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폭풍의 전조(前兆) 2

by Rooney Kim


'번쩍-'


순간 대벽산과 세 봉우리 근처에서 큰 빛이 일었다 사라졌다.


겸세는 수상한 기분에 바깥을 살폈으나 오두막 주변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이나 자야겠다.'


겸세는 이윽고 잠에 들었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현실과 흡사한 꿈 속에서 겸세는 산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길과 산의 형세에 비록 꿈 속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벌써 성묘를 할 때가 되었나..? 아직 며칠 남았을 텐데.'


자각몽이었다. 겸세는 꿈 속임을 인지하면서 길을 따라갔다.


'이쯤이 무덤일 텐데.. 아휴, 잡초들이 그동안 또 무성히 자랐구나. 이젠 종종 와서 정리를 좀 해야겠어.'


매번 오던 무덤이었지만 오늘따라 겸세는 기분이 묘했다. 그건 아마도 꿈 속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툭.. 투둑.'


비록 꿈속이었지만 늘 그렇듯이 겸세는 잡초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어른 키만큼이나 자란 풀과 잡초를 제거하고 나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덩그러니 놓인 무덤 두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그런데 이 무덤들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지..?'


겸세는 마치 방금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의 무덤들이었길래 내가 계속 여길 돌본 거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생각에 빠져있던 겸세가 고개를 돌리자 별안간 눈앞에 어떤 두 사람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천하의 겸세였지만 갑자기 나타난 낯선 발 두 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냐?"


하지만 겸세는 놀라긴 해도 물러서는 법은 없었다.


'웬 남자와 여자인데..'


"아들아, 때가 되었다. 윤대감을 찾거라."


'아들..? 난 부모가 없는데.'


겸세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부부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겼다. 게다가 겸세는 윤대감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헉.'


갑자기 잠에서 깬 겸세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군.. 휴우-’


겸세는 깊은 한숨을 몰아내 쉬었다. 겸세는 젊은 농사꾼 부부가 나오는 꿈을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벌써 몇 년에 걸쳐 꿨다. 하지만 그들이 겸세에게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꺼낸 말이 아들이라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한 듯한데 난..'


겸세는 어린 시절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마치 기억이 삭제당한 느낌이었다. 겸세는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고 가족이라곤 아니, 대화를 하는 대상이라곤 자신의 안에 있는 다른 혼 하나가 전부였다.


'게다가 복수라니..? 윤대감, 그게 누군데? 꿈자리가 영 수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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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 가겠다는 거야?"


"명분이 없지 않나? 우리가 너네처럼 나라에 속한 정예 갑사도 아니고."


근중은 천검의 제안에 대해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예전의 근중이었다면 흔쾌히 가자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 규모도 많이 커졌잖아. 내가 책임질 사람들과 일들이 많아. 여기서 또 내가 한양으로 가버리면 우리 애들은 누가 돌보고..”


"걔들이 얘들이냐? 걔들이 아가들이냐고. 돌보긴 무슨. 야, 너 없어도 잘 돌아가. 장태랑 물포는 뭐 언제까지 네 밑에 있어야 하는데?"


"그야.."


근중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런 걱정은 자기가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과한 걱정과 책임감일지도 몰랐다.


“지금 내가, 아니 포도부장님이 쫓는 자가 얼마 전 여기서 너희들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자들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그래도 안 갈 거냐?”


"..뭐?"


"시간이 없다. 시일이 급하다고. 포도부장님이 얼마나 급하면 착호 하는 나까지 불러들이겠냐? 정예병도 있고 경갑사들도 있는데 우리까지 불렀다면 뭔가 시급하고 은밀한 거야. 그럼 소수 정예의, 강력하면서도 민첩한 녀석들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나나 너처럼."


"좋아. 그런데 너네는 공식적으로 불려 가는 거라 대가도 받고 인정도 받겠지만 우리는 산적이야. 물론, 우리는 스스로 의적이라 믿지만 관아나 조정의 눈엔 산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왈패나 건달도 아니고, 검계는 더더욱 아니니. 포도부장님도 필요해서 부르는 거 아니겠어?"


"포도부장님이 불렀다고? 우릴?"


"응."


"우리를 어떻게 알고?"


"너네야 전국적으로 유명하잖아. 수년 전, 전국구로 크던 검계인 이덕패도 쓸어버린 게 누구냐?"


“그야, 당연히 우리


"포도부장은 그때부터 너네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이번에 대벽마을로 우릴 토벌하러 온 이유는?"


"토벌? 너희를? 크하하하. 아니야, 조정과 관아에서야 뭐 너희나 누군가를 뒤집어 씌울 명분을 찾으러 갑사들을 보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정만 포도부장님이 여기로 온 이유는 그게 아니었어."


"그럼..?"


"환난의 진짜 원인을 찾고 싶었지. 그리고 이제 그걸 한양에서 찾으신 것 같아."


"음.."


"시간이 없다."


"가자. 그래 나도 궁금하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가 이런 난들을 만들고 키우는지."


"좋아. 가장 믿을 만하고 날랜 애들로 꾸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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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한양.


"으아악. 아아악."


'뭐야, 이 괴물 같은 놈은..?'


한양도성의 한 입구에 자리 잡은 주막에서 이른 저녁부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으윽. 끄으응."


건장한 사내 둘이 평상 옆으로 나가떨어져서는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막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곧 큰 싸움판이 벌어질 참이었다.


"조용히 밥만 먹고 가려는데 왜 자꾸 시비시오?"


하지만 바닥에 넘어진 둘은 말이 없었다. 그들이 먼저 대놓고 뒷담화를 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구구, 거 복장이 한양 사람 같지는 않아서 한 두 마디 한 거 가지고 뭔 시비까지.."


"그러게. 자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런 사고를 치니까 한양 사람들이랑 부딪히지.."


그러자 건장한 사내는 갑자기 머쓱한 얼굴을 하더니 넘어진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참, 듣고 보니 미안하게 됐소. 충청도에서 새벽에 올라오는 길에 중간에 산적도 만났던 터라 제가 예민했소."


사내와 둘은 금방 화해했다.


"미안하게 되었으니 제가 국밥이랑 술을 사지요. 한잔 걸치고 가겠소?"


"아.. 뭐, 허허. 그러지요."


셋은 곧 한 자리에 앉았다. 건장한 사내는 곧바로 술을 따라 둘에게 건넸다.


"자자, 오늘은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께 방금 전의 소란에 대해 사과하는 마음으로 제가 술을 사겠소."


사내의 제안에 주막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꿀꺽꿀꺽'


"캬아아-"


"그럼 제 소개를 먼저 하지요. 제 이름은 산비초요. 충청도가 고향이고 한양에 물건을 좀 팔아 볼 요량으로 왔습죠."


건장한 사내가 소개를 끝내자 술맛을 다시던 둘이 산비초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산비초요? 이름이 특이하구려. 호인가?"


"그나저나 이 술은 왜 이리 맛있소? 여기서 파는 술맛은 아닌데. 혹시 술을 파시오?"


"하하하. 술은 조선 천지에 널렸지만 이건 다르죠.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지 않소? 갖은 약재를 넣고 다려 만든 환을 술에 타기만 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마음이 편해진다오. 껄껄."


"호오라. 환이오? 한 잔만 마셔도 두통이 가시고 기분이 좋으니 이건 그렇다면 천하의 명약이구려. 한 잔 더 주시오!"


"여기도, 여기도 주시오!"


"키야아, 뿅 가는 맛이구만."


산비초는 자신이 만든 환약을 탄 막걸리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봐. 인간들은 이렇게 곡이기 쉽다니까. 고상한 척, 의로운 척, 편견이 없는 척. 그만 숨기고 쾌락의 골짜기에 절어 살아. 인생 뭐 있냐. 끌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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