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대벽산의 구미호 1

by Rooney Kim


"안녕들 하시오?"


때는 자시(23시~1시)로 대부분의 산짐승들도 잠에 드는 깊은 밤이었다. 길달은 길을 걷다 말고 대벽 마을 초입에 서 있는 장승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길달의 인사에 장승 둘이 주먹만 한 두 눈을 부라리며 길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 어어?! 길달이 아닌가?"


“길달? 수백 년 전에 죽은 길달?! 다시 돌아온 게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길달을 보며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떠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네네, 장승님들 다 잘 계셨수? 허허."


"아니, 수백 년을 안 보이더니?"


"그렇게 됐소. 좀 억울하고 끔찍하게 갔던 터라 다시금 이렇게 만회할 기회를 주더군요."


"오호라. 염라님이 해주셨나?"


"아뇨. 저승까지 갔으면 못 돌아왔겠죠. 그.."


"누가 다시 살려줬어?"


"어느 날 갑자기 감은장아기님(운명, 행운,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여신)이 나타나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 중이던 제 혼백을 거둬 다시 살려주셨죠."


"감은장아기님이? 어머나, 놀랍고 고맙구만. 사람도 아닌 도깨비에게까지."


지하여장군이 감탄하며 놀란 표정으로 길달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유가 뭐라던가?"


"할 일이 있답니다. 그게 끝나면 이젠 저승으로 돌아가는 조건이었지요."


"할 일?"


"저도 몰라요. 아시죠? 신들은 목적을 제대로 말 안 해주시는 거."


그러자 천하대장군이 길달의 눈을 골똘히 바라보며 의구심이 섞인 얼굴이 되었다.


"으흠.. 그런데 자네는 왜 지금 괴상한 자와 엮였나?"


이에 길달은 내심 당황했다. 다시 이승에 온 뒤 하필 처음 마주한 게 윤대감 세력이었고 격투에 격투를 거친 끝에 윤대감의 일당에 무릎을 꿇고 나서는 윤대감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여우형 요괴니까 구미호는 나보다 더 잘 찾을 거 아닌가? 전국의 구미호를 모두 잡아오게 그럼 네 영혼은 놓아주겠다. 껄껄껄.'


길달은 아직도 윤대감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다.


'이것도 감은장아기님이 다 아실 텐데..'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 허허."


사실 장승들은 잡귀나 악귀를 막을 뿐 도깨비나 귀신의 속셈을 읽기는 힘들었다. 길달의 마음을 떠본 천하대장군의 셈에 길달이 넘어가고 만 것이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그래서 지금 누구를 찾는 중입니다."


"그려 그려, 다 사정이 있는 법이지. 잘 해결하게나."


"아무렴, 감은장아기님도 다 생각이 있으실 게야."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웬만한 잡귀는 우리가 다 처리할 수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길달은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지만 워낙에 눈치가 빠른 구미호가 또 언제 거처를 옮길지 구미호 출신 도깨비인 길달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솟대들이 반대쪽을 바라보는 걸로 보아. 분명 이쪽일 텐데.'


길달은 우선 대벽산의 중턱까지 바람 같은 속도로 샅샅이 살폈다.


'없어. 희한하네. 구미호야 원래 찾기 어렵다지만, 여긴 진짜 누가 와서 귀신들을 싹 잡아가기라도 했나..? 어찌 아무것도 없냐.’


길달은 의아했다. 조선 천지에 지박령이나 망령이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벽산에는 그 흔한 잡귀 하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절에도 귀신들이 붙어사는데.. 혹시 장승들이 다 해치웠나. 그건 또 아니지. 장승은 마을에 들어오는 귀신들만 막아서잖아.'


마침내 대벽산의 정상에 까지 오른 길달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보자.. 정말 요 근방에는 아무것 도.. 어?'


길달은 제법 가까운 곳에 있는 세 봉우리의 산을 바라보았다.


‘저건 또 뭐야..? 꽤 강한 기운들이 여럿이나 왜 같이 모여있냐.’


그렇게 산 봉우리와 중턱을 살피며 최대한 많은 기운을 살피던 길달은 세 봉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야. 요괴들인가? 산 중턱에는 뭔가 또 두 마리가 있는데..? 허허, 정말 희한한 곳이네.'


'스으윽.'


길달이 세 봉우리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그의 뒤로 무언가 조용히 다가왔다. 하지만 서너 길은 떨어져 있어 길달이 당장 눈치채긴 힘들었다.


'스으으으윽.'


녀석은 점점 조금씩 길달의 뒤로 다가갔다. 길달은 여전히 세 봉우리의 기운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팟-'


녀석이 길달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때 길달도 이를 눈치챘다.


'휙-'


길달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녀석을 바람처럼 비껴가며 피했다.


'턱-'


'응? 여우잖아.'


'키아앙-'


'오호라. 앙칼진걸 보니 우연히 내게 달려든 게 아니었겠다?'


여우는 온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여있었고 눈빛은 등불보다 빛났으며 호리호리하나 길쭉하게 긴 몸이 제법 위압감을 주었다.


'혹시..?'


'타앗-'


길달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 여우는 다시 달려들었다.


'휙-'


길달은 왼쪽 어깨를 틀어 여우를 흘려보내는 척하며 두툼한 꼬리를 잡았다.


"요 녀석!"


'끼에엥-'


하지만 여우는 곧장 몸을 틀어 길달의 팔을 물려했다. 그렇다고 한낯 여우에게 쉽사리 당할 길달이 아니었다.


'휘휙- 탁, 꽈아악'


길달은 여우의 입을 피해 목덜미를 잡고는 도깨비 특유의 안광으로 여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우는 길달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요 녀석. 힘 좀 보게."


'콱-'


"으앗."


길달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여우가 길달의 왼손을 콱하고 물어버렸다.


깜짝 놀란 길달이 여우를 놓치자 여우는 곧장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저 녀석이.'


길달은 여우가 달려가는 방향을 보고는 오른손을 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작은 바위 하나가 움찔거리더니 붕하고 허공에 떠올랐다.


'에잇-'


길달이 손짓하자 허공에 떠 있던 바위가 쏜살같이 여우에게 날아갔다.


'탁-'


'팟-'


'어라?'


바위에 맞은 여우는 깽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질 줄 알았는데 마치 원래 없었던 것 마냥 픽하고 사라진 것이다.


'허깨비야. 구미호다. 구미호가 근처에 있다는 말인데..!'


길달은 주변을 살폈다. 지금 당장은 멀리 있는 세 봉우리의 기운들보다 근처에 있는 녀석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꾸우욱-'


길달이 양 주먹을 불끈 쥐자. 주변의 나뭇가지들과 잎새들이 파르르 하며 떨렸고 작은 바위들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와라!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감쪽같이 기운을 숨기는 걸 보니 필시 여우인데, 이 요망한 구미호,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꺄우우우우우우우-"


순간 여우의 가늘고 처량한 울음이 대벽산 꼭대기로부터 산아래 골짜기로 울려 퍼졌다.


곧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곳저곳에서 여우들이 튀어나왔다.


'요놈들 봐라. 역시 구미호였어..!"


'크아앙-'


'크아아아앙-'


길달을 노려보던 여우들은 곧장 길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격투 능한 길달이 쉽사리 당할리 없었다.


'휙- 휘휙-'


길달은 약간의 움직임으로 여우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뒤에서 한 마리가 달려들어 길달의 등짝에 달라붙었다.


'훗. 어림없지.'


'휙-'


'끼에엥-'


길달이 녀석의 등덜미를 잡고 앞으로 던져버리자 여우는 마치 싸리 인형처럼 나가떨어졌다.


"허깨비들은 그만 내보내고 그만 모습을 드러내라. 보아하니 네가 그 구미호 같은데 널 잡아가야 나도 그 미친 자랑 연을 끊어낸다.”


‘퍼퍼퍽. 퍽퍽’


‘끼아앙. 끄아아아앙.’


곧 여우 여덟 마리가 길달의 영력이 실린 주먹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후우- 이 정도로 날 막지 못한다니까? 어차피 너도 평생을 이승에서 귀신으로 살 순 없잖냐? 가자. 널 넘겨야 나도 편히 저승으로 간다고.. 어..?!"


길달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새하얀 여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명한 색, 생기 넘치며 빛나는 눈, 바로 구미호의 본체였다.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하지만 구미호는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길달이 먼저 다가오길 바라는 듯했다.


"너도 아는구나. 내가 너 잡으러 온.."


"그 자가 그렇게 무섭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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