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작(羅勺) 주막 6

by Rooney Kim


"제일 큰 골치는.. 그놈이야. 엥이.. 쯧.”


"그 놈이라니? 누구?"


하지만 할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십 년 전 대악령 대전 이후 이미 몇 번이나 입 밖으로 꺼낸 이름이지만 요즘 들어 다시 그 이름을 내뱉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누군데..? 또 저런다. 맨날 뭐 물어보면 대답도 대충 하고. 나이가 들면 나아지나 했더니 여전하네 그려. 쳇."


"말하면, 뭐 니가 나가서 해결할 거야? 우리도 이제 다 나이 들어서 기력이고 공력이고 축귀력이고 다 떨어져서 뭘 할 수가 없잖아."


하지만 할멈이 야단친다고 항상 당하고만 있는 정법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요 근방에 오래간만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큰 악령 무리 하나가 나타나서 난리였소. 귀신 들린 자, 귀신 난리통에 당한 자, 술에 취해서, 아편에 취해서 미친 지랄을 떨며 살인판에 도망쳐 나와 구해달라고 한 자까지."


정법이 한바탕 쏟아내자 오히려 할멈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누이, 누이가, 아니, 우리가 무량이를 잡고 나서 저승으로 보낸 뒤에 세상엔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요요, 요놈의 지랄 맞은 악귀들은 끝없이 생겨난다고."


"정법아, 우리가 그런 거 모르고 축귀를 했던 건 아니잖아? 너도 복수에 불탔고 이후에는 정의에 불탔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정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악령 무리는 어떻게 됐는데?"


"나도 모르오. 불공을 많이 드렸으니 누군가 쫓아낸 건지 지금은 근방에서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거봐. 그런 애들까지 이제 우리가 다 처리할 순 없어. 순리에 맡기는 거지. 걔네들이 이무량급은 아니잖냐?"


"에이, 이무량에 비하면 뭐."


할멈의 입에서 이무량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정법은 또 뭔가 미묘한 낌새를 느꼈다.


"아니, 누이 혹시 바깥세상에 진짜 뭔 일이라도 난 거요? 여기까지 귀문을 열러 온 것도 그렇고 그날 이후 평생 언급도 안 하던 녀석의 이름까지 말하고..?"


"돌아온 것 같아. 그놈이."


“누가? 이무량이..? 진짜, 이무량..?”


할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 어디요? 모습을 드러낸 거요? 아니면 그냥 누이가 그렇게 느끼는 거요?"


"귀로가 괜히 귀문을 열고 들어갔겠나. 단순히 악령들 몇몇 쫓으러. 전혀."


정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떨려왔다. 과거 이무량은 수백 년 간 조선을 공포에 떨게 한 끔살과 학살의 대명사, 악령 중의 악령인 대악령이었다. 이무량은 수많은 악귀 떼를 부리며 전국 팔도를 뒤집어 놓는가 하면 이 때문에 중국, 일본 등 주변 나라들과 전쟁이 터지기도 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기에 백성들 뿐만 아니라 궁궐은 물론 임금님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아니. 어찌 그게 가능하요? 분명히 녀석의 마지막에 흰둥이(해치)가 놈의 불기운을 모두 먹어치워 무력화시킨 후 부적에 가둬 저승으로 보냈잖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아니었소..?!"


"남방의 궤에 넣어뒀었지.. 그런데.. 음, 귀로가 지난해 한 날 무슨 꿈을 꿨다며 나를 찾아왔었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나 해서 냉큼 쫓아내려 했지만 대뜸 이무량 얘기를 하는 거야."


'꿀꺽.'


조금 전까지 쾌활하던 정법은 어느새 할멈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방의 궤가 열렸으나 아직 이무량의 부적이 그 안에 있으니 가서 문을 닫고 오겠다는 거였어."


"그런데 그때가 작년 백중 직후였고 영계에 온갖 잡귀가 넘쳐나던 때라 귀로 혼자 건너가기엔 위험했어. 그래서 적어도 석 달은 지나고 섣달그믐 이후나 되어야 한다고 했지."


"그럼 귀로는 그때 이후로 못 온 거요..?"


할멈이 고개를 내 저었다.


"아니, 부적을 확인하고 여닐곱 차례 봉인주문을 더 외고 남방의 궤를 덮어놓고 왔지."


"어, 그런데 왜 또 영계로 간 거요?"


"또 어느 날 꿈에 신령 같은 자가 나타나서는 남방의 궤에 이무량이 없으니 영계를 뒤져 악의 뿌리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나. 참나, 그 신령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예지몽을 꾸는 능력도 신통찮으면서 뭘 믿고 그랬나몰라. 지맘대로 들어갈 거면 나한테 와서 물어보지나말지. 쯧.."


"아.. 누이가 다 설명해 주니 이제야 이 모든 게 확실해지네요. 그럼 귀로가 귀문을 통해 들어간 게 바로.."


"지난 미월의 난 이후지. 나도 이제 인간 세상은 신경 쓰기 싫다만 어찌 계속 엮이냐."


“귀로도 그렇고.. 그럼 선준인가 그 선비랑 다른 애들도 전부 영계에 갇힌 거네요? 그 셋은 나작 주막에 갇혀 있고..?"


"더 말해 뭐 하냐."


그러자 정법은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가 작은 보따리를 하나 들고 나왔다.


"뭐냐?"


"가야죠. 영계에 애들 구하러."


"뭐래는 거야. 땡중이 들어가면 귀신들이 무서워서 길을 터준대냐?"


"아, 누이, 우리 다 같이 이 무량에 맞서 싸우고 이무량은 잡은 사람들이요. 우린 대악 축귀패가 아니었소? 하, 서운하게."


"그때가 언젠데. 50년이 다 되어간다."


"에이, 난 아직 팔팔해! 아직 환갑도 아닌데 뭘."


"퍽이나. 니 몸이나 챙겨."


정법은 할멈과 한창을 티격태격하더니 갑자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누이, 이무량은 워낙에 유명하고 끔찍한 죄를 많이 지은 큰 대악귀라 우리도 별생각 없이 이무량을 처단할 생각만 했지 녀석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녀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전히 모르지 않소?"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놈 때문에 죽고 고통받은 민초의 눈물이 더 중요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최악의 원인을 알아야 완전히 끊어낼 수 있고 그제야 백성들의 삶에도 평화가 찾아오지 않나 이 말이오. 잡귀도 한을 달래주면 저승으로 가게 마련인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다시 이무량이 나타난다면 할멈의 선택은 똑같았다.


최대한 빨리 녀석을 처단하고 봉인하는 것. 이후,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것.


"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에휴, 나작 주막에 들어간 애들부터 구해야 해."


"흐흐흐, 그거 봐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 누이, 어디 내가 좀 도와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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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부장은 초새벽부터 마을을 모든 관리들을 불러 모았다. 전날 밤, 새벽의 난으로 이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성해 버렸다.


관아 밖으로는 도움을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장 죽은 자 들은 장사를 치러야 했고 다치거나 아픈 자들은 의원의 치료가 시급했다.


"당장 관아 문을 개방하고 아픈 자나 도움이 필요한 자는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하라."


"네!"


포도부장의 말에 동반과 서반 아전들과 나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난밤의 난으로 갑사들 역시 타격이 컸다. 사람이 아닌 것들을 상대한 전투가 처음인지라 사상자도 꽤 있었다.


"갑사장과 착호장(천검)은 나를 좀 보시오. 아, 그리고 거기, 선창이라는 자를 다시 내 방으로 불러라."


방 안에는 포도부장을 중심으로 양옆에 갑사장과 착호장이 앉았고 바로 건너편에 선창이 앉아있었다.


"너, 지난밤의 환난에 대해 아는 게 없느냐?"


선창을 바짝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보다 몇 계급이나 높은 관리들 셋과 마주하고 있자니 손과 발이 떨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어.. 어젯밤 일은 진짜, 진짜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갑자기 마을에 불이 났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가보니 그런 큰 난이 났더라고요. 진짜입니다요."


"어젯밤 일은? 그럼 어젯밤 일은 모르고 지난 미월은 난은 잘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뜻이 아니라.."


포도부장은 이제 사소한 것도 미심쩍은 것은 말꼬리를 잡아서라도 밝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밤에 나도 저 불 속 마을에 있었다. 귀신 들린 자와 악귀들도 마주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수상한 게 뭔지 아나?"


선창은 이제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굉장히 특이한 냄새가 났다. 근데 말이야.. 그게 한 두 집이 아니었어. 내가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간 거의 모든 집에서 그 냄새가 났다."


포도부장은 선창 역시 이 일과 전혀 무관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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