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준은 겨우 자신이 몸을 누울 만한 크기의 쪽방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행장이는 없었다.
이상했다. 사실 근 하루 만에 만난 은진씨가 너무나 매혹적인 자태로 변해있는 것도, 숱하게 많던 부적들이 전부 사라진 것도 하나같이 수상한 것 투성이었다.
‘도대체 행장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가만 보자. 이거 좀 이상한데.. 내 촉이 맞다면..’
순간, 쪽방문에 은진의 모습이 비쳤다. 식사를 위한 상을 내어왔으니 근처에 앉아있을 법도 했는데 가만히 서 있는 모양새가 수상하다 못해 기이한 느낌마저 주었다.
‘뭐지.. 왜 저러시는 거야.’
선준은 혹시 몰라 잠시 동안 뚫어져라 은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창살 사이 창호지 너머로 은진씨의 형태가 보였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저, 저건..’
선준이 알아채자마자 쪽방문 너머로 비친 은진씨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은진씨 몸집보다 세 곱절은 더 큰 형태로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선비님, 얼른 나오시지요. 행장이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호호.”
‘어.. 어둑시니다.. 어둑시니가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야..’
하필이면 일령도 안방의 보따리에 있었다. 악귀 중에서도 악독한 도깨비 두목인 어둑시니가 나타났으니 일령도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순 없을터.. 나가자마자 녀석을 밀치고 일령부터 챙겨야겠다.’
‘에잇!’
‘끼익’
‘파악-‘
선준은 쪽방문을 박차고 나와서는 은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발차기로 은진의 가슴팍을 날려버렸다.
“아아악..”
‘철퍼덕’
선준은 바닥에 넘어진 은진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둑시니가 둔갑한 은진임에 틀림이 없을 거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둑시니가 맞겠지..? 맞을 거야. 그, 그런데 왜 안 일어나지..?’
선준은 여전히 공격 태세를 취한 채 은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양손을 가슴팍에 얹은 채 고통 어린 신음을 뱉을 뿐이었다.
‘뭐.. 뭐야?!’
“껄껄껄껄껄.”
순간, 뒤에서 귀에 익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던 선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설마..’
“선비님.. 으윽, 뒤요. 뒤..”
선준이 돌아보자마자 돌덩이 같은 주먹이 날아와 명치를 가격했다. 선준은 억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은진의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크흑..”
“으히히히히히.”
‘꽈아악-‘
은진씨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알고 보니 은진씨로 둔갑한 수하 도깨비였다. 선준은 도깨비의 양팔에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멍청한 놈. 이제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선준은 옆에 있던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일령은 그 안에 없었다. 선준이 일령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자 두억시니가 기분 나쁜 웃음을 띠며 손을 들어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이걸 찾으시나? 낄낄낄.”
“어..?”
당황한 선준의 얼굴 앞으로 두억시니가 손에 쥔 일령이 보였다.
“보아하니 이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던데, 뭐, 이게 있어도 나를 이길까 말까였지만. 그런데 어떡하나? 이젠 이게 내 손에 있네? 끼히히히히.”
‘제기랄, 이렇게 또 당하다니.. 젠장..’
“자아, 그럼 나도 한 번 주문을 외워볼까.”
“안돼!!!!!!! 위험하다. 네놈이 어떤 놈인데 그게 통할 것 같으냐? 큰 일 나기 싫다면 당장 내려놔.”
하지만 두억시니가 선준의 경고를 들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두 번이나 자신을 베려고 했던 바로 그 검이 아닌가. 두억시니는 일령을 손에 쥔 채 곧 선준이 했던 주문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네놈이 평소에 어떻게 나를 공격했더라?”
—————
“금정아, 다시 한번 말해 봐. 무슨 꿈을 꿨다고??”
“응. 산보다 더 큰 검은 무리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요괴 같은 사람도 나왔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진 모르겠고 산보다 더 큰 검은 무리는 너무나 강해 보여서 전설에 나오는 대악귀보다 더 무서웠어요.”
금정의 꿈 이야기를 들은 소백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차선과 전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금정아, 그게 다니?”
“응. 언니.”
“그래 잘했다. 우리 막내. 어유, 이제 일어나서 밥 먹자.”
“응.”
금정이 차선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소천과 전신은 서로 마주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요전에 악귀들 난 때 잡은 부적은 다 팔았지?”
“네, 그거 그때 우리한테 매번 잡귀들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던 자에게 다 넘겼지요.”
“그럼 이제 얼마나 남았냐?”
“그래도 한두 냥은 남았을 겁니다.”
“그 정도면 한두 달은 버티겠네.”
“그런데 형님, 이제 곧 겨울인데 그전에 좀 더 벌어둬야 겨울을 잘 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겨울엔 일감도 줄어들고..”
전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특히, 상강이 지난 후에는 일감을 받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백중 이후에 잡혀 들어간 귀신들 때문에 길을 떠돌던 그 흔한 망령도 구경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흐음.. 그래, 가자! 나랑 같이 저잣거리에 나가보자. 혹시라도 그 자가 보이면 더 부탁을 해 보자꾸나.”
“네, 형!”
—————
"낄낄낄낄낄. 네놈이 항상 이렇게 말했지. 일령, 광!"
그 소리에 선준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응?'
하지만 곧장 눈을 멀게 할 듯 터져 나와야 하는 빛은 나오지 않고 일령을 쥐고 있는 어둑시니의 손에서 서서히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 이씨, 이게 뭐야.."
손에 응집되어 있던 빛은 곧장 어둑시니 몸의 한가운데로 옮겨가더니 그 안으로 빛이 점점 몰리며 커지더니 곧 어둑시니의 몸을 산산조각 내며 무지막지한 빛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
선준은 생각지도 못한 어둑시니의 두 눈을 꼼 감고 광폭발에 놀라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이..??"
그동안 일령을 쥐어본 자는 몇몇 있었지만 이를 사용한 자는 자신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령이 역으로 주문자를 공격해 터트려버리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악한 마음으로 이를 사용하면 일령이 오히려 알아서 조치를 해버리는구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둑시니가 서 있던 자리 아래로 찢긴 옷가지와 일령이 떨어져 있었다. 선준은 당장 달려가 일령을 주웠다.
'쾅쾅쾅-'
순간 쪽방 안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이 고요했고 쪽방 안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
'읍.. 읍-'
'뭐야, 쪽방에 누가 있었잖아..?'
선준은 망설임 없이 쪽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행장아..! 아니, 은진씨도?!"
쪽방 안에는 행장이와 은진이 손과 발을 결박당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선준은 당장 둘을 풀어주었다.
"헉헉. 하악. 학.."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아까 여기에 들어왔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요..?"
"아재, 아까 아재가 들어와서는 우리는 본체만체하고는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보다가 나갔다요.."
"내가? 아까 전에는 정말 이 방에 아무도 없었는데..”
"두억시니 때문인 거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묶인 동아줄로 두억시니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네, 사정이 많았습니다. 저희 셋도 나작주막에 갇히고 행장이는 가족으로 둔갑한 요괴들에게 끌려가고.. 도깨비가 귀문을 열어주는 덕에 바로 이승으로 왔지요. 아! 귀로씨를 찾았습니다. 아니, 귀로씨가 저희를 찾아왔다고 해야 말이 되겠군요."
귀로를 찾았다는 말에 은진은 반색을 하며 깜짝 놀란 얼굴로 선준을 쳐다보았다.
"정말 인가요? 그럼 귀로씨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건가요?"
"응, 누이. 그렇다요."
"잘됐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선준은 예상보다 더 밝아진 은진의 표정에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늘은 지워지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