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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Nov 11. 2019

폭식증을 고백한다는 것

벌레가 된 날

<나의 폭식증에 대한 이야기> #1



“정신과에 가야 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뭐?”라는 엄마의 황망한 대답만이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마도 열심히 키워놓은 딸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폭식증이야 의사 선생님이 부모님과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한대”


2005년도 겨울, 21살이던 나는 섭식장애 전문 병원에 갔다. 폭식증을 치료하고 싶었다.


먼저 인터넷으로 적당한 병원을 찾았다. 쉽지 않았다. 당시에도 거식증이나 폭식증이 뉴스에 오르내린 적은 있지만 이에 대한 정보나 치료기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다행히 강남에 있는 섭식장애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병원을 찾았다.  


전화로 진료 예약을 하고 예약 날 혼자 병원을 찾았다. 병원은 부부 문제와 섭식장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었다. 부부 문제를 담당하는 남자 의사와 섭식장애를 담당하는 여자 의사 두 명이서 병원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많은 병원들이 그러하듯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의사의 경력이 빼곡히 적힌 채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아크릴판이었다. 그 옆엔 수많은 증서들이 붙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종이 쪼가리로 보였을 것들에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저만큼의 실력을 갖춘 의사겠지. 그만큼 절박한 마음이었다.


곧이어 상담이 시작됐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간호사가 나를 담당의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내 담당의는 30대 초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 의사로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믿을 수 있는 의사를 만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담당의는 나에 대해서 물었다. 어떠한 기분인지 어떠한 상태인지,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 내 담당의는 나에 대해서 굉장히 의례적이라 판단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섭식장애 환자들이 가족들의 권유에 의해 병원을 찾거나 대부분이 끌려오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의사 앞에 앉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나처럼 스스로 섭식장애라고 판단하고 치료가 필요하다며 제 발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담당의는 치료에 대한 내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당시 내 담당의는 내 병이 빨리 나을 거라고 진단했었다. 그러나 나의 병은 담당의의 진단과는 달리 쉬이 낫지 않았다.


담당의는 다음 상담은 부모와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섭식장애의 치료에 있어서 가족 상담은 필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인즉슨 너의 병은 너의 부모로부터 기인한 것이니 너 혼자 치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너의 부모가 치료에 꼭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두 가지 고난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폭식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려야 하는 것과 이것이 부모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폭식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잠깐 동안의 정적 후 어이없다는 엄마의 탄식과 언제 서울에 가야 하냐는 질문이 함께 터져 나왔다. 일주일 후 엄마는 바쁜 가게 일을 제쳐두고 아빠와 함께 서울에 왔다. 이윽고 대면한 부모님과 나. 그때까지도 아빠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시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던 언니까지 가족 네 명이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식이장애가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 엄마는 여전히 어이없어했고, 아빠는 마치 세상에 없는 병에 대해서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내 부모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이던 시대를 버텨내신 분들이다.  두 사람은 살찌는 것이 싫어 먹은 것을 토해내는 내 병을 이해하지 못했고, 인지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내가 걸린 섭식장애란 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이런 꼴을 보자고 그렇게 고생하며 일했나’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아빠는 방에 있기가 불편했는지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불가능한 과제를 받아 든 학생의 복잡한 얼굴이었다. 폭식증이 시작된 지 일 년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가족들에게 나는 내칠 수도 그리고 품을 수 도 없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카프카의 <변신> 속 그 벌레 말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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