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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욱 Mar 22. 2023

에피퍼니

일상의 한 장면에서 갑자기 삶의 본질을 깨닫는 영감의 순간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 읽는 편은 아니다. 어려운 문장이 나오면 여러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대로 계속 읽다 보니 제법 어려운 책들도 손에 들곤 한다. 어려운 책을 들고 있으면 약간 멋져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가지 장벽 같은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쓴 작가가 있으니 그 이름하여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이다. 심지어 이 책은 너무 두꺼워서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멋져 보이는 효과도 누리질 못한다.

  책장 한 켠에 꽂혀 있는 ‘율리시스'는 나에겐 넘지 못할 장벽 같은 느낌이다. 장벽은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좋은 자극이지만 율리시스는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 소전 서림에서 <율리시스 - 북아트> 전을 진행했다. 혹시 이 장벽을 넘을 수 있는 힌트가 있을까 해서 소전 서림을 찾았다. 전시에는 야수파로 유명한 앙리 마티즈가 참여한 출판본을 포함하여 세계 각국에서 여러 화가들과 함께한 출판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출판본과 함께 율리시스의 주요 스토리가 정리되어 있고, 율리시스의 가장 마지막 장면인 몰리의 독백의 방도 만들어져 있었다. 여러 내용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에피퍼니(epiphanay)라는 개념이었다.


  에피퍼니는 계몽, 현현, 나타남 등의 뜻을 가진 헬라어 에피파네이아(epiphaneia)에서 유래된 말이다. 성서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방문하고 경배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받음을 기억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강림', ‘현현', ‘주현' 등으로 사용된다. 


  문학적 측면에서 에피퍼니는 <일상의 한 장면에서 갑자기 삶의 본질을 깨닫는 영감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에피퍼니를 잘 이용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영문학에서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가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이 개념은 조이스를 논할 때 반드시 나와야 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실제로 조이스는 일생동안 71개의 에피파니를 기록해서 모았고, 현재 40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은 『더블린사람들』,『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영웅스티븐』,『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모두에서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조이스가 해변의 평범한 소녀에게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느낀 뒤, 거기에 내제된 신성함을 깨닫고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는 작가가 된 것 역시 에피퍼니의 순간이다. 


  “물이 흘러가는 한 가운데서 한 소녀가 바다를 응시하며 조용히 서 있었다. . . 탱탱한 탄력의 상아처럼 부드러운 빛을 내는 그녀의 양 허벅지는 거의 엉덩이까지 드러나서 속옷의 하얀 깃 장식은 부드러운 흰 깃털처럼 보였다. 그녀의 청회색 치마는 허리춤까지 대담하게 올라가 있었고 뒤쪽은 비둘기의 꼬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새처럼 부드럽고 가냘팠고, 검은 깃털의 비둘기 가슴처럼 가냘프고 또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긴 머리칼은 여성스러웠다. 소녀다움이 있었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경이감이 얼굴에 드리워있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중에서 


  조이스는 “작가는 결코 특이한 것을 써서는 안 되며, 그것은 저널리스트의 몫이다. 예술가란 정신적 아름다움의 현현에 책임이 있으며,그것을 우연하고도 소박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한 인간 삶 속에서 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에피터니는 사소하고 세속적인 일상의 삶에서 우연히 나타나야 한다.


  에피터니가 삶의 사소한 순간에 나타나지만 모든 순간에 발생하지 않듯,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더라도 어떤 순간은 ‘처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고, 어떤 순간은 ‘처음’이 될 수 없다. 사소할 수도, 세속적일 수도, 우연일 수도 있는 어떤 순간에 다가오는 ‘처음’이 있다. 조이스가 에피터스의 순간을 겪고 자신의 삶을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는 것에 매진하게 되었듯이, ‘처음’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순간이다.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비슷하게 느껴지는 개념이 하나 있다. 벤야민이 예술 작품에 대한 신비체험으로 내세운 ‘아우라’이다. 어떤 미술작품이나 사진 앞에 섰을 때 이유를 모르겠지만, 압도당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 이유를 벤야민은 아우라로 설명한다. 


  아우라(Aura)는 ‘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αύρα로 부터 유래했다. 처음에는 종교적 의미를 띄었던 아우라를 예술 측면으로 가져오면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워도 먼’ 이미지 경험으로 정의한다. 당장 앞에서 만질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있다고 느끼는 경험, 특히 인간이 자연현상과 만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아우라 현상이다. 거대한 태풍, 압도적인 산맥, 따듯한 바람은 바로 곁에서 느끼더라도 만질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있는 느낌이다.


  파리 출장 때 시간 내서 르부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모나리자를 보며 벤야민이 설명한 거리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내 눈앞에 놓여있지만, 이상하게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 아마 그것이 벤야민이 설명한 아우라일 것이다. 그러면 이런 거리감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거리감은 ‘원작’이라는 요소에 의해 발생한다. 르부루에서 보았던 모나리자, 스코틀랜드에서 보았던 설산, 1월 1일 아침의 해돋이는 복제될 수 없는 순간의 원작이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이 거미줄처럼 짜여, 바로 그때 그곳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렇기에 원작이고 다시 반복될 수 없기에 소유할 수 없어 거리감이 만들어진다. 


  에피퍼니와 아우라는 다른 개념이지만, 크게 생각해보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무엇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최근 나에게 그런 순간이 다가왔었다.

김환기, 16-IX-73 #318, 1973, 코튼에 유채, 265x209cm

  어느 가을날, M과 함께했던 환기 미술관, 그리고 거기서 김환기 화백의 16-IX-73 #318이라는 커다란 작품 앞에서였다. 여러 문제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그때, M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환기 미술관이라는 아름다운 공간,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그 순간, 내 앞에 있는 작품을 보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작은 점들을 찍으며, 그리고 그 위에 또 점을 찍고 그 점들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점을 찍는 순간순간 김환기는 그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순간 눈물이 흐르며 미술 작품이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술 작품, 그것도 추상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하면서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마침 관람객도 없었고 M 역시 다른 작품을 보고 있었기에 잠시 마음껏 눈물을 흘려보았다.   


  ‘처음’이란 순간이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추상 미술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처음이다’가 아닌, 조이스의 에피퍼니, 카버의 에피퍼니, 하루키의 에피퍼니, 벤야민의 아우라처럼, 그 순간의 ‘처음’은 나에게 어떤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환기 미술관에서의 그 시간 이후 지쳐있던 몸과 마음은 점차 회복할 수 있었고, 삶의 여유가 다시 생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변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벤야민이 아우라를 설명하면서 내세우는 개념인 ‘원본성’을 다시 빌려보고자 한다. 거리감을 가진 예술 작품의 원본은 접근 불가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원본은 ‘일회적 현존재’이다. 사람들에게 ‘처음’이라는 순간은 다시 오지 못할 특정 시공간의 순간이다. 그렇기에 소중하고 그렇기에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미술관에서 느꼈던 그런 처음의 순간들을 계속해서 경험할 수 있길 바라본다



  “원작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 작품이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다. 말 그대로 ‘일회적 현존재’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즉 예술 작품은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라는 물리적 특징을 토대로 자신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이다.”

- 심혜련, <아우라의 몰락 이후의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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