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나작(羅勺) 주막 2

by Rooney Kim


'부스럭. 부스럭'


"선비님? 선비님이세요?"


자령과 행장이는 빈 방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선준을 기다리던 차였다.


'부스럭. 부스럭.'


"낄낄낄낄낄"


소름 끼치게 기분 나쁜 소리가 문창살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문 바깥으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보니 한둘이 아니었다.


"누이 누이, 선비님 아니죠?"


"응. 가만히 있어봐. 내가 나가서 확인하고 올게."


"안 돼요. 누이, 위험하당께요..!"


자령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활, 검술 등을 익혀 무예에는 자신 있었다. 하지만 자령이 간과한 게 있다면 악귀들은 생각보다 더 교활하다는 점이었다.


'쾅-'


"누구야? 모습을 드러내라!"


바깥에서 서성대던 그림자들은 자령이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라졌다. 자령은 행장이가 홀로 남겨진 방문을 닫고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움직였다.


녀석들이 근거리에 있었기에 단검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며 초가집 바깥을 한 바퀴 돌아보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잖아.. 역귀 들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처음으로 선준, 자령과 떨어져 혼자 남은 행장이는 문창살의 뚫린 구멍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던 역귀들도 안 보였고 이들을 찾으러 간 자령도 보이지 않았다.


'선비님, 누이.. 빨리 오시오. 아 무서워 죽겠응께..'


'스으윽'


한참을 뚫린 구멍으로 바깥을 응시하던 행장이 뒤쪽의 벽이 먹물보다 까만색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통 바깥에 정신이 팔린 행장이가 이를 알아챌 리가 없었다.


'아, 누이는 어디까지 갔으까. 그냥 빨리 오지..'


'스르륵. 스르륵. 스르르르륵'


별안간 까맣게 물든 벽을 통해 기다랗고 새카만 팔들이 뻗어왔다. 팔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넷이 되더니 급기어 수십 개의 팔이 되어 그 손끝이 행장이의 등에 닿기 직전이었다.


"행장아!!! 행장아!!! 나와! 방에서 빨리 나와! 밖으로, 어서!!!"


'응.. 이건 누이의 목소리..?'


행장이는 방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으.. 으으.. 으아아아아아악!!!"


뒤를 돌아본 순간 행장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문에 바짝 붙고 말았다. 너무 놀라 공포가 극에 달해 목소리 마저 잠겨 버렸다.


"그.. 으으, 누.. 누이.. 으으으"


행장이 뒤로 새카맣게 타고 그을린 수십 개의 손과 팔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며 당장이라도 행장이를 끌고 갈듯이 뻗어있었던 것이다.


온통 검게 타고 말라비틀어진 팔들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지만 힘이 넘치는 손끝과 눈을 현혹시키듯 끊임없이 일렁이는 기괴한 모습은 사람을 홀리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잡아가기 위해 방바닥, 천장을 더듬대는 모습에 행장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듯 몽롱해졌다.


‘정신 차려. 다 똑같아. 다 똑같은 놈들이야.. 우리 가족을 데려간 것도, 신귀사에서도, 대벽산에서도 그리고 여기까지. 다 같은 놈들이야.. 다 똑같은.. 우리 가족의 원수들이야..’


부모님의 얼굴과 동생 그리고 할머니까지 떠오르자 행장이는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냥 세상이 두렵고 악귀들이 무서워 선준의 복수에 따라나섰지만 언제까지 아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달아날 수 만도 없었다.


'맞아.. 나도 싸워야지. 아재를 돕기로 했잖아. 그리고 나도 아재처럼 실력이 좋아지면 우리 가족 복수도 해야 하잖아.'


'꿀꺽.'


행장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입 안이 메말라 삼킬 것도 없었다. 자령은 밖에서 계속 소리 지르고 있었고 행장이는 비로소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향해 뻗어있는 손들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뒤로 물러날 수는 없응께..'


"이.. 이.. 이야아..!!!"


행장이는 한 치 앞까지 뻗어있는 손을 향해 냅다 주먹을 날렸다. 아직 어린아이의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곱디고운 손이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쌓인 짙은 한 만큼 진심이 담긴 복수를 위한 최초의 공격이었다.


'츠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 끼아아아아."


행장이의 주먹이 닿은 손들은 주인인 역귀와 아귀들은 급기야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갔다.


같은 시각, 바깥에서는 자령이 단검으로 초가집 건넌방 뒷벽에 붙어 방안으로 팔을 뻗어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역귀들을 찌르며 처단 중이었다.


'끄아아아악. 끼아아아아.'


행장이와 자령의 합동 공격 덕분이었을까. 녀석들은 순식간에 타들어가며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행장아..!!!"


자령은 역귀들을 처단하자마자 달려와 문을 활짝 열었다.


"누.. 누이.."


다행히 행장이는 멀쩡했다. 그런데 행장이의 표정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분명 공포에 떨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두 눈은 빛나고 있었고 꽉 쥔 주먹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행장아, 너 괜찮아..?"


행장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정말 괜찮은 거지? 어, 그런데 너 팔은 왜 이래?"


자령은 아직도 꽉 쥔 주먹을 펴지 못하는 행장이를 살피다 팔에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아.. 이거 방금 열개도 넘는 역귀들의 팔을 쳐내다가 긁혔나본디.."


"자야!! 자령씨!! 헉헉"


마을 중앙에서 여귀 떼와 역귀들을 물리친 선준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자신의 뒤로 달아난 녀석들 때문에 행장이와 자령이 위험해질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여기요!!"


"헉헉.. 너희들 모두 괜찮니? 자야, 자령씨도?"


"네, 역귀들 몇이 쫓아왔는데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물리쳤어요."


"정말이오? 다행이네요. 자야, 넌 괜찮아? 눈이 놀란 눈인데?"


"네, 아재.. 근디 똑같았지라.."


행장이는 멀쩡했지만 눈빛과 말투가 묘하게 변해있었다.


"뭐가, 뭐가 말이냐?"


"이 역귀라는 놈들.. 우리 가족, 신귀사, 대벽산에서 본 것들과 다 똑같았당께요.."


"그래.. 맞다. 여귀, 역귀, 마귀는 지박령만큼이나 많아, 아니 어쩔 땐 훨씬 많지."


"그래서 이번에는 지도 공격했지라.. 주먹으로 녀석들의 손과 팔을 내리쳐버렸다요."


"그래? 너도 역귀들을 물리쳤단 말이지? 장하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는거지?"


선준은 행장이의 말을 듣자마자 급하게 행장이의 몸과 팔을 살폈다. 곧 행장이의 오른팔에 난 작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어, 혹시 팔에 이 상처는 아까 역귀들한테 긁힌 상처니?"


행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행장이와 자령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많던 역귀들을 둘이 무찔렀다는 것만으로 뿌듯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선준은 달랐다. 당장 행장이의 안색과 눈을 살피더니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역귀는 역병을 옮긴다. 역귀에겐 조금이라도 긁히면 바로 역병이 옮는다..!'


"행장아! 머리에 미열이 나는구나. 속은 괜찮아?"


선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준의 두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어..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디.."


선준은 도포를 벗어 얼른 행장이를 감쌌다. 옆에서 지켜보던 자령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바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령씨, 아버지를 찾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영계를 나가야겠어요. 행장이가 역병에 옮았습니다. 우리도 위험합니다."


"당연하죠. 여기야 또 오면 되니. 전 뭘 할까요?"


선준은 행장이를 들쳐 엎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먼발치서 다시 여귀 떼들이 몰려들어 검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고 무엇보다 두억시니가 나타나면 더 골치 아팠다.


"절 엄호해 줘요. 영계로 들어온 귀문이 있는 집으로 다시 가야 하는데 왔던 길은 위험하니 돌아갈 겁니다."


자령은 화살을 걸어 활시위를 반쯤 당기고 방을 나섰다. 사방은 아직 고요했다.


"왼쪽 골목으로 갑시다. 거기가 시장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니 지금은 조용할 겁니다."


선준은 행장이의 몸이 더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행장이의 상태는 더 나빠질 테고 자신들조차 위험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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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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