령은 작은 마당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둘은 의아했지만 여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부엌의 뒷문을 열고 나가더니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환영합니다. 이곳이 여기서 제일 안전하고 풍족한 곳이지요."


'뭐야, 그냥 부엌 뒷문일 뿐인데..'


인사를 마친 여인은 부엌 뒷문을 지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준과 자령은 잠시 고민했지만 행장이의 몸상태를 고려하면 저 여인이 어디로 데려가든 일단 따라가봐야 했다.


'어차피 뒤는 두억시니와 악귀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으니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


"자령씨, 준비됐나요?"


"네, 어차피 저희 아버지도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두려울 게 없죠."


선준과 자령은 곧장 여인이 빠져나간 부엌 뒷문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곧 문 밖을 빠져나가자마자 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오오.."


"와아..."


"여, 여기는 도대체.."


선준과 자령은 그곳에서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별천지를 보았다. 저 멀리 3층까지 높은 누각과 전방으로 끝없이 펼쳐져있는 기와집에는 수백 개 아니, 수천 개의 창문이 보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분명 밖에서 봤을 때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는데.."


"선비님, 여기가 괜히 영계가 아닌가 봅니다."


선준과 자령이 입구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관과 크기의 건물들에 놀라며 서성이고 있자 두루마기의 여인이 다가와 재촉했다.


"아이가 아프다면서요? 어서 절 따라오세요."


"아.. 네네."


선준 일행은 다시 여인을 따라갔다. 기와집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큰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비님.. 아까 입구에서 본 건 아무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선준 역시 끊임없이 놀라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섬과 동시에 정면에 보이는 7층 누각을 중심으로 어디론가 끝없이 연결되어 있는 연못이 찰랑거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수소 허벅지만 한 붕어부터 솥뚜껑보다 더 큰 자라까지 온갖 수중 생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게다가 필시 무슨 큰 연회라도 벌어지고 있는지 먼발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공연을 구경 중이었고 7층 누각부터 이어져 곳곳을 밝히는 연등은 족히 수천 개는 넘어 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아무리 영계라고 해도 말이에요."


자령이 뒤에서 속삭였고 선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앞서 걸어가던 두루마기의 여인 앞으로 어디선가 나타난 소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다가왔다.


두루마기의 여인이 뭐라고 말을 하자 그중 소녀 셋이 선준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픈 아이를 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죠. 급합니다. 역귀에게 긁혔어요.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선준은 얼른 행장이를 내려 상태를 살피게 했다. 가까이서 본 소녀들은 멀찌기서 볼 때는 인간의 형태였지만 노란 눈에 뾰족한 귀 그리고 짐승의 이를 가진 걸로 보아 수인이 아닌가 생각했다.


행장이는 상태가 좀 더 심각해졌다. 온몸이 펄펄 끓듯 열이 올랐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다. 게다가 목 주변으로 붉은 반점이 여럿 올라오는 걸로 보아 역귀에게 병이 옮은 게 틀림없었다.


"역병이네."


"맞아. 내가 이 아이를 의원께 데려갈 테니 이 분들을 객실로 모셔."


곧 작은 수인 소녀 하나가 행장이를 가볍게 둘러업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수인 소녀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은 저랑 같이 객실로 가시지요. 가면 참새들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선준과 자령은 소녀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본인들 역시 유병의 우려가 있으니 당연한 처사라 생각했다.


"저기, 저 아이는 언제 다시 볼 수 있소?"


"의원님이 결정하실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나작 주막의 평감 의원님은 인간들도 모두 치료하실 수 있답니다."


선준과 자령은 곧 각자 방으로 안내받았다. 과연 아까 소녀의 말대로 참새 얼굴을 한 또 다른 수인들이 객실을 알려주었다.


자령은 이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선준은 이미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자령은 곧바로 방에서 나와 선준을 찾아갔다.


"나작 주막이라.. 어디서 들었는데.. 나작 주막.."


"그러게요.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어?!”


“아맞다.. 생각났다..!”


"이런.. 선비님, 우리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대무당 할멈이 했던 말.. 기억나시죠?”


‘나작 주막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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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치이이이익-'


"형님, 여기는 다 껐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장태는 애들 데리고 오른편으로 물포는 왼편으로 가거라."


"네, 형님!"


근중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불에 탄 마을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내치려고 몰려든 갑사들도 그렇고,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 난도 필시 그 무언가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마을에 가득한 지독한 냄새. 수상하고 미심쩍은 움직임. 단순히 악귀나 잡귀라고 하기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런데 하필 그게..'


마을을 둘러보던 근중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가만, 이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는 미월의 환난 때도 맡았었는데. 이게 무슨 냄새였더라..?'


근중이 그 냄새의 근원을 기억해내기 위해 한참을 노력하던 중이었다.


"형님! 혀, 형님!!"


멀리서 물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왜 그러냐?"


"사람들이 쓰러져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일면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지고 다치고 심지어 죽는 일은 허다했기에 근중은 갑자기 이런 호들갑을 떠는 물포를 면박이라도 줄듯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들 구토하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다들 갈색 가루가 묻어있고요. 그 가루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더라고요."


'모두 구토를? 갈색 가루..?'


근중은 자리에서 벌떡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지독하고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 뭐냐, 제가 관아에 잡혀갔을 때 맡았던 아편 가루랑.."


"맞아..! 아편이야, 아편..!!




눈꽃이 필 무렵은 네이버 웹소설 베스트리그와 문피아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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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snow-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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