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라?!'
공중에 떠 있던 자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자 길달은 얼른 몸을 숨겼다.
'보통 인간은 아니야. 혹시..?'
"여보시오? 저기.. 괜찮소?"
겸세는 청임 근처로 가 우선 청임을 불러서 깨워보기로 했다. 산불이 나던 곳의 근처에 있었기에 산불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젊은 여자가 밤중에 산 꼭대기에 와 있어?'
"저기요..?!"
하지만 겸세가 아무리 불러도 청임은 깨어나지 않았다.
'가봐. 흔들어 깨워봐.'
겸세가 고민하는 사이 무량이 또 끼어들었다.
'잠깐!!!'
'아 또 왜? 흔들어 깨우라며?'
'쟤. 구미호야.'
'응? 저 여자가?'
'응. 딱 보면 알지. 얼마 안 됐네. 이십 년 좀 넘게 묵었어. 구미호로 따지면 애기지, 애기.'
'진짜? 아니 구미호가 왜? 왜 산불이 난 곳에 쓰러져있어?'
그러자 무량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어쨌든 겸세는 청임을 흔들어 깨워보기로 했다.
"저기.. 저기요."
그러자 청임이 움찔하며 몸을 조금 움직였다. 가까이서 청임의 얼굴을 확인한 겸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막일을 하며 천하를 돌아봤지만 이런 절세의 미녀를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허억.. 읍.’
‘크크크. 구미호인데도 이쁘니까 좋냐?’
‘닥쳐, 좀.’
"저.. 저기 이제 겨울이라 날도 추운데..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어흠흠."
겸세는 낯선 여인의 몸을 흔들어 깨우기가 민망해 겨우 팔을 붙들고 흔들어보았다.
그리고 길달이 이 장면을 큰 바위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진.. 진짜였어..?! 이.. 이무량이.. 돌아온 거야..?!'
청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를 죽일 듯이 괴롭히던 길달은 사라지고 웬 낯선 사내가 보였다.
'휘리릭-'
청임은 정신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계 자세를 취했다.
"누, 누구요."
"어.. 아아! 전,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바, 방금 산불을 끄고.."
청임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달이 냈던 산불이 어느새 다 꺼져있었다.
"도깨비는 어디로 갔죠?"
청임의 한 마디에 무량이 겸세에게 말했다.
‘어..? 야! 저기 바위 뒤에 뭔가 있다 했더니. 가봐!'
겸세는 무량의 말에 얼른 뒤편 바위로 뛰어갔다. 하지만 길달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헉헉.. 이.. 이런, 이무량이다. 이무량이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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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누이, 그냥 돌아갑시다. 저기 불도 꺼졌잖소?"
대벽산의 중턱까지 오자 정법이 할멈을 보챘다. 사실, 몸이 힘든 것보다 정말 그 수상한 자가 이무량이 맞다면 그게 더 큰 일이었기에 이무량이 아니길 바랐던 것이다.
"너도 봤잖아? 저 수상한 자가 공중에서 산불을 한방에 껐어. 이거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불을 끄고 갔겠죠. 산 꼭대기까지 가봤자 아무도 없을 텐데요."
"아구, 힘들다. 말 그만시켜! 네 축지법으로 좀 빨리 가나 싶었더니 너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만. 어째 반 길도 못 줄이냐."
"아따, 우리 누이, 자다 나온 사람한테 바라는 것도 많소. 헥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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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임은 비로소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
"그럼 어찌 알고 여기를..?"
"아, 산불이 났길래 끄러 왔지요.."
"움직일 수는 있겠소?"
“네.."
"근데.. 그쪽을 보아하니 구미호인데.. 어찌 민가가 아닌 산 꼭대기에 있는 거죠..? 다른 뜻은 없고 그저 궁금해서요. 혹시 도깨비의 공격을 받은 건가요."
겸세의 물음에 청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한하군요. 도깨비가 이유 없이 구미호를 공격할 리가 없을 텐데요."
청임은 고개를 들어 잠시 겸세를 살폈다. 육 척의 키에 덩치가 큰 젊은 사내.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중인도 못돼 보였다.
"그쪽도 사연이 많은가 보네요. 그 안에 요상한 자가 들어앉아있는 걸 보니."
"하하하. 맞습니다."
청임의 말에 겸세가 호탕하게 웃었다.
'야이씨, 내가 요상한 자야?! 어디 흔한 구미호 주제에.. 이무량을 몰라보고.’
'득츠르고. 확.'
"헉헉. 헥헥."
"다 왔다!"
겸세와 청임이 얘기하는 동안 반대편으로 할멈과 정법이 대벽산의 꼭대기로 올라왔다.
"어라..!"
"아니..?!"
서로는 서로에 대한 기운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정말 우연히 마주치고 말았다. 그도 그런 게 그 누구도 기운을 내뿜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정법아.. 혹시 저 사람이..?"
정법은 할멈이 가리킨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 밤중이었지만 달이 밝아 지근거리에서는 충분히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인가.. 그 아이가 저렇게 장성한 건가.. 혹시 나쁜자는 아니겠지? 저 덩치에 이무량의 기운까지 가졌다면.. 하, 골치 아픈데. 지국천님도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
"야! 정법아, 귀가 먹었냐?"
정법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할멈이 다시 재촉했다.
조금 당황스러운 건 겸세와 청임도 마찬가지였다.
'저것들은 뭐야. 이 밤에, 이 산 꼭대기에 무슨..'
넷은 서로 경계하느라 마치 얼어붙은 듯 한 동안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할멈이 용기를 내서 겸세 쪽으로 다가갔다.
“어.. 우리는 산불이 났길래 불을 끄러 왔소만 이미 보아하니 그쪽이 먼저.."
'응..?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운은..'
할멈의 말을 듣고 있던 겸세와 달리 이무량은 뭔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천하의 이무량에 대적했던, 급기야 이무량을 쓰러뜨리고 잠재우는데 일조했던 대무당의 기운. 하늘 아래 무서울 게 없이 온갖 극악무도한 짓을 자행했던 이무량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포를 안겨준 인물들. 대무당 할멈, 정법, 호령, 자겸, 태례 말이다.
그중 바로, 대무당 할멈과 정법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으아아.. 야야, 얼른 가. 얼른얼른.'
'가긴 어딜 가? 왜?'
'저저저.. 저 사람들 피해야 해.'
'누구? 이 할머니랑 저어기 저 아저씨? 왜? 누군데 그래?'
'얼른! 그냥 얼른 날아서 도망가! 나 잡히면 네 능력의 구 할도 사라진다고..!!!'
할멈은 겸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밤인 데다가 노안이 온 지도 오래였지만 분명 그 자의 안에는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얼르으으으으으으으은..!!!!!!!!!'
'참나..'
'휙-'
겸세는 할멈이 다시 말을 걸기 전에 바람처럼 날아오르더니 번쩍하고는 번개처럼 사라졌다.
'아뿔싸..!!'
할멈은 그 순간 그 불길하고 불쾌한 기운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지난 오십여 년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오싹하게 강력한 기운, 바로..
'이.. 이, 이무량..?!'
대악 이무량이었다.
"야.. 야야.. 야아아!!! 정법, 너도 봤어? 너도 느꼈지?"
"응..? 뭐.. 뭘 말이야?"
정법 역시 겸세 안에 이무량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젠장.. 제길. 그냥 조용히 숨어 지내지. 왜 하필 산불을 끄러 나와선..'
"뭐긴! 이무량.. 이무량이야!"
할멈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정법은 끝까지 모른척했다.
"어떡한다.. 어쩌지.. 우리 둘 이선 이무량을 상대할 수 없어. 게다가 이젠 둘 다 나이도 들었고."
"아, 이 누이 또 혼자 먼저 나가신다. 거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수. 아직은.."
"그럼 저 놈이 왜 도망갔겠냐? 게다가 사람이 저렇게 공중 부양해서 번개같이 달아날 수 있어?"
"누이, 저게 만약 이무량이었음. 지금 당장 우리를 공격했겠지. 안 그래? 이무량이 맞다면 우리에게 복수하러 오지 않겠냐고?"
정법은 흥분한 할멈을 우선 진정시켜야 했다.
둘이 흥분해 있는 사이 청임은 몰래 사라졌다. 대무당과 법사 사이에 껴서 좋을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윤대감 악귀 놈 때문에 골치 아픈데.. 누이, 일단 내려갑시다. 저게 만약 이무량이 맞다면 우릴 찾아 나설 거요. 복수하러. 나라면 그럴 테니까."
할멈은 여전히 뛰는 심장을 진정할 수 없었다. 이무량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라면 오십 년 전의 피나는 노력과 친구들의 희생이 물거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무량을 다시 제압하기엔 자신도 너무 늙었고 무엇보다 호령, 자겸, 태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