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댓글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by 뿌리와 날개

언젠가 왜 그렇게 자식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냐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이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뭔가 느껴지는 뉘앙스가 자식에게 매여 살며 아이를 행복이라 믿는 어리석은 내지는 가엾은 엄마에게 한 마디 하는 것 같았다.

가끔 댓글을 읽다 보면 나를 너무 특별한 엄마,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난감하다. 또 이렇게 내가 느끼는 내 모습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렇다고 댓글마다 아니라고 부인을 하거나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도 우습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얼마나 자주 시시한 일로 아이에게 치사하게 구는지 써봐야 할까?

다른 사람들과 한창 웃고 떠드느라 놀아달라 달라붙는 아이를 밀어내거나 밥하기 싫어 이틀 연속 대충 라면을 끓여 아이와 나눠 먹은 에피소드를 써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길거리를 걸을 때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내 모습, 종종 남자들과 데이트를 즐기며 유혹적인 말과 시선을 주고받는 내 모습을 찍어 올리기라도 해야 할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나를 이런 사람이라고 디자인하고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만 가지 내 모습 중에서 정말 단편적인 에피소드만, 그것도 특정 주제에 국한되어 쓰다 보니 글쓰기를 통해서 내가 나를 간단하게 소개할 때 쓰는 한 문장, ‘독일사는 싱글맘‘이라는 자아가 유독 도드라지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불편하기도 하다. 나는 보통의 사람인데, 어느 한 면이 너무 신성시되면서 내 개인의 삶에 제약이 되고, 내 글쓰기에 가이드라인이 생기는 것 같다.


왜 그런 댓글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처음에는 댓글 때문에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댓글 자체가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뭔가 불편한 것을, 댓글이 톡톡 건드리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를 지키는 강인한 어머니라며 아이가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댓글은, 힘들고 화가 날 때마다 아이를 함부로 대하면서 생겨난 내 마음속 죄책감을 건드렸다. 나를 모성의 화신인 마냥 칭송하는 댓글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두고 떠나고 싶었던 내 속 마음을 제대로 찔렀다. 역시 죄책감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자식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냐는 댓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에게 목매고 사는 찌질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나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온 당당한 내 모습‘을 정면으로 반박당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당당한 내 모습을 인정받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어쩌면 나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에서 나는 이미 ‘자식에게 희생하지 않는 나쁜 어머니‘라는 죄책감을 무의식적으로 포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의식적으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아마도 나는 아이와 별개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집착하지 않으려 애를 쓴 만큼 다른 한 편으로는, 아이보다 내가 우선인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것도 죄책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나를 디자인하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자기 검열 없는 글쓰기가 과연 있을까. 이미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의도가 다분히 깔린 기획이며, 내 글은 나의 눈으로 재창조된 나의 세상을 반영한다.

독자는 내가 쓴 단편적인 글 외에는 나를 사적으로 접할 수 없기에 그들이 가진 최대치의 정보를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쓴 글에 대한 느낀 점을 점잖게 피드백하는 것 또한 하등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내 마음인 것이다.

나를 보는 남의 시선이 아닌,

나를 보는 ‘나의 시선‘.



처음부터 나를 ‘독일에 사는 싱글맘‘이라는 틀에 가둔 사람 따위는 없었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댓글도 칭송이나, 신성화가 아닌 그저 개개인의 소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감을 쓴 사람 역시도 자신의 사적인 경험과 성장을 바탕으로 내 글을 읽고 자신 만의 방식으로 소화를 해낸 것이다.

자식에게 왜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느냐 타박했던 그 사람도, 아마 내가 쓴 글에서 본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어떤 감정을 자극받았던 것이리라.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내 글에 투영되어 본인의 감정을 건드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내 글을 통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들이 보는 ‘좋은 어머니’로서의 단편적인 면도 분명 나라는 사람의 한 일부이기 때문에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가끔 빈이에게 못되게 군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매력적인 남자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가슴이 설렌다고 해서 책임감 없는 어머니인 것도 아니다.

‘싱글맘’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살았지만, 지난 시간 누구보다 그 굴레에 갇혀 나를 학대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를 증명하려 빨래 비틀 듯 온몸을 쥐어짜 힘을 내 살았다. 하지만 6년이 지나 생각해보니 나를 채찍질 해 얻은 것 중에 진정 가치로운 것은 없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나를 증명해 보이려 애를 썼던 것일까.




열심히 사는 나도 나고, 게으름뱅이 나도 나다.

힘든 상황에서 아이를 지켜낸 나도 나고, 그러면서도 힘들어 미쳐버릴 것 같을 때는 꼴도 보기 싫어했던 나도 나다.

나가서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나도 나고, 집에 돌아와 쭈그리고 앉아 찌질하게 우는 나도 나다.

언젠가는 밥벌이를 하게 될 나도 멋지겠지만, 지금 밥벌이를 못하고 있는 나도 괜찮다.

끝으로, 왜 그렇게 자식에게 큰 의미를 두느냐고 물었던 사람에게 대답하겠다.

‘싱글맘‘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자식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서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가 훌훌 털어버리고는, 다시는 자식 있는 그 자리로 되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나 고되고 힘든 그런 자리라서 그렇다고…

이제,

죄책감 따위는… 개나 줄 때가 됐다.

나를 자유롭게 놔줘야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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