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아니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군요."
"네.. 동네를 조금 더 돌아봅시다."
근중과 은진이 산기슭의 마을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동안 장태와 물포는 북한산 깊숙이 들어갔다.
"물포야, 뭐 먹을 거 챙겨둔 거 없냐?"
"아, 형님, 배고프슈? 그러게 아까 아침에 나처럼 세 그릇은 먹고 왔어야죠. 히히."
"그건 니가 워낙 많이 먹는 거고. 됐고, 엿이나 뭐 떡 챙겨 온 거 없어? 곶감이나?"
물포가 장태를 돌아보며 씩 하고 웃어 보였다.
"아따, 형님 진짜 귀신이오. 어찌 내가 챙겨 온 걸 그대로 읊으시나? 으히히."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좀 꺼내봐라."
물포가 근처 바위에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풀었다. 물포의 보따리 속에는 곶감과 떡은 물론 약과까지 한 상차림이 나왔다.
“으어어.. 약과가 있었어?"
"어유, 형님. 아까 밥 먹고 그냥 나가시더니. 흐흐. 그 용상인가 하는 형님 집이 정말 부자인가 봐요. 이런 약과를 그냥 내어올 정도니."
"이야아, 잔칫상이다. 잔칫상. 약과를 다 먹네."
장태와 물포는 떡과 약과를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맛있게 먹다 보니 멀리서 누군가 둘을 몰래 염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르륵.'
'스르륵. 샥샥.'
"어우, 이제 배부르다야. 살다 보니 이런 주전부리로 배를 채우는 날도 다 있네."
장태가 뒤로 누우며 말했다. 물포 역시 으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반대편으로 누웠다.
'사사사사삭-'
"물포야, 들었지?"
장태가 누운 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입죠, 형님. 흐흐.”
물포 역시 자신들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장태와 물포는 누워서 쉬는 척을 하며 바지춤에 있는 단검을 쥐었다.
'파앗-'
순간 바위 옆 풀숲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이에 물포가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
'휙- 휙-'
물포의 빠른 반응에 놀란 녀석은 곧장 장검을 휘둘렀다.
‘휙, 휘이익.'
'어쭈, 이게 미쳤나. 날 베려고 했겠다?'
물포는 녀석의 검을 가볍게 피한 뒤 곧바로 손목을 힘껏 움켜쥐어 꺾더니, 단검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살짝 베며 제압했다.
"크아악."
동시에 장태는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산 위쪽에서 누군가 쏜 화살이 날아왔다.
'핑-'
'파악-'
장태는 이미 이를 눈치채고 날아오는 화살을 단검으로 쳐 반으로 꺾어버렸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하지만 녀석은 장태의 검술에 놀랐는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야 이 새끼, 너 누구야. 너네들 왜 우리를 기습했냐?"
"니.. 니놈들이 먼저 우리의 구역에 들어왔잖.. 냐."
"구역?! 이 산이 너네 구역이냐? 이게 니 거야??"
"수병패를 모르냐? 지방에서 왔구만. 낄낄."
녀석은 잡힌 주제에 시건방을 떨었다. 가뜩이나 욱하는 성질인 물포가 냅다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날렸다.
'퍼억.'
"크어억. 크흡."
"이게 돌았나? 우리가 누군지 알고. 수병패? 무슨 그지 같은 이름이냐?"
하지만 녀석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계속해서 지껄였다.
"야, 너네들 곧 다 디졌어. 아까 달아난 동지가 곧 수십 명을 끌고 올 거다."
그러자 물포와 장태가 같잖다는 듯 웃었다.
"크하하하하. 근래 들은 것 중 가장 웃긴 말이네."
"너 척결패라고 모르냐?"
“척결.. 패?"
"아 이 새끼, 나이가 어려서 못 들었나?"
"전국 산적을 통일한 근중 형님 이름은 들어봤지?"
"근중.. 어.. 응?! 근중?!"
"그래 이 멍청한 놈아."
순식간에 녀석의 얼굴은 흙빛이 되더니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짜.. 요? 진짜 근중이 있는.."
"근중님, 이 자식아."
"아.. 근중님이 있는..?"
장태와 물포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을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 저희는 그저 한산을 지키는 그.. 그.. 사.. 산적."
녀석은 급기야 몸을 떨었다. 뭔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됐고. 너 혹시 이 근방에 있는 아편굴이 어딨는지 아냐?"
그러자 녀석이 떨군 고개를 들더니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아편굴은 왜요..?"
"아아, 걱정 마. 너네 잡으러 온 거 아냐. 아편굴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아아! 혹시 산비초님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녀석의 말에 장태와 물포는 서로 마주 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오호라. 어쩌면 다른 것까지 해결할 수 있겠는데?'
"그래. 맞다. 산비초와 협상할 게 있는데 녀석이 위치를 안 알려줘서 말이지."
"아아.. 그, 근데 산비초님은 여기에 이제 거의 안 오십니다. 오히려 한양 중심가에 있는 박대감님 집으로 가시는 게 빠를 텐데요."
그때였다. 산 위에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수병패의 산적들이 소리를 지르며 내려왔다.
"이야아아아..!!"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녀석이 곧장 일어서더니 양팔을 내저으며 그들을 말렸다.
"철식아! 우리가 너 구하러 왔.."
"가! 그냥 돌아가!!"
녀석은 연신 팔을 내저었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장태와 물포의 앞까지 내달려왔다. 그래도 의리는 있는 놈들이었다.
곧 녀석이 올라가 무리들에게 다가갔다.
"야야. 그냥 다시 올라가, 올라가."
하지만 녀석을 구하러 온 수병패 놈들은 철식이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구는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래? 우리 너 구하러 이렇게.."
"척결패야. 척결.."
"응..?"
"척결패 인마, 근중이 있는 척결패."
"뭐..?!"
철식을 구하러 온 녀석들 역시 근중의 이름을 듣고는 모두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럼, 그, 근중이 누구야..? 저기 키 크고 덩치 큰 사람? 아님 저 보통 키인데 덩치가 산만한 사람??"
"야이 새끼들아, 다 들린다. 근중 형님은 다른데 계시다. 일로 와봐."
철식을 비롯한 나머지 산적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왔다.
녀석들이 전의를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다. 현존하는 산적들 중 세가 가장 크고 강하며 전국의 산적을 한 번 통일한 척결패를 눈앞에서 마주하니 오금이 저릴 법도 했다.
"너네가 관리하는 아편굴은 어디냐? 그나저나 너희들 혹시 아편 공급을 도와주는 거냐? 우리 형님이 그거 알면 몹시 싫어하실 텐데."
"히엑.."
수병패 들는 급기야 어쩔 줄을 몰라 벌벌 떨기 시작하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저, 저희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그래. 됐고. 아편굴로 가보자."
"...네? 아, 아편굴은 왜 그러시는지..?"
"찾아볼 사람이 있다. 너네 안 괴롭힐 테니까 빨리 안내해."
"아.. 아! 네네..!"
장태와 근중은 수병패를 따라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을 타고 올라가는 길이 아닌 산속 깊은 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사람이 자주 지나다닌 길이 나왔고 민가로 보이는 집이 몇 개 보였다.
"다, 다 왔습니다."
멀리서 평범한 민가로 보였던 곳은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었다. 집 주변은 관리가 안 돼 잡초가 무성했고 낡아빠져 기울어진 대문짝은 물론 방마다 붙은 문도 창호지가 떨어지고 너덜 해져 흡사 귀신의 집 같았다.
"여기에 사는 거냐?"
"네. 그, 그런데 여긴 그냥 민가고요. 보통 이 시간에 사람들은 저기 저 큰 집에.."
"응..? 어디?"
"저기, 동네 맨 끝에 큰집이 있습니다요."
장태와 물포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한 번 어루만졌다. 호랑이 굴에 왔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 졸개들은 척결패라는 말 한마디에 바짝 쫄아있지만 큰집 안에는 더 많은 산적들과 산적의 두목도 있을 터다.
제아무리 척결패에서 왔다 해도 근중도 없는 상황에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그것도 부하들이 보는 앞이니, 두목은 오히려 둘을 제압하려 했으면 했지 순순 협조할 리는 없었다.
"물포야, 마음 단단히 먹어라."
"네, 형님. 아 근데 근중 형님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처리하자. 할 수 있잖아?"
장태의 물음에 물포는 신이라도 난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간만에 한 번 놀아볼까요. 히히."
'끼이이이익.'
곧 큰 집의 문이 열렸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보단 커다란 창고 같은 느낌이었다.
"으에엑. 이게 뭐야..?"
수병패 졸개들이 문을 열자 엄청나게 큰 공간이 나왔다. 문안 쪽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누워있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동공의 초점이 나가있고 귀신 들린 사람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없구나 여긴."
"아니 그런데 이 인간들은 그럼 어떻게 아편을 하는 거요? 돈은 어디서 나서? 제대로 일도 못할 텐데.."
그러자 철식이라고 불리는 수병패 졸개가 대답했다.
"크하하. 그야 간단하지요. 자, 여기에 누워있는 백명도 넘는 사람들의 행색을 보시오."
녀석의 말에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비록 낡고 더러워진 옷이지만 다들 양반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뭐지..?'
"밥 먹을 돈도 없는 자들이 아편 하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자들은 최소 중인 이상이고 대부분 양반집 자제들 입지요."
"뭐요?!"
"모르셨습니까? 척결패 분들이 이리 순진하시다니. 이 아편굴은 아편 때문에 망가진 자제들이 마지막으로 넘어오는 곳입니다. 크흐흐. 당연히 양반가에서는 큰돈을 내고 이들을 여기에 맡겼죠. 돈은 매달 들어옵니다. 아편도 사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