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by 뿌리와 날개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언제든 원하면 제약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이전의 삶이 가물가물하다. 기약도 없이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리는 와중에 그래도 간간히 본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주변 사람들을 보니 문득문득 슬퍼진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판데미(Pandemie. 팬데믹)가 없을 때에도 옆 동 사는 우리 엄마가 반찬 주러 들렀다며 벨을 누르던 곳은 아니었다. 6년째 살고 있는 집이지만, 이 집 벨을 눌러본 나의 한국 가족은 5년 전의 엄마가 유일하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수 있는 결정을 너무 쉽게 해 버렸다. 결혼, 외국 남자와의 결혼, 해외로의 거주지 이전, 그리고 출산… 특별했던 결혼도, 아이를 키우는 일도, 이혼도 다 적응이 되었는데,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면 “외국에서 사는 것”이다.

신혼 초에 내가 독일로 넘어오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있었다. 중국 유학 생활 중에 만난만큼 둘 다 동양 문화에 애정이 많았고, 아시아 권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독일에서 혼인 신고를 하고, 유럽에서 몇 년쯤 남편이 경력을 쌓으면 그걸 바탕으로 아시아 권으로 넘어와 자리를 잡기로 했었다.


그럼 나도 전공을 살려 취직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제3 국에서 살 거라면 몇 년쯤 남편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 더 크면 한국에서도 몇 년 지내며 한국문화를 경험하리라… 그렇게 약속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참 우습다. 길어야 3-4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유럽 생활이 어느새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중국어로 먹고 살 줄 알았던 내 중국어 실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여기서 독일어를 쓰며 독일 사람들과 부대껴 살고 있다.

유럽으로 넘어온 지 8개월쯤 지났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1년 반마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간다고 치면 엄마 아빠가 살아 계시는 동안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대략 40년이라 치면 스물네댓 번이다.


아차 싶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며 숨이 가빠왔다. 그동안 핑크빛 분위기에 젖어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현실을 마주한 시점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를 죽을 때까지 많아야 스무 번 남짓 보고 산다니, 아무리 내가 가족애가 유달리 끈끈한 딸은 아니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아시아 쪽에 살면 좀 더 자주 한국을 방문할 수 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또 유럽 생활의 장점을 떠올리며 당황스러운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문화심리학 시간에 이민과 스트레스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를 배운 적이 있다. 첫 번째는 “Honeymoon”(신혼기), 두 번째는 “Culture Shock” (문화 충격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Adjustment”(적응기)로 나뉘는 세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신혼기 때에는 모든 것이 마냥 아름답고 신기하다. 이국적인 풍경, 낭만적인 분위기, 다양한 축제와 새로운 음식들, 나를 향한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 등등 낯설면서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새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다음 문화 충격은 어느 정도 새로운 나라에 적응을 한 뒤에 일어난다. 보여도 이해할 수 없고, 들려도 알아먹을 수 없고, 의사를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충격도 전달이 안된다.

당신이 과거, 모를 때에는 친절한 줄만 알았던 그네들의 복잡 미묘한 태도 속에 감춰진 이중적인 메시지를 이 나라의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읽을 줄 알게 될 때, 길을 걷다가 또는 전철 안에서 시시 때때로 들려오는 모욕적인 인종차별을 듣고 심장이 쿵쾅거릴 때, 당신이 부당한 상황에서 부족한 언어 실력이지만 용기를 내 합당한 대우를 요구했을 때 외국인이라고 일단 반은 무시하고 들어오는 그들의 뻔뻔하고 무례한 행태에 낯이 뜨거워지며 할 말을 잃었을 때, 그때 비로소 문화충격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모든 것이 거지 같고 우울하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회의감, 좌절감, 비참함 그리고 그리움까지 외국 생활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내면에서는 나락까지 떨어진다. 보통 이 단계를 못 견디면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시기가 지나면 찾아오는 것이 바로 적응기이다. 돌아갈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고, 나처럼 남은 사람들은 그래도 이제 단 맛, 쓴 맛 다 봤기 때문에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고, 실망도 없다. 그래도 나름 장점이 있기에 남은 것인 만큼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고 대체로 만족하며 평정심을 유지한다.

나는 유럽으로 이주하고 첫 3년 간 문화 충격이 거의 없었다. 독일어도 할 줄 모르고, 직장도, 친구도 없이 그저 어학원이나 다니고, 남편 도시락이나 싸며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문화 충격이 웬 말이었겠나. 나가도 남편과 항상 함께 다니니 인종차별이나 성희롱 또한 거의 당해본 적이 없다.


“남편의 울타리“라는 구시대적 표현을 굳이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제로 홀로서기를 한 이후 나는 똑같은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댐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마을을 덮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남편이라는 댐이 무너진 뒤 흙탕물처럼 밀려든 독일 문화로부터 시작된 나의 문화 충격기는 딱 그 꼴이었다.

얼마 전 프리드호프 (Friedhof. 묘지공원)를 지나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나는 죽으면 어디에 묻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일 땅에 묻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낯설었다. 그동안 많이 적응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은가 보다. 옛날 같았으면 고향땅을 떠나 죽으니 객사다. 피식 웃음이 났다.


요즘같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세상에 객사가 웬 말이냐 싶지만, 한 편으로는 독일 땅, 더구나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유치원 때 친구를 마흔, 쉰이 넘도록 여전히 왕래하며 안정적으로 사는 많은 독일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은근슬쩍 시리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주 주방 창 가에 서서 집 앞 골목을 바라본다. 그런 일 없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엄마가 갑자기 벨을 누른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곤 한다. ‘이모!’ 소리에 창 밖을 내다보면 20년 지기 친구가 뛰어가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걸어오며 손을 흔드는 장면을, 학교 끝나고 집으로 곧장 오는 대신 할아버지 댁으로 샌 빈이가 느지막이 한 손에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른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오는 광경을, 너는 오라고 안 하면 당최 얼굴을 볼 수가 없다며 맛있는 거 차려놨으니 오랜만에 밥 먹으러 와서 겸사겸사 조카랑도 좀 놀아주고 가라는 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집 앞에 주차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이 사소한 모든 것들이 내가 독일에 사는 한 일어날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슬퍼진다. 세상 어떤 이의 인생이 들여다보면 서글픈 사연 하나 없겠냐마는, 철 모를 때 한 섣부른 결정에 대한 여파 치고는 가끔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향수를 독일어로 Heimweh (하임붸)라고 한다. 여기서 Heim은 고향, Weh는 아픔, 고통이라는 뜻인데 독일 사람들이 향수를 참 잘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그리움은 쌓여가는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자꾸 늙고 병들어가시니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저리고 아프다.

예전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이것이 정말 한국에서의 삶인지, 흘러간 과거의 추억인지 애써 분간해보려고 했다. 또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나간 추억은 원래 아름다운 것만 기억에 남는다고 이성적으로도 접근해봤다. 그럼 뭘 하나.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노력해봐도, 내가 나고 자란 나라는 살다 보면 그냥 한 번씩 가슴이 시리도록 무조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독일에 오래 살수록 더욱 명확해진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한 두 달에 한번 정도, 나를 그냥 울게 놔둔다. 애써 다독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그립다는데, 내 마음이 그렇다는데.


이미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 그리고 거기에 딸린 수많은 기억이 뒤섞여 단단한 실타래를 이뤘는데, 감정의 가닥들을 구태여 하나씩 구분해 그리움 대신 다른 이름을 붙여놓고 침착함을 유지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옛사랑“이라는 노랫말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냥 그리운 대로 가슴에 두고 살뿐…

나는 독일에서 아들과 씩씩하게 잘 살고 있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즐겁게 잘 지내지만, 때로는 사무치게 내 나라, 내 가족이 그리워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냥 원 없이 운다. 속이 시원하게 울고 나면 또다시 살아지니까.

죽고 나면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아직 정하지 못한 나는 이렇게, 10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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