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님 말이냐? 항상 똑같지. 실수하면 호통치고 잘하면 상을 내리고. 왜 그러냐?"
"대벽마을에서 아편의 근원을 쫓다가 서리 하나를 심문했는데요. 그자의 입에서 김진립 대감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뭐라..?!"
포도대장은 정만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이었을지도.."
"소문이라니요..? 어떤.."
포도대장은 정만의 얼굴을 살폈다.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가려해야 했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한 번에 나락으로 갈 수 있는 곳이 관아이고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아전 따위가 하는 말을 모두 신뢰할 순 없으나 또 흘려들을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할 순 없지."
"대감님은 평소에 술도 하지 않고 일이 끝나면 조정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시는 건 유명하지 않냐."
"네."
"나이가 들어서도 문무를 닦고 수양하시는데 게으름이 없으신 분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오히려 그런 청렴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들이 있어. 다른 대감님들도 그렇고 윗분들도 아니꼽게 보는 거지. 자기 혼자 선비냐 이거지."
"그야. 김대감님이 워낙에 올곧으시고.."
"아니. 만약에 그게 다 뭔가 숨기는 게 있고 그걸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 네?"
정만이 반문하자 포도대장은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탰다.
"이미 조정에서도 김대감님을 살펴보는 중이야. 사람일은 모르는 거거든. 항상 만반의 대비를 해놔야 해."
"그래도 그동안 숱하게 많은 공과 업적을 쌓으신 분인데 뚜렷한 증거나 이유 없이 시기심만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좀.."
"예끼, 조정에서 괜한 시기심으로 이러겠나."
정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런 보고를 하는 것도 실은 김진립 대감이 혹시나 억울한 일에 휩쓸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였지 정말 그를 의심해서 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오늘부터 김대감님의 뒤를 밟아라. 절대 티가 나서도 안되고 그저 멀리서 집과 조정을 오갈 때 그리고 특히 퇴청 후에는 뭘 하는지, 쉬는 날에는 뭘 하는지 낱낱이 살피고 보고하거라. 포졸은 얼마든지 써도 좋고 필요하다면 무인들도 여럿 붙여주마."
“네? 아니.. 그래도 그건 좀.."
"포도청의 존재 이유가 뭐냐. 조금이라도 나라에 위해가 될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찾고 일벌백계해야 하는 게 아니냐?"
"그야.."
"됐다. 이만 나가보거라. 지방엘 다녀오느라 너도 많이 피곤할 테니 그만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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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와 자령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쑥대밭이 된 마을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헉.. 아빠, 우리가 영계에 들어간 사이에 뭔 큰일이 났었나 봐요."
"뭐,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또 일이 터질 줄이야. 미월이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참나."
"알고 있었다고요..?"
"예상을 한 거지. 녀석들이 조선 땅에서 점점 세를 확장하는 중이라 앞으론 전국 팔도에서 이런 일이 잦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이라니..? 그게 누군데요?"
"어이구, 왜? 이제 이 애비 말에 좀 관심이 가냐?"
"에이 참, 내가 언제 아빠한테 관심이 없었다고. 히히.."
"귀신 얘기라면 질색팔색을 하고 부적이니 주문이니 치를 떨고 잔소리하던 게 엊그제인데?"
"아아니..! 치를 떨다니요. 아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자령이 우물쭈물하며 귀엽게 변명하자 귀로는 옛날 생각이 났는지 그저 아빠 미소를 한가득 피운채 자령을 쳐다봤다.
"자령아, 잘 들어라. 앞으로 네가 살아갈 길에 네 타고난 능력이 아주 중요하고 필요하다."
확실히 자령의 태도는 달라졌다. 귀로의 귀신 얘기에 하품이나 하며 무관심하던 태도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은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을 먹고 산다. 왜냐하면 그때 제일 마음이 약해지고 정신을 놓기 좋거든."
"그건 그렇죠."
"그럼 또 언제 인간들이 정신을 잘 놓겠냐?"
"음.. 싸울 때, 아플 때 그리고 음.. 술 마실 때?"
"옳지. 또."
"또요?"
"또. 응, 있지."
하지만 자령은 더는 몰랐다. 자령의 생각에 보통 사람들이 정신이 약해지는 때는 모두 나왔기 때문이다.
“꿈. 자는 동안 사람이 꿈을 꿀 때도 귀신이 넘나들기 좋아.”
“아.. 그렇구나.”
“또 하나 더 있다."
“또요?? 아, 그냥 말해줘요."
자령의 다그침에 귀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편이다."
“아편!? 어, 그런데 조선에는 대마가 거의 없지 않아요?"
귀로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없었지. 거의. 과거에는 정말 청정했고. 그런데 아까 말한 세력들이 전국 팔도로 세를 늘리는 모양이야.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뭔데요..?"
"귀신들. 악귀들의 세는 더 빠르고 크게 늘어난다는 거야."
"흠. 영계에 가보니까. 역귀니 아귀니 여귀니.. 안 그래도 저승을 안 간 귀신들이 쎄고 쎘던데.."
이윽고 둘은 집에 도착했다. 집은 주인도 없는 사이에 또 난을 한 번 치렀지만 다행히 불에 타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넌 어째 아비한테도 말도 없이 그렇게 먼 곳을 왔다 갔다 하냐?"
"갑자기 또.. 근데 아빠는 뭐 일에 푹 빠져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집에도 들어오지도 않았으면서. 집에 누가 있어야 말을 하고 가죠."
자령의 똑 부러진 대답에 귀로는 또 할 말을 잃고는 연신 흠흠 대며 헛기침을 했다.
"알잖아. 아비의 일이 중한 일인걸 어쩌냐. 관아에서는 잡귀를 없애달라. 여기저기서 원한령을 달래 달라. 지방에서도 관리들이 부르면 인 갈 수 도 없고.. 또 네가 일본으로 건너가던 그때는.. 하아, 말도 마라 방금 말한 그 아편. 그것 때문에 한양까지 다녀왔다. 아편굴이 성행하면서 귀신 들린 자가 지천으로 깔렸으니 어서 와서 축귀 좀 하라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집에서 아빠만 기다리는 건 아니다 싶어서 좀 더 자주적이고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럼에도 귀로는 당장 시집도 갈 만큼 다 큰 처자가 홀로 지방이나 먼 타국까지 다녀왔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무슨 일이 안 난 게 다행이다."
"아니야, 아빠. 나 일 많았어. 산적도 만나고, 괴한도 만나고. 나랑 싸운 애들이 스무 손가락도 넘어."
"뭐야..?! 누가 감히 내 딸을 건드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아빠가 활 쏘는 법도 알려줬고 검쓴 법도 배워서 모두 다 잘 해결했지. 또, 일본에서 총 쏘는 법도 배웠고."
자령은 귀로의 타박에도 꿈쩍 않고 모두 대꾸했다.
"아니, 근데 아빠는 도대체 지금은 뭘 쫓고 있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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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형, 얼마나 더 올라가야 돼요?"
"세 봉우리의 중턱이니 이쯤일 텐데. 그나저나 결계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 어라.. 얏! 너, 전신이 맞냐? 맞아?"
"아, 형, 저 맞아요. 결계에 안 걸리려고 결계를 뚫는 부적을 열개나 만들어 왔어요. 참."
"그렇지. 좋아."
"그럼 여기서 잠시만 쉬자. 숨이 차서 더는 못 가겠다."
"네, 형."
소백과 전신은 커다란 바위 아래에 앉아 준비해 온 떡과 엿을 꺼내 먹고 있었다.
'부스럭.'
"응..?"
'부스럭. 바스락.'
소백은 떡을 먹다 말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신아, 무슨 소리 못 들었냐..?"
"네? 무슨 소리요?"
'부스럭. 부스럭. 바스락.'
"들었지? 너도 들었지?"
"네, 형. 뭔가 다가오고 있나 본데요..?"
전신은 당장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부적을 꺼낼 준비를 했다.
'부스럭. 바스락..'
'응..? 멈췄나.'
소백이 귀를 쫑긋거리며 초집중하던 때였다.
'휘익-'
'두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으아악!"
"아악. 깜짝이야."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둘의 눈앞에 등장한 해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구랴, 아구랴 귤바."
"으아아.. 형, 쟤.. 쟤 해치 아닌가요?"
"맞.. 맞다."
해치는 이글거리는 황금빛을 발산하며 둘 앞에 당당히 섰다. 거대하지만 귀여운 몸통, 굵고 거세지만 오동통한 다리, 커다랗고 동그랗지만, 표정을 읽기 힘든 눈망울까지. 해치의 실물을 처음으로 본 전신은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대단해.. 이렇게 매혹적인 영물이라니..'
"귤바, 귤바."
해치는 둘이 꼼짝 않고 움직이지 않자 두 눈을 끔뻑거리며 얼굴을 좌우로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