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영계에 있는 북방의 궤가 떠오른 할멈은 정법에게 다가갔다.
“정법아, 너 북방에 있는 궤, 그거 닫아 놓고 나온 거지?”
“북방의 궤? 갑자기 그건 왜 그러우?”
“아니, 그럴 일은 거의 없겠다만 서도, 저 윤대감이라는 작자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별 목적 없이 죽이는 게 도통 이해가 안 되잖아. 단순히 흡수만 한다고 저승으로 안 가는 것도 아닐 테고 천년을 버텨도 지옥에 갈 텐데 그럼 앞으로 수천 년 이상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테니.. 혹시 그걸 피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에이, 누이. 그건 말도 안 되오. 그 삼방악신들이 윤대감을 받아줄 리도 없고 또 신급은 아무나 되나? 그것들도 나중에 다 옥황님한테 벌 받을 거요. 천년이 걸리든, 만년이 걸리든, 시간문제지.”
“그래, 적어도 수천 년에서 만년은 버티겠지. 아니, 그래서 궤는 닫았냐고?!”
“아 닫았지. 이 누이 또 급한 성격 나오신다. 내가 전에 분명히 귀로 구하러 들어갈 때 닫아놓고 온다고.. 어..?”
“안 닫았어? 안 닫은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수년 전에 흑렴(북방악신)이 저승으로 끌려간 뒤로 궤를 다시 닫을 거라 생각했거든. 진짜! 그런데 그때 귀로 일이 터지면서 내가 또 급하게 나작 주막으로 가게 됐잖아.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거 보니까 제대로 안 닫았네.”
“아니 어차피 지금 흑렴도 없으니까 굳이 꽁꽁 싸매서 묶어둘 필요는 없잖아..?”
“아오오, 이 멍충아. 내가 어찌 저 멍충이랑 같이 축귀를 해왔지.”
“아니 내 말이 맞잖아?!”
“그렇다면 나머지 삼방악신들에겐 기회인 거야. 균형이 무너졌잖아, 균형이. 악신들이 이승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저승에서도 신경을 안 써서 그런 건데, 흑렴이 잡혀간 뒤 균형이 무너졌으니 나머지 세 악신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어?”
“그렇.. 겠지?”
“그럼, 당연히 새로운 북방악신이 필요하겠지? 균형이 무너졌으니까. 안 그럼 또 누가 잡혀갈지도 모르고.”
“어, 뭐야. 그럼 당장 북방악신의 대체자가 필요한 거겠네..”
“그래 이것아. 저 윤대감이라는 작자가 어쩌면.. 영계에 있는 악신이 돼서 이승에서 영원히 누리고 싶은 걸 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선준은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저승에서는 왜 사방악신들을 제거하지 않는 겁니까? 흑렴인가하는 그놈을 잡아갈 때 모조리 다 잡아갔어야지요.”
할멈은 선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건 나도 몰라. 이승에 악령들과 악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조차도 하늘의 이치겠지. 사람들이 생을 살아가며 넘어야 할 고난 같은 건 스스로 이겨내야 또 덕이 쌓이니까.”
“하늘의 뜻이요..? 하룻밤사이에 가족들을 모두 도륙하고 죄 없는 자들을 무참히 짓밟는 저런 악귀들이 날뛰도록 두는 것이 하늘의 이치란 말입니까..?”
선준의 말에 할멈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세상의 이치, 균형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업이 있으면 덕이 있고, 덕은 쌓을 그릇이 되는 자만이 쌓을 수 있는 일종의 시험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일까? 누이, 진짜 윤대감이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몰라. 그냥 내 추측인데. 저렇게까지 세력에 집착하는 걸 보면 신급으로 가려는 목적이 아니고서는. 흠.”
“그럼 더더욱 이번에 잡아서 족치고 저승으로 보내야겠네..?”
“그렇지. 그래도 이무량도 있고 선준의 일령도 있으니까. 모든 영력을 합쳐서 끝장내야 해.”
“누이 그런데 이쯤 되면 태고(太古) 신도 좀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우?”
“그건 우리가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야. 괜한 소리 했다가 또 혼나지 말고.”
“아니 사방악신의 균형이 무너졌는데..”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이것아. 넌 법사나 됐으면서 아직도 그걸 모르냐.”
“누이, 내가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 답답해서 그러지.”
그때였다. 박대감의 안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박대감인가요?”
“어, 길달과 박대감입니다!”
“저 도깨비가 박대감을 북악산으로 유인한 다이거지?”
“네, 맞습니다.”
—————
“헉헉, 헥헥. 야, 너네들은 지치지도 않냐?”
포졸들을 피해 도망가던 산비초는 그만 막다른 골목에서 길이 막혔다.
“조용히 하고 손을 뒤로 해라, 이 탈옥범아.”
“같이 있던 포도부장님은 어찌 되었냐?”
산비초는 포졸들을 살펴보았다. 총 여섯 명에 모두 창을 들었지만 산비초에게는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얼른 대답해.”
“아 이 씨, 그 사람 너네 상관이잖아. 진짜 상관을 또 가둘 거야?”
“우, 우리도 시키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다. 포도부장님이 얼마나 좋은..”
‘탁, 휘이익.’
산비초는 포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창머리를 잡더니 그대로 쑥 잡아당겼다.
“으아아..”
그렇게 순식간에 포졸 하나의 창을 빼앗은 뒤 포졸의 뒷목을 쥐고 창을 목에 누른 채 다른 포졸들을 보며 겁박했다.
“자, 이 새끼랑 다 같이 죽을래 아니면 날 그냥 보내줄래?”
“이 자식이..!”
“어허! 어딜.”
‘꾸욱.’
다른 포졸들이 덤비려 하자 산비초는 창으로 포졸의 목에 더 세게 눌렀다. 어찌나 세게 눌렀던지 목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렀다.
“내가 힘을 더 주면 이놈은 바로 뒤진다. 그리고? 그 담엔 너네들 차례야.”
피를 본 포졸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산비초는 장정 오십이 덤벼도 이기기 힘들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 녀석이 움직이려 하자 붙들려있던 포졸이 소리쳤다.
“야야, 오, 오지 마, 이놈은 진짜 날 죽일 거야. 우리 모두 죽인다고..!”
“깔깔깔. 이 자식 보기보다 똑똑하네. 들었지? 너네들 다 창 버려.”
포졸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버려. 버려! 어차피 우린 못 잡아.. 일단 살아야지..!”
붙들린 포졸이 소리치자 모두들 겁먹은 채 창을 내려놓았다.
‘툭. 투둑. 툭툭.’
“옳지. 이제 다들 두 손 들고 꿇어앉아!”
포졸들은 모두 긴장한 채 무릎을 꿇었다.
“너네들, 오늘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나, 산비초야. 내 얘기 들어봤지?”
그러자 포졸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나한테 걸리면 다 죽은 목숨인데, 뭐 이젠 나도 의미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좀 착하게 살아보려고. 히히.”
산비초는 여전히 포졸 하나의 목을 조른 채 골목을 돌아 입구로 뒷걸음질 쳐 갔다.
‘휘익.’
‘아악, 쿠당탕.’
산비초는 포졸을 앞으로 밀어 던지자마자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의 발걸음은 곧장 박대감네로 향했다.
길달과 의논한 대로 윤대감을 언제 배신할 것인지, 정만과 같이 탈옥하면서 윤대감을 치는 세력에 붙을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이 박대감의 집에 도착한 뒤 분위기를 살펴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헉헉, 젠장 입구엔 이미 군사들이 너무 많은데?”
산비초는 망설였다. 어차피 윤대감은 이제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이전처럼 박대감의 집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었다.
‘일단 여기서 내부 분위기라도..’
산비초는 비교적 경비가 허술한 동쪽 담 끝자락의 모퉁이로 올라갔다. 큰 나무가 많아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멀리 내다보기에도 좋았다.
멀리 박대감과 길달이 보였다. 길달이 앞장서서 북악산 방향으로 난 북문으로 향하는 걸 보니 윤대감을 산으로 데리고 가려는 모양새였다.
“조정에서 군사들을 여기로 더 보냈다고? 어떻게 한 거냐?”
박대감은 길달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괴인들이 나타나서 대감님을 해치고 뒤를 캐내어 결국 조정까지 역으로 공격하여 임금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지요.”
“그 말에 넘어와?”
“그럼요. 지금 시대가 어느 때입니까. 워낙 어지러운 정세에 헛소문도 많고 흉흉할 때니 수상한 낌새를 보인 자들은 무조건 잡아들이는 중 아닙니까.”
“그래, 그럼 군사들은 산으로 다 모여들 테니 그때 다 죽이면 되고, 길달이 넌 영력자들을 좀 끌고 와라. 사실, 걔네들이 제일 큰 먹을거리 아니냐. 크하하하하.”
“이미 저기 언덕에 모두 모아뒀습니다.”
“이야, 너 참 일 잘하는구나. 내가 그 자리로 가면 너도 꼭 챙기마.”
박대감은 길달을 향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먼저 말을 타고 도망가십시오. 북악산 입구입니다.”
“오냐. 아, 잠깐. 일단 우리 집에 모인 군사와 포졸들도 좀 이용해야지.”
박대감은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손을 들어 주문을 욌다. 순간 집 마당에 있던 수백의 군사와 포졸들의 눈빛이 바뀌더니 두리번거리면 무언가 찾기 시작했다.
‘젠장, 이건 예상치 못한 건데..’
길달이 당황스러움을 숨긴 채 돌아선 동안 박대감은 곧 무인 셋을 앞뒤 호위무사로 붙인 채 북문을 향해 빠르게 빠져나갔다.
같은 시간 산비초는 동쪽 담벼락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길달이 놈이 날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씨, 진짜 이거 누굴 제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곧 길달이 할멈 일행에게 달려와 상황을 설명했다. 군사와 포졸들이 돌변하여 공격할 수 있으니 산등성이를 타고 오라는 말이었다.
“윤대감 놈이 술수를 쓰고 간 거라고? 젠장. 귀찮게 되었네.”
“네. 그럼 우리는 바로 이대로 윤대감을 쫓아가면 될까요?”
겸세가 물었다.
“네. 대신 산등성이를 타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길을 따라가면 병사, 포졸들과 동선이 겹치니까요.”
그때 갑자기 할멈이 나섰다.
“도깨비 양반. 저 아시죠?”
그러자 길달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알다마다요. 한 시대를 주름잡은 무당인데, 모를까요.”
“이미 듣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리 돕는 이유는 뭐죠? 아아, 오해는 마십시오. 내 도깨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괜찮소. 나 역시 인간에게 한 번 크게 당했던지라 두 번 다시는 인간과 엮이지 않고 그냥 저승으로 가길 바랐는데, 나참. 그곳에서 인간들을 도우라고 날 다시 보냈으니 어쩔 수가 있나. 아마도 덕이 부족했나 보죠.”
“그럼 하나만 더 묻겠소.”
“네.”
길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혹시 윤대감이 삼방악신들과 교류했소? 뭐 길달 양반은 모를 수 도 있지만.”
“북방의 궤 말하는 거요?”
척하면 척이었다. 길달은 단번에 할멈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역시 아시는군요. 지금 영계의 균형이 흔들려 어지럽지 않습니까.”
“흑렴이 잡혀가서 그렇죠. 음.. 백화(남방의 궤에 갇힌 악신)가 다른 두 악신과 함께 고심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윤대감이 북방의 궤를 노리는 게 맞나요? 사방악신중 하나가 되려고 저리 발버둥 치는 게 맞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