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가 책임회피라고요?
1.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삶.
2.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
‘동거’의 사전적 의미다. ‘결혼’의 사전적 의미는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다. ‘맺음’과 ‘삶’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결혼은 행위를 나타내며 동거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이 ‘결혼할 거야’, ‘결혼했어’등 과거나 미래 시제로 흔히 쓰인 반면 동거는 ‘동거할 거야’, 동거했어’보다는 ‘동거하고 있어’처럼 현재 진행을 나타낼 때 어색하지 않다. (통속적으로 결혼은 주위에 알려야 하는 소식인 반면 동거는 숨겨야 하는 과거로 치부되는 경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내게는 동거가 크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혼전순결을 강요하는 과거의 사회 분위기를 혐오했고 결혼제도에 반대했으며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애초에 믿지 않았으니 말이다. 동거는 이를 결정한 두 사람의 일인거지 타인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여겼다. 현재는 타인, 그러나 미래에는 가족이 될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감추어야 할 추한 과거 따위가 될 수도 없었다. 동거뿐만이 아니다.
반려인과 나는 서로를 첫사랑이라 지칭하는데 과거를 외면한다기보다는 어떤 과거가 있든 우리가 만나기 전의 일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30년을 넘게 살았다면 사실 어떤 과거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의 최초의 순수한 사랑이 되고자 하는 건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의 양심에게도 물어야 할 바람이다.
동거를 하는 우리 이야기를 쓰기로 한 후 조사 차원에서 포털 사이트에서 ‘동거’를 검색해 봤다. 검색 페이지 상단을 채우는 사전적 의미와 동거에 대한 질문들을 지나 페이지 하단에 자리한 커뮤니티의 글이 눈에 띄었다. 글쓴이는 동거와 결혼의 차이점에 대해 ‘결혼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의미하며 동거는 현재만 생각하는 무책임’이라고 썼다. 결혼주의자의 우월주의적인 시각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목구멍에 큰 혹이 생긴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동거는 나와 반려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뿐이니 외부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부스럼 같은 정의감이 샘솟기도 했다.
그때부터 반려인과 함께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기 시작했다.
‘오빠 은퇴하면 우리 무슨 일 해볼까? 수박 농사? 오빠네 시골집을 리모델링해서 지금 오빠네 부모님들이 하시는 것처럼 비닐하우스에서 수박 농사를 짓는 거야. 그때는 농업 기술이 발전해서 로봇이 농사를 짓지 않을까? 그럼 지금 코딩을 배워야 하나?’ 따위의 얼토당토않으면서도 그럴싸해 보이는 유토피아적 상상을 쏟아내다 보면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채 수박을 따고 있는 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상상력은 먼 미래를 돌아 점점 가까워져 다음 달의 여행 계획이 되기도 하고 조금 멀어지기도 한다. 당장 올해는 이사를 가야 한다. 함께 산 후 처음으로 함께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율해야 할 사항들이 태산 같다. 지역은 어디로 할지, 전세일지 월세일지, 보증금과 월세는 어느 정도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테리어는 어떤 스타일로 하지? 슬픔과 기쁨을 넘나드는 상상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계획한다.
우리의 동거가 무책임한 것은 맞다.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지 않는다. 내 인생은 나의 고민과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반려인의 인생은 그의 고민과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가 고민의 요소가 되기도 하고 조력자는 될지언정 책임 전가의 대상 혹은 보험은 될 수 없다. 부모가 내 삶을 책임지지 않고 자식이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과 어쩌면 비슷하다. 우리는 가족이면서 개인이다.
사랑하는 성인 두 사람의 결합. 우리는 두 사람 단위의 가족 관계를 맺고 있다. 각자의 가족은 각자의 가족대로 관계를 맺고 우리 두 사람은 별개의 2인 가족이 되는 거다. 효도는 각자의 몫이며 각각의 가족에게 우리는 자식의 반려인으로써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부양의 책임은 각자 지되 거주공동체로서의 노동은 적절히 분배한다. 물론 가끔 이 선은 희미해질 때도 있다. 한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이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도와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누군가 가사 노동을 더 많이 하고 적게 할 수도 있다. 큰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친구보다 진하고 혈연관계보다 가까운 사랑하는 마음, 그러니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 이해관계이기에 서로를 돕고 응원한다.
‘그렇게 사랑하고 미래까지 생각하면서 결혼을 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동거를 선택했다. 결혼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전에 없던 가족 형태로 동거라는 형식으로 산다.
두 명의 여성이 함께 집을 사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출간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조립식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감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비롯, 예능 <조립식 가족>이 제작되기도 했다. 애청하는 팟캐스트 <비혼세>의 화력과 그 안의 다양한 싱글라이프를 듣고 있자면 역시 대세는 비혼인가, 사랑하는 이성과 함께 살고자 하는 내 라이프스타일은 고리타분한 것인가란 생각마저 든다. ‘남녀의 동거’라는 말이 가진 불순함, 동거를 결혼하지 않는 남녀가 한 집에 살며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로 인해 동거는 온전한 삶의 형태로 인식되기에 일부 어려움이 있다.
동거는 연애의 연장선이 아니고, 결혼의 준비 단계도 아니다. 늘어나는 1인 가구 속 혼자 살기에는 팍팍해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선택한 삶의 형태일 뿐이다. 다양성의 시대이지 않나. 언어와 정책이 항상 시대에 반발 뒤쳐지듯 ‘2.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이라는 의미도 다양성의 시대에서 동거를 대변해 줄 수 없다. 은퇴 후 수박 농사를 하고 올해 이사 갈 집의 인테리어를 상상하듯 동거에도 좀 더 산뜻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명절을 둘이서만 보내는 동거 커플의 일상 브이로그가 궁금하신가요?
https://www.youtube.com/watch?v=WjcAISsHQWE&t=3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