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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Dec 17. 2019

식욕은 내 안의 괴물이 되었다

괴물이 사는 나라

<나의 폭식증에 대한 이야기> #10



괴물이 있다. 회색의 보들보들 털이 통통한 몸을 감싸고 있는 괴물이다. 얌전한 성격의 괴물은 대부분의 시간을 숲 한편의 동굴에서 보낸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나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낸다. 숲은 평화롭다. 배가 고픈 괴물은 동굴 근처의 과실을 따 먹는다. 숲의 동물들이 다 먹어도 남을 만큼 열매는 풍족하다. 냇가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나무에는 사계절 다른 맛의 열매들이 열린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숲에 기근이 찾아왔다. 차츰차츰 줄어든 과일이 걱정되었지만 기근이 곧 지나갈 거라고,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괴물은 생각했다. 숲은 괜찮았다. 그러나 기근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냇물 수위는 눈에 띄게  줄었고, 가지가 앙상해진 나무의 열매는 맺히기도 전에 썩어 들어갔다. 괴물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나마의 열매들을 따서 동굴에 저장했다. 배가 고플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며 기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 과일을 먹을 때까지도 기근은 끝나지 않았다. 괴물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털은 푸석푸석해지고 통통하던 배는 홀쭉해졌다. 괴물은 포악해지기로 결심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동물들의 음식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더 무서워 보이기 위해 나뭇가지로 뿔을 만들고 열매를 찾기 위해 눈은 희번덕 거렸다. 숲은 점점 메말라 갔고 괴물은 점점 더 포악해졌다. 더 이상 약탈할 음식조차 없었다. 괴물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기근이 사라졌다. 냇가에는 차츰 물이 불어났고 나무에는 열매들이 하나씩 맺히기 시작했다. 괴물은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다른 동물들이 먹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괴물은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를 성이 찰 때까지 먹었다. 설익은 열매에 배탈이 나기도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또 언제 기근이 올지 모르기에.



숲의 다른 동물들은 괴물을 피해 다른 숲으로 이동했다. 먹을 것이 없는 숲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괴물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한 나무에서 열매를 다 먹어치운 괴물은 다른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은 너무 괴로웠다. 괴물은 급기야 나무의 이파리를 먹어치우더니 나무껍질까지 갉아먹었다. 괴물은 너무너무 무서웠다. 또 기근이 올까 봐. 숲에는 이제 괴물밖에 없었다.






괴물은 내 식욕이다. 다이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식단 조절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 내 식욕이 괴물 같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내 안에 있는 숲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던 식욕이 다른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나마저 없애버렸다. 괴물이 내가 되었다. 나는 식욕 그 자체였다.



의류매장에서의 2달간의 알바가 끝난 후 내 체중은 가장 많이 나갔을 때에 비해 8 킬로그램이 줄어 있었다. 동시에 나의 정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먹을 것에 집착했다. 단순히 식탐이 강해진 것을 넘어 음식이라는 것 자체가 내 온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루의 반은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 남은 반은 먹은 것에 대한 후회로 채워졌다. 음식에 중독된 것이다.



나의 식욕은 괴물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다이어트를 위해 줄였던 적은 양의 음식은 나의 식욕을 채워주지 못했고 음식은 계속해서 식욕을 자극했다. 끊임없이. 온종일 배가 고팠다. 비워져 있는 위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고 예민해진 신경의 화살은 타인에게, 그리고 나에게로 향했다. 왜 나의 부모는 나를 살이 잘 찌는 체질로 낳았고, 나는 왜 살이 이렇게 찔 때까지 방치해 두었는지, 왜 사회는 잘 생기고 예쁜 사람만을 원하고 못생긴 사람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는지, 그리고 언니는 배고픈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어찌 저녁에 야식을 먹는지까지 별별 피해망상과 피해의식에 잠식되어 갔다. 그리고 살이 찔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감에 시달렸다.



다이어트 시작 후 처음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들이 부러웠다. 아무리 먹어도 오히려 살이 빠진다는 그런 사람들. 오랜 다이어트에 지칠 무렵부턴 과체중인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내 눈에 그들은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음식과 다이어트만 생각하고, 모든 사람을 체중으로 재단했던 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 두 가지가 모두 될 수 없으니 지금의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2킬로그램을 더 빼야 했다.



2킬로그램은 보험이다. 한 끼 폭식을 해도, 며칠 방심해서 살이 조금 쪄도 지금의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분의 몸무게. 53킬로그램에서 목표 체중이었던 45킬로그램까지 8킬로그램을 감량했던 나에게 43킬로그램은 꿈의 체중이 되었다. 목표 체중이 된 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을 빼고자 했다. 2킬로그램이 더 쪄도 45킬로그램이 될 수 있는 43킬로그램이 되기 위해. 힘겹게 44킬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1킬로그램만 빼면 꿈의 체중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 힘겹게 43킬로그램이 되었다. 그때부터 다시 목표가 생겼다. 41킬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2킬로그램이 쪄도 43킬로그램일 수 있는.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나의 숲은 망가졌다.



내 욕망과는 달리 살을 빼고자 하는 욕심이 늘어날수록 늘어나는 것은 식욕이었다. 식욕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 식욕은 나를 자극한다. 억눌러야 한다는 의식이 커질수록 식욕은 반대로 나를 잠식해갔다. 괴물처럼 말이다. 살이 찔까 너무너무 무서운 나를 괴물은 결국 먹어 삼켰다.


사진 <괴물들이 사는 나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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