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도 못한 왕도깨비의 능력에 다들 감탄하는 사이에 왕도깨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곧 닫히니 얼른 다들 나가거라. 여기는 내가 정리하겠다."
왕도깨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로와 자령은 왕도깨비에게 인사를 하고 뛰쳐나갔다. 그런데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행장이가 갑자기 왕도깨비에게 다가가더니 그 앞에서 허리가 꺾어져라 크게 숙여 꾸벅 인사했다.
"감사하다요.. 또 이렇게 구해주셔서 감사하다요."
"그래, 행장아, 이제 가자."
"잠깐."
선준 일행이 다들 귀문을 따라 나가려 할 때 갑자기 왕도깨비가 선준을 팔을 잡았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 집에 묶인 동아줄은 당장 잘라라. 절대 풀지 말고 칼로 단번에 잘라야 한다."
"네? 아, 네, 그리하겠습니다."
멀리 서는 또다시 귀신들이 떼로 뭉친 검은 물결이 크게 일렁이며 이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선준은 마지막으로 귀문을 건너왔고 선준 일행이 이승으로 돌아오자마자 왕도깨비가 만든 귀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왔다..!"
아주 오랜만에 이승으로 돌아온 귀로는 이승의 달라진 공기와 하늘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그런데 왕도깨비가 이승으로 넘어가면 제가 영계로 넘어갔던 동아줄을 당장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거기가 어디오?"
대벽산 아래 입구에 붙은 큰 기와집이오. 저랑 행장이는 바로 거기로 가겠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이승으로 오셨으니 집으로 가 좀 쉬시지요."
그러자 자령이 대답했다.
"선비님, 선비님이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이제 또 제가 갚을 차례예요.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엄청난 악귀를 쫓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선준은 아주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심한 요동이 치는 게 느껴졌다. 당장 눈앞의 일들로 잠시 미뤄뒀었지만, 윤대감 악령을 쫓는 건 결코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자는 하나이나 그 세력은 이제 수백에서 수천에 달할지도 모릅니다. 도와주겠다는 마음은 고맙다만 너무나 위험.."
"저희 아버지는 귀신들을 부립니다. 아빠, 맞죠?"
자령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귀로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하하. 그런데 안 통하는 녀석도 종종 있긴 하지만."
"저랑 제 아버지가 같이 돕겠습니다."
자령의 뜻밖의 발언에 선준과 귀로 둘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악귀의 세력이 더 커지면 제2의 이무량이 될 수 도 있는 거잖아요? 저도 활은 잘 다루고 부적을 먹인 단촉 화살은 웬만한 귀신들에게는 잘 먹히니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준은 어쩔 줄을 몰라 다시금 눈을 깜빡이며 귀로와 자령을 번갈아봤다.
"자령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상황을 보고.."
"자령씨, 아버지께서도 생업이 있으실 테고 또.."
"없어요. 아빠는 이 마을의 귀신들을 관리하시면서 돈을 버는 분인데 어차피 그 귀신 떼를 쫓는 거랑 하는 일이 다를 바 없죠."
"그건 그렇죠.. 그런데 제가 쫓는 악귀들을 같이 쫓는다고 제가 뭔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저도 항상 돈이 궁해 행장이에게 맛난 것도 못 사주던 형편이라.."
"아! 그것 때문이셨구나. 우리 집에 돈 많아요. 그리고 저도 일본에서 빈손으로 왔겠어요? 우리가 자금도 대고 도움도 드리죠. 어때요, 아빠?"
"어.. 어, 어? 어.. 그"
“아빠, 왜 더듬어요? 어차피 그 큰돈 어디에 다 쓸 거예요?"
“아.. 아니, 그 돈은 너 시집갈 때도 그렇고..”
“전 시집 안 갈 건데요?”
“하아, 너 계속 그 소리냐. 조선 땅에서 여자가 혼인을 안 하면..”
“그럼, 음.. 선비님 도와드리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어, 정말? 그러냐? 그럼, 하자, 까짓 거. 선비님의 사정은 아직 모르지만 얘기나 들어보자."
선준은 둘이 옥신각신 얘기하는 동안 행장이를 살폈다. 아직 멍한 표정에 별 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행장이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행장이가 입을 열었다.
"선비님, 근디 은진 누님네 동아줄은 언제 자른당가요..?”
"응..? 어, 아 맞다!"
행장이의 말에 선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저랑 행장이는 은진씨집으로 가보겠습니다. 두 분은 이승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선 집에 가셔서 좀 쉬시지요."
"그래 아빠, 우리 집에 가자. 집을 비운 지 꽤 오래되어서 엉망일 거야."
"저희는 한 시가 급하니 당장 가 보겠습니다."
선준과 행장이는 곧장 은진네로 달려갔다. 그런데 마을의 분위기는 그들이 영계로 넘어가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 지난밤, 귀신들의 난으로 여기저기 많은 집들이 불에 탔고 담장이 무너져있었다.
'이거, 우리가 없는 비운 사이에 또 무슨 난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이에 대해 알아볼 틈도 없이 은진네로 가야 했기에 선준과 행장이는 쉴 새 없이 뛰었다.
'끼이이. 탁.'
"헉헉. 은진씨. 헉헉. 저희, 저희들 모두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귀로씨도 찾았고.."
"누이, 은진 누이, 저희 다시 돌아왔다요. 이번에 왕도깨비가.."
대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가 안방을 확인한 둘은 묘한 분위기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안방에는 은진씨가 있었는데 전에 본 적 없는 어여쁜 색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채 옆에는 어디 나갈 채비라도 하는지 두루마기가 곱게 접힌 채 놓여있었고 날렵하게 빗어 넘긴 가르마 뒤로 팽팽하게 쪽진 머리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몹시 단정하고 단아한 모양새였다.
선준은 너무나 매혹적인 은진의 모습에 그만 넋이 나갈 뻔했다. 사람에게 홀린다는 게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동안 은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으.. 은, 은진씨.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누이, 누이 어디 나간당가요? 당최 벽과 천장에 붙어있던 부적들은 어디로 갔고 또 쪽방 문은 왜 저리 벌컥 열려있고 또.."
"응, 대무당 할멈에게 들었단다. 너희들 모두 무사히 영계에서 나왔으니 얼른 동아줄을 끊어야 한다고."
"네, 맞아요! 와, 어찌 이리 정확하게 알고 있당가요."
"행장아, 저기 칼이 보이지? 저걸로 쪽방으로 들어가서 동아줄을 자르렴."
“어.. 네, 알겠다요."
행장이는 곧 방으로 들어가 칼을 집어 들고는 쪽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선준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선준 역시 생에 이런 오묘한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선비님, 어여 안 들어오시고 뭐 하세요?"
"... 어, 아.. 앗, 네네. 이제 들어갑니다."
선준은 신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부적과 초들이 사라졌다는 걸 안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로 나오지 않고 어찌 빠져나왔나요?"
"아, 왕도깨비가.. 이번에도 신세를 좀 졌습니다. 다행히 귀로씨도 함께 나왔구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은진은 느닷없이 밥을 차려오겠다고 했다.
"배, 아.. 네, 배가 고픕니다. 지금 밥을 안 먹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네요. 거의 하루는 꼬박 아무것도 못 먹은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곧 상을 내어 오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은진씨도 여기서 잡귀들이 못 넘어오게 막으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요. 그냥 행장이가 동아줄을 자르고 나오면 같이 어디 저잣거리에라도 가서.."
하지만 은진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탁.'
곧 문이 닫혔고 선준은 자신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심장이 두 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이게 뭐지.. 이렇게나 가슴이 뛰는 건 처음인데. 그나저나 은진씨도 힘들었을 텐데 언제 저렇게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거지. 그 많던 부적들은 또 어디로 갔으며..'
'끼이이.'
은진은 마치 이미 상을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순식간에 진수성찬을 차려 내왔다. 선준은 그런 그녀를 도와 상을 받아주었다.
"아니, 은진씨도 몹시 피곤하셨을 텐데.. 그런데 부적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이제 우리가 이승으로 넘어와서 없어도 되는 건지..?"
"그럼요. 귀문이 방금 닫혔으니 이제 괜찮습니다."
"동아줄이 이제 끊어졌나 보군요."
"네."
그런데 이상했다. 동아줄을 자르러 간다던 행장이가 분명 돌아올 시간이 되었음에도 쪽방 안에서 뭘 하는지 감감무소식이었던 것이다.
"행장이도 나와야지 같이 밥을 먹을 텐데.. 제가 들어가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선준은 곧 쪽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개문 부적도 모두 사라진 뒤라 이미 귀문은 닫혔고 방바닥에는 잘린 동아줄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 행장이가 어디로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