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이와 자령도 이를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선준의 모든 공격이 명중했기에 이제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스으윽.'
'뭐야..?"
"아재, 아재! 저기 앞이요!"
행장이가 소리쳤고 자령은 활을 장전했다. 선준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아는 두억시니는 이렇게 쉽게 나가떨어질 녀석이 아니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도깨비의 두목이래 봐야. 지역에 있는 작은 무리의 두목일 뿐이지. 우리에겐 왕도깨비가 있잖아. 언제 나타나줄 진 모르지만..'
하지만 선준은 일령의 공격 중 가장 강력한 편에 속한 활 공격에도 버티는 녀석을 보면서 이제 어떤 조합으로 공격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구우우우우. 구우우우웅.'
"선비님, 우리 뒤에 아까 그것들이 다시 쫓아와요!!"
자령의 외침에 후방과 주변을 살핀 선준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두억시니를 만나기 전 대규모 공격으로 어느 정도 무력화했던 여귀 떼들이 다시 살아나 이렇게 빨리 쫓아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선준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일령을 고쳐 잡았다. 자령도 활시위를 당겨 언제든 부적촉 화살을 날릴 준비를 했다. 행장이도 더 이상 숨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직 없었다.
두억시니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 양옆으로 어느새 괴랄한 도깨비들이 튀어나와 낄낄대며 따라오고 있었다.
"일령, 기!"
선준은 과거 그날처럼 또 당할 수 없었다. 상대는 강했지만 그 사이 자신 또한 강해졌다. 게다가 지금은 행장이와 자령도 함께 있지 않은가.
선준의 기운이 더 들어간 때문인지 일령의 기검은 평소보다 한 자는 더 길어졌다.
'휙. 휙휙.'
하지만 두억시니는 훨씬 날랬다. 녀석을 베기 위해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일령을 휘둘렀지만 녀석은 이미 선준의 공격 진로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마치 물처럼 모두 피했다.
'슉. 슈숙'
'타닥. 탁'
선준의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자령이 부적 화살을 날렸지만 두억시니는 이 또한 모두 피해버렸다.
'이 자식.. 원래 이 정도였나.. 더 강해진 것 같아.'
선준과 두억시니가 맞서는 동안 사방에서 물밀듯 내려오는 여귀 떼도 일행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재, 우리 도망가야겠다요..!"
"선비님, 이대로 있다간 당하겠어요!"
그때였다. 두억시니 옆에서 서성이던 도깨비 서너 명이 한꺼번에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끼까아아아"
"으히히헤헤"
'휙. 휙'
"끼야아아악. 끄아아아악."
당황한 선준은 자세를 바꿔 아이들에게 달려가는 도깨비 둘을 일령으로 베며 제압했다. 하지만 도깨비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으아아아아.."
행장이는 겁에 질렸으나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 주변의 돌멩이를 서너 개 집어 들었다. 자령 역시 긴장된 얼굴로 단촉 화살을 장전한 채 당장이라도 쏠 준비를 했다.
"으히히헤헤. 윽."
겁 없는 도깨비 하나가 달려들자 자령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화살을 날려 맞췄다.
"끄아아아아-"
이번에는 두억시니가 달려들었다.
'휙. 휙'
선준은 두억시니의 날랜 주먹을 피하며 행장과 자령 쪽으로 다가갔다. 도깨비들과 두억시니 그리고 멀리서 계속해서 밀려 내려오는 여귀 떼까지.
선준이 축귀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많은 귀신들에게 둘러싸인 적은 없었다.
'이제 또 어떡한다. 두억시니 녀석에겐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아.'
이 와중에 자령의 부적 단촉 화살까지 바닥나자 자령은 활을 둘러매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아재, 아재..!"
“왜 그러냐.”
"아재, 대무당 할멈이 한 말 기억나능교? 일령은 방어가 더 강하다고 했던 거요."
"응..?"
그랬다. 분명, 세 봉우리의 대무당 할멈 집에서 할멈이 일령은 방어가 훨씬 강하다고 했다.
'방어..? 그런데 난 한 번도 일령으로 방어 주문을 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하는 거지?'
"아재 아재, 그냥 아무거나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단어를 말해보면..?"
"그래.. 한 번 시도해 보자."
선준은 일령을 다시 고쳐 잡았다. 두억시니를 비롯하여 도깨비들과 여귀 떼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준은 일령을 꽉 쥐었다. 처음으로 일령을 받았던 날 일령이 내뿜는 온기와 거대한 기운에 저절로 일령을 다루던 때가 떠올랐다.
"일령, 방(防)!!"
선준의 주문과 함께 일령이 한 번 크게 번뜩이며 빛을 내려다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아재, 안되는디요..."
"이.. 이게 아닌가. 방어를 뜻하는 글자가 또 뭐가 있지..?"
선준은 다시 다른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흔하게 떠오르던 단어들도 하필 이럴 땐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방에서는 이를 보며 실룩거리며 비웃던 두억시니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더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거, 이건 될까..?'
"일령, 갑(甲)!!!"
'부아아아앙-'
선준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선준 일행 주변으로 원형의 방어진이 만들어지더니 곧장 폭이 스무자도 넘는 크기로 커졌다.
'콰앙-'
"크학.."
선준 일행을 향해 뛰어올랐던 두억시니는 갑자기 만들어진 방어진에 부딪히더니 뒤로 열 길도 넘게 튕겨져 날아갔다.
"아재..! 우와.."
"이게.. 되는구나."
"선비님, 뒤에서 여귀 떼가 밀려와요..!"
선준 일행은 처음으로 본 일령의 방어 능력에 놀랐지만 이를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 없었다.
"가자!"
선준은 행장, 자령을 데리고 마을 중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령의 방어진 역시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선준은 갑 방어진이 든든했지만 처음 시연해 본 거라 얼마나 버틸지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쿵- 쿵-'
'타닥. 타닥. 타다다다다다닥-'
어느새 쫓아온 여귀 떼들이 방어진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게 한둘이 아니다 보니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수십 개의 대형 북을 미친 듯이 치는 것처럼 빠르고 잦아졌다.
'저것들, 광 한 방이면 대부분 떨굴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령의 방어 주문의 단점이라면 방어진을 유지하는 동안은 공격 주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헉헉, 아재 아재, 어디까지 가남요? 헥헥."
행장이는 벌써 숨이 차 헐떡였고 자령 역시 티는 안 냈지만 내심 힘들어 보였다. 선준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침 눈앞에 아주 허름하게 낡은 초가집이 보였다.
"둘은 저 앞 빈 집으로 달려가서 숨거라."
"아재는 요? 헥헥.."
"단순 여귀들이다. 어둑시니도 따돌렸으니 빨리 해치우고 갈게. 어서, 가거라!"
행장이는 그럴 수 없다며 멈칫했지만 눈치 빠른 자령이 행장이의 팔을 잡고 냅다 앞으로 뛰어갔다.
'슈우우우욱-'
선준이 돌아서며 일령을 고쳐 잡자마자 방어진이 사라졌고 서너 길 되지 않는 거리에 수 백의 여귀 떼들이 검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일령, 광!"
곧 작렬하는 빛이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끄아아아아. 끼아아아아.'
여기저기서 불타는 여귀들의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일령의 일격으로 대부분의 여귀들이 사라지거나 달아났다.
'이제 괜찮겠지..?'
'사사삭. 스사사사삭.'
'응?'
선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살피던 중 뒤에서 무언가 주막을 향해 빠르게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안돼!'
선준은 뒤를 돌아 행장이와 자령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귀들은 이미 골목을 돌아 자령과 행장이가 숨어 들어간 빈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