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구미호의 질문에 길달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과거에 그렇게 당하고도 또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건가..? 결국, 이번에도 영혼이 흡수당하거나 찢길 거예요."
'뭐라는 거야.. 제길.'
길달은 비형랑에게 끔살을 당했던 수백 년 전에 떠올랐다.
"글쎄, 내가 이승에 다시 보내진 것도, 널 잡으러 온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말이 많다. 나랑 싸우기 싫으면 순순히 따라가던가."
'팟-'
순간 구미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방은 다시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해졌다.
'쓸데없는 짓을 에휴..'
'휘휘휙-'
일순간에 사방은 물론 머리 위까지 아홉 마리의 여우가 길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길달이 아니었다.
"끄아아아압!"
길달의 사자후 호령에 허깨비 여우들은 마치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멀리 날아갔고 주변 나무들은 돌풍이라도 불어닥친 마냥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홉 마리의 여우 중 단 하나, 이를 버틴 녀석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청임, 선준의 어머니였다.
"기회를 주겠다. 네가 따르는 윤대감이라는 자는 내 외할아버지였다. 그런데 그 때문에 나와 내 지아비가 죽음에 이르렀고 내 아들은 지금, 복수를 위해 자신의 외증조부 할아버지를 쫓고 있다. 윤대감은 내 조상이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홀려 죽였어. 그것도 그저 자신의 유흥을 위해..!”
길달은 청임의 말을 끝까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딱한 사정과 억울하게 죽은 이들은.. 그래 안 됐지. 그런데 그건 시대가 낳은 결과야. 어쩔 수 없다구. 무슨 일에나, 어느 시대에나 피해자는 있게 마련이야. 나도 비형랑에게 그리 억울하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
“신님이 널 다시 살려주신 것 같은데.. 옳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윤대감의 세는 너무 커졌어. 파괴력이야 이무량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혼자 다니던 이무량과는 판이 달라. 그래서 내 아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 길달, 그러니.."
"나도 내 도깨비 목숨 부지하자고 이러는 거야. 뭐, 전국의 구미호를 다 잡아오라 하셨지만, 분위기 보니 딱 널 찾는 거였네. 허허."
"마지막 기회야. 길달, 이번에는 덕을 쌓아 업을 풀어야 하지 않겠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구미호 주제에 네가 뭘 알아? 업..? 내게 업이 있었던가?"
길달은 말을 끝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청임에게 달려들었다.
'휙-'
하지만 청임 또한 날랬다. 어차피 무력이든 영력으로 길달 정도 급의 도깨비와 정면으로 붙어 이기긴 힘들었다.
"에잇!"
'휙- 휙-'
길달은 청임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양손에 불기운을 잔뜩 모아 청임이 달아난 곳에 날렸다.
'퍼펑- 화르륵-'
때는 겨울의 초입이라 불길은 삽시간에 번졌다.
'휙- 휘휘휙-'
길달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청임이 길달의 뒤로 달려와 등을 할퀴었다.
"크앗.. 이 요망한 여우 놈. 잡으면 가만 안 둔다."
길달은 뒤를 보지도 않고 돌려차기를 날렸다. 이에 한번 더 기회를 보며 달려들던 청임은 길달은 오른발에 정통으로 맞고는 한 길도 넘게 날아가 쓰러져버렸다.
‘퍼어억-‘
"끄아앗.."
쓰러진 청임은 어느새 사람 형태로 변했다. 비록 구미호가 되었지만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오호라, 윤대감이 외증손녀를 왜 이렇게 찾나 했더니 보통 구미호는 아니구만."
길달은 쓰러져있는 청임에게 다가갔다. 청임은 길달의 영력이 실린 발차기를 맞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불길은 더 번져갔다. 추운 겨울 빠짝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은 마치 땔감처럼 불이 붙어 삽시간에 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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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건 웬 연기야?"
이무량이 하도 말을 거는 바람에 잠을 못 자던 겸세가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오 리 정도 떨어져 있는 대벽산 꼭대기에 큰 불이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씨, 저거 여기까지 옮겨 붙으면 위험한데. 다람쥐랑 담비들도 월동 준비를 다 끝냈을 텐데 난리났겠구만..'
겸세는 고민했다. 불길을 보아하니 제법 커지고 있었고 사실, 성주산까지는 옮겨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대벽산과 주변 산들의 동물들과 사람들이 염려되었다.
'고것들 도토리도 다 모아 뒀을 텐데.'
'야, 겸세, 너 불 끄러 가게?'
'그래 네 덕에 산불 끄게 생겼네.'
'거봐. 내가 널 귀찮게 하는데도 다 하늘의 이치가..'
'그만 쫌. 득츠르.'
'히히. 얼른 가봐. 불 꺼야지.'
'으이구. 진짜.'
겸세는 겉옷을 챙겨 입고는 대벽산 쪽을 향해 슬쩍 뛰어올랐다.
'휘이이이익-'
성주산 기슭 집에서 바람처럼 날아오른 겸세는 세 봉우리를 지나다 여러 기운들이 몰려있는 걸 느끼고 우측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뭐 하는 곳인데 저런 사람들이 다 모여있지? 희한하네.'
하지만 겸세는 관심 없다는 듯 대벽산 꼭대기까지 그대로 날아올랐다.
- 같은 시각. 대무당 할멈의 집.
'어..?'
익숙한 기운을 느낀 정법이 건넌방 문을 박차고 나왔다. 덩달아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대무당 할멈도 튀어나왔다.
"정법아, 너도 느꼈냐?"
"누이도?"
"응."
"설마 아니겠지? 그 녀석이라면 그때 궤에 넣어서 영계로 보냈잖아?"
"그렇지. 해치가 불기운은 다 흡수했고요."
"그런데 이 기운은 뭐냐? 왜 이무량 같지?"
"글쎄.. 요?"
정법은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대악귀전을 통해 겨우 이무량을 사로잡고 봉인한 뒤 며칠 안 가 영계로 들어가기 직전, 정법은 할멈이 모르게 이무량을 새타니의 영 안에 심었던 것이다.
'경허(鏡虛, 19세기 조선의 승려)가 지국천(持國天, 사천왕 중 하나로 안민(安民)의 신이며 국토를 수호하고 권선징악을 중시함)의 부탁이라고 했으니..'
"이거 이거, 확인해 봐야겠다. 어..?!"
"누이, 이 야밤에 어딜요. 그냥 내일 아침에.."
"어! 저기 불 아니냐? 야, 대벽산 꼭대기에 불이야. "
"응? 진짜네?!"
"당장 가봐야겠다. 너도 갈 거지?"
"아.. 누이, 지금은 자다 나와서 피곤한데.."
정법은 사실 마음이 쫄렸다. 이무량과의 대악귀전 이후 대무당 할멈은 이무량이 영계에 갇혀있다고 철석같이 믿어왔기 때문이다.
‘아 씨.. 누이가 알면 안 되는데. 그나저나 진짜 이무량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럼 애들도 깨울까요?"
"깨우긴. 둘이 가서 확인이나 하고 오자. 불도 끌 겸."
“...응, 누이."
"뭐야? 목소리가 영 껄끄럽다? 넌 안 궁금해?"
"아, 아니..! 엄청 궁금해. 갑시다요,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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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이거 불이 너무 빨리 번지는데?'
'야, 겸세, 내가 오줌으로 불 끄게 해 줄까? 히히.'
'좀 닥쳐. 말도 안 되는 소릴.. 어, 혹시 너 불 끄는 능력은 없어?'
'있지.'
'뭔데? 빨리 알려줘 봐.'
겸세는 대벽산의 북쪽 공중에 떠서 불어나는 불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먼저 바지 고름을 풀고..'
'응. 풀고..?'
'바지를 내린 뒤..'
'야! 너 이 미친놈이..!'
'으히히히히히히. 아, 재밌어.'
'아 빨리 좀 알려달라고 불이 더 커지잖아.'
'키키키. 그래, 그래. 아 근데 너도 할 수 있어. 지금 내 능력이 니 능력인데.'
'그거야 알지. 그런데 불은 안 꺼봤으니.'
'걍. 주먹 꽉 쥐고 평소대로 기운을 모아서 바닥에 내리쳐.'
'그래?'
'응.'
겸세는 이무량이 시킨 대로 오른 주먹에 기운을 잔뜩 모았다.
"이야- 압!"
'휘이익-'
'퍼어어어어어어억-'
'우와아아아아아앙-'
겸세의 기운이 불길의 중앙에 닿자마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삽시간에 불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됐다!"
하지만 그 충격파 때문에 청임에게 다가가던 길달이 뒤로 훅하고 날아가고 말았다.
"으헉-"
'쿠당탕-'
'이건.. 뭐야? 구미호 짓인가..?'
길달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는 청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아닌데.. 뭐야.. 산불도 꺼졌잖아..?!'
길달은 주변을 살펴보다 공중에 무언가가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저건 뭐야..? 사람 형상인데.. 사람이 아닌가..?'
길달은 자리에 일어서서 겸세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사람인데 사람의 기운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