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작(羅勺) 주막 5

by Rooney Kim


"응. 가자요! 가서 가족들 다 만나자요!!"


기쁨에 넘친 행장이는 당장 엄마에게 큰 소리로 답했지만 이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선준을 돌아보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들을 만났지만 아무래도 일 년이 넘도록 함께 지내온 선준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선준은 처음 본 행장이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마음이 짠하게 좋으면서도 또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엄마를 만나 한을 풀듯 눈물을 쏟아내고 좋아하는 행장이를 보니 어쩌면 이제 여기서 녀석을 다시 돌려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영계이고, 저들은 저승으로 가지 못한 영혼들이며, 게다가 이곳은 나작 주막이 아닌가.’


'행장이의 기쁜 모습은 나도 참 좋지만.. 할멈이 나작 주막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을 테니.'


"아재 아재, 나 잠깐 가족들 만나고 와도 될랑가요..?"


선준은 복잡한 마음은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영가들이지만 이렇게라도 행장이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면 좋은 기회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이지."


행장이의 엄마는 멀찌기서 둘을 바라보았다. 인자한 표정과 생기 있는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허나, 행장아 명심해라. 이들은 산 자가 아니야. 그러니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된다. 적당한 시기를 봐야 여기서 나가야 해."


행장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시는 못 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은 어린아이의 가슴을 두 방망이질 치며 생각을 흐리기에 충분했다.


곧 행장이는 엄마와 함께 떠났고 선준의 자리로 음식들이 나왔다.


"어머..!"


"대단하구나.."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반찬은 서른 가지가 넘었고 조기 구이, 닭백숙, 돼지 수육 그리고 불고기가 나왔다. 말 그대로 임금임의 수라상에서나 볼 법한 상차림이었다.


"맛있게 드시고 쉬시다 가시지요. 영계는 산자들에게 위험한 곳입니다. 나작 주막은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한 마지막 보루입니다."


민저고리에 치마를 입은 앳된 여인들이 음식을 모두 차린 뒤 한마디를 남겼다.


"보시오. 혹시, 질문이 있소만."


"네, 말씀하시지요."


"나작 주막은 왜 주막이오? 이렇게나 큰데? 그리고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아니 영들은 누구들이며 왜 여기에 이렇게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오?"


민저고리의 여인의 한 길쯤 뒤로 중후한 인상을 한 여인이 서 있어서인지 민저고리 여인은 잠깐 머뭇거렸다가 얼른 대답했다.


"입구에서 보셨다시피 원래는 주막이었다가 후에 이렇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이승에서 굉장히 큰 덕을 지었거나 억울한 원한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정확히는 저희가 모셔오죠."


그녀의 말에 선준은 나작 주막이 억울한 원한령들이 한을 풀고 덕을 쌓은 자들이 상을 받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산 자들이 들어올 경우.."


"됐다. 그만하거라. 가자."


민저고리 여인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다가와서 민저고리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막았다.


여인들은 곧 사라졌다. 선준과 자령은 산해진미에 침이 넘어가다가도 걱정이 앞서 바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혹시.. 이거 잘못 먹고 의식을 잃거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렇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선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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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부지.. 할머니.. 진선이도..?"


행장이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여기가 영계라고 해도 자신의 가족들이 여기에 모두 모여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가족들이 모여 지내는 집은 또 어찌나 널찍하고 풍족해 보이는지 생전에 살던 초가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행장아! 우리 아들! 너무 보고 싶었다."


행장이의 아버지는 행장이를 보자마자 달려와서는 행장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생전에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행동은 아니었지만 생이별 후 아주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럴 법도 했다.


"오라버니..!"


곧 할머니 옆에 있던 진선이가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행장이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진선이를 꼭 안아준 뒤 곧바로 진선이와 함께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맞아. 난 가족들이랑 이렇게 행복했었는디..'


행장이는 벅차오르는 감정과 넘치는 행복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가족을 만난 반가움과 그동안의 설움에 눈물도 한참이나 쏟아냈다.


어머니는 행장이를 품에 안고 그 옆에서 등을 어루만져주며 오래도록 위로해 주었다.


"행장아, 이제 어디 가지 말고 우리 가족끼리 오래도록 여기서 살자, 알겠지?"


"...응. 엄마, 알겠다요. 흑흑. 나도 이제 엄마랑 가족들이랑 떨어지기 싫다요.."


"그래, 엄마가 밥 좀 차려올게. 우리 행장이, 뭐 먹고 싶니?"


"밥.."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장이는 허기진 배를 채우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음식을 먹어치울 심산이었다.


"배가 고프긴한디.. 엄마랑 가족들 만나니까 아까만큼은 안 고픈디."


"그럼 평소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돼지 수육을 삶아오마. 조금만 여기서 자면서 기다리렴."


"와! 돼지 수육이요?? 꿀꺽."


행장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군침이 돌아 침을 삼켰다.


"알겠다요. 헤헤."


행장이는 마치 그 지옥 같던 밤, 그날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식사를 준비하시는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안방에서 이불을 가지고 노느라 까르르거리며 웃는 진선이, 밭일을 하고 와서 평상에서 낮잠을 주무시던 아빠까지.


'돌아왔다. 진짜 다시 가족들을 만난 거잖아. 여기가 영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있잖아. 아재도 이해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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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아, 에휴.."


“어, 누이, 잘 잤소? 얼굴을 보아하니 아닌가? 그나저나 웬 한숨을 그렇게?”


대무당 할멈은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법당으로 나왔다. 정법은 마침 새벽 불공을 드리고 나오던 중이었다.


"넌 땡중이 불공은 또 아주 열심히냐."


"허허, 그래도 다음 생에 더 나은 무언가로 태어나려면 별 수 있나요. 그런데 왜 그러시우? 귀문을 연다고 나에겐 건넌방에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 뭔 일이라도 났소?"


할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법은 눈치가 백 단인지라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감을 잡았다.


"일단, 영계로 넘어간 녀석들이, 결국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던 나작 주막에 들어가 버렸네."


"나작 주막에 갔다고요? 어허이, 거긴 진짜 입구만 보면 들어갈 생각도 안 들 텐데."


"모르지. 또 일행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나작 주막 주모가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했겠지."


"어후.. 큰 일인데. 그나저나 나작 주막은 아주 오랜만에 큰 잔치가 벌어.."


“예끼, 이놈아!!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할멈의 호통에 정법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할멈을 진정시켰다.


"농이요. 농. 하하. 어, 그나저나 그럼 어째요. 또 누이가 갈 거요?"


할멈은 대답 없이 귀문을 열어둔 방을 쳐다보았다.


"이게 다 귀로 그 자식 때문이잖아. 엥이. 뭐 하러 영계로 기어 들어가 가지고..!"


"그런데 들어간 애들 셋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며. 그럼 이래저래 알아서 잘 빠져나오지 않을까?"


"그야.. 그런디 몰라. 일령 안에 태례랑 애들도 워낙 강한데.. 아 그 선준이라는 젊은 선비가 너무 착해. 너무 선해서 일령 능력의 일 할도 제대로 못쓰는 것 같더만."


"다른 애들은 능력이 어떤데?"


"왕도깨비 하나, 자기가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 모르는 어린 여자애 하나."


할멈이 말을 들은 정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엄청난 애들이잖아? 그 정도인 줄 몰랐네. 그럼 그냥 내버려 둬도 알아서 하겠네. 나작 주막이 워낙에 커서 다 처리는 못해도.. 탈출은 하겠는데?"


"그게 다가 아냐. 나 여기 오기 전에 강철이를 봤었다고 말했나?"


"뭐?! 강철이는 또 왜? 지금 어디서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려고 준비 중인 거야?"


"이유야 나도 모르지. 녀석이 왜 나타났는지도. 뭐라더라. 곧 큰 위협이 닥칠 거라는 이상한 소리만 하고 사라졌으니."


절에 틀어박혀 수행하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정법은 다시금 혼란해지는 세상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젊었던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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