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아!!"
선준이 행장이를 불렀을 때는 이미 행장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행장이를 들어 올려 펄펄 끓어오르는 솥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선준은 이를 보자마자 달려갔다. 자령 역시 바로 눈치채고 단촉 화살을 집어 들어 행장이의 엄마로 둔갑한 여인의 다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선준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행장이 엄마가 행장이를 끓는 솥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안돼에..!!!"
선준은 행장이를 구하기 위해 펄펄 끓는 솥으로 몸을 날렸고 순간 행장이도 제정신이 들었다.
“어.. 으아아.. 엄, 엄마..!!”
선준은 행장이든 자신이든 누구 하나는 완전히 끝장나거나 크게 다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쑤우우우욱'
'턱.'
'척.'
분명 둘은 뜨거운 솥으로 빠지기 직전이었는데 별안간 솥보다 더 큰 손이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행장이를 받아내는 게 아닌가.
"으허억.."
"으앗."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행장이를 구하려 몸을 날렸던 선준의 도포와 상의 뒷 옷깃을 잡아 그를 구했다.
'뭐지.. 왕, 왕도깨비인가..?’
"행장아, 괜찮아?!"
"아.. 아재, 네.."
갑자기 나타난 손 덕분에 행장이는 산채로 끓는 물속에 삶아질 뻔한 끔찍한 위기에서 벗어났다.
"아이씨, 이제 삶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 스벌 것들이..”
행장이 엄마로 둔갑했던 여인은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본색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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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쾅!'
"으헉."
귀로는 식칼로 자신의 목을 내리치려던 남자의 공격이 무색하게 마치 물 흐르듯이 피하면 발을 걸었다. 그 바람에 남자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
누가 한 패가 아니랄까 봐 곧바로 행장이의 여동생으로 둔갑했던 꼬마가 낫을 들고 귀로에게 달려왔다.
그러자 귀로는 입으로 뭐라 뭐라 혼자 읇조리기 시작했다.
'불설 팔문진경(八門陳經) 발원이요. 북방은 감중년이니 간방지킨 휴문부장은 불러내어..(중략)'
"끄아악.. 끼아아아아악."
"그만.. 그, 그만.."
귀로는 남자와 아이의 비명과 고함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팔문진경을 다 욌다. 이후 귀로 앞에서 미쳐 날뛰던 두 귀신은 마치 누가 붙잡아두기라고 한 듯 한자리에 멈춰 꼼짝도 못 했다.
'이따위 잡귀들도 저리 설칠 수 있으니 나작 주막이 이 지경이 된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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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령은 그저 눈앞에 나타난 육중하고 거대한 사내에 놀라 그만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십 척도 넘는 키, 초가집만 한 등판, 그리고 한 손에는 어른인 선준을 번쩍 들고 다른 손에는 행장이를 손바닥으로 받아낸 무지막지한 힘까지.
‘호..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왕도깨비..?'
"끼야앗!"
행장이의 엄마로 둔갑했던 여자 귀신은 분을 참지 못하고 등 뒤에 숨긴 날카로운 식칼을 왕도깨비에게 짚어 던졌다.
'틱- 탁.'
하지만 그 식칼은 왕도깨비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 어딘가에 부딪히더니 힘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멍청한 것. 저러니 아귀가 욕먹지.”
왕도깨비는 어느새 둘을 자령 앞으로 내려두고 한 손으로 여자 귀신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펄펄 끓는 솥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끄아아.. 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여자 귀신은 저항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히려 왕도깨비는 여자 귀신이 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솥뚜껑만 한 손으로 지긋이 내리눌렀다.
선준과 행장이, 자령은 이 장면을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야.. 괜찮으냐..? 저것은, 이들은 네 가족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귀신이 둔갑한.."
행장이는 갑자기 바뀐 가족의 모습에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하지만 행장이는 영리한 아이라 곧바로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알지라.. 아까 솥 앞에 섰을 때 갑자기 눈이 뜨였다요.."
곧 그들의 뒤로 귀로가 달려왔다. 귀로 역시 왕도깨비를 보고는 깜짝 놀라 더 다가가지 못하고 발이 얼어붙듯 제자리에 멈췄다.
"저, 저건.."
"아빠, 왕도깨비래요. 행장이와 선비님을 구해줬어요."
왕도깨비는 곧 솥에서 새카맣게 낡은 축축한 누더기를 꺼냈다.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이들의 본모습이다. 자, 이제 너희들 모두 여기서 나가야 한다."
왕도깨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당과 입구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듯한 기괴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서, 선비님.."
"허억.. 아재.. 저, 저어기.."
입구에는 초점을 잃은 눈빛을 한 수 백의 사람들이 담장과 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오랜만에 들어온 산 자의 육신과 혼백을 맛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어, 어떻게 하죠?"
귀로가 바로 앞장서며 다시 한번 팔문진경을 외려 하자 도깨비가 귀로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어찌, 나까지 가둘 셈이야?"
곧바로 심호흡을 하던 왕도깨비는 마침내 준비가 되었는지 수백의 아귀와 역귀들이 모여있는 입구를 향해 크게 입김을 불자 대문과 담장에 있던 녀석들이 모두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버렸다.
‘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툭. 투둑. 투두둑."
순식간에 멀리 날아가던 귀신들은 온데간데없고 수백 벌의 낡은 거적때기만 땅에 널브러졌다.
'정말 저것들이 다 그저 그런 잡귀들이었다니..'
왕도깨비가 있으니 제아무리 엄청난 규모의 나작 주막이라고 해도 이들의 탈출을 제지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저기 입구가 있다!"
선준 일행은 왕도깨비를 따라 입구로 달려갔다. 그런데 입구에는 붉은 치마를 입은 낯익은 여인이 서 있었다.
'저 여인은..'
"어이, 왕도깨비 양반.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나중에는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호구별상(불교 신 중 천연두(마마)를 주관하는 신령으로 심술맞고 변덕도 심한 신)이 벼르고 있다는 사실만 아시오."
붉은 치마의 주모가 왕도깨비에게 경고했지만 왕도깨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붉은 치마의 주모는 곧장 주막 안으로 들어갔고 선준 일행은 다시 왕도깨비와 함께 남겨졌다.
분명히 수많은 종류의 귀신들이 무빙비로 노출된 영계였지만 왕도깨비와 함께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드디어 빠져나왔군요. 자령의 아버님도 찾았으니 이제 여길 나가야 합니다. 여길 나가려면 다시 산입구 마을의 빈집에 묶어둔 동아줄을 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준이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저 멀리 사방에서부터 여귀와 역귀 떼들의 일렁거림이 이는 게 보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왕도깨비님, 사실, 나작 주막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둑시니를 비롯하여 많은 귀신들에게 쫓겼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우리가 나작 주막을 빠져나온걸 어찌 알고 또 멀리서부터 저들이 다가오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하지만 왕도깨비는 선준의 걱정은 별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행장이를 바라봤다.
"아직 한이 풀리지 않을게다. 아니 가족인 줄 알았는데 요괴들이었으니 오히려 배신감과 충격이 클 게다. 한동안은 행장이를 더 잘 보살펴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