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에게서 소년에게
나는 늘 가슴속에 좋은 엄마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목표로 두고 달리는 친구들 틈에서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같아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남편과 갈라서던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던 한 가지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싱글맘이 되었을 때, 참 기가 막혔다. 맹세코 돈 많은 남편, 키 크고 잘생긴 남편, 집안과 학벌 좋은 남편 같은 걸 바란 적 없다. 그저 내 수준에 맞는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아이들 낳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의좋게 살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아작이 나야 할 만큼 나에게는 과분한 꿈이었던 걸까? 오랫동안 자문했다. 수능이 부담스러웠다. 평가를 받고 성적에 맞춰 대학을 진학하는 게 불편했다. 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넘어야만 하는 산 같은 느낌이었달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면접을 보고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어색했다. 언젠가 내 힘으로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면허를 땄지만, 차를 몰아야 한다는 것도 어려웠다. 도로에 들어서면 차들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고,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했다. 운전은 정말, 악몽 그 자체였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는 평범한 인생의 단계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부담스러웠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슷비슷하게 사는 척했지만, 남들이 하니까 따라 했을 뿐 단 한순간도 “나의 삶”을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한국에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던 나는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넘어오는데 큰 고민도 필요 없었다. 그도 나처럼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가장인 그 사람을 의지했고, 어느 순간부터 의존하게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첫 일 년 간 나는 정말 행복했다. 남편은 성실했고, 자상했다. (객관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그 당시에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삶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걱정도 없이 아기와 함께 보내는 평화로운 일상이 마냥 행복했다.
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굴러 들어온 듯한 이 평화와 안정감이 한없이 달콤하면서도 문득문득 불안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안다. 남들이 사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 되고, 면허를 따면 운전을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되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나도… 어른이 된 줄 알았다. 그리고 만 스물아홉에 아기와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을 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교복을 벗지 못한 어린애라는 것을…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시간을 애써 유예해왔던 것이다. 가정이 깨지며 한 순간에 낯선 독일 땅에서 아기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던 그 날, 나의 세계, 내가 머물던 작고 따뜻한 그 알껍질도 함께 깨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애써 피하고 도망쳐왔던 순간이 하루아침에, 도둑처럼 성큼 다가온 것이다. 강철 같던 남편의 울타리가 헐렸을 때, 나는 폭풍우 속에 오갈 데 없이 던져진 것 같았다. 가족이라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나는 물론이고 아기에게까지 등을 돌렸는데 무엇을 더 믿을 수 있었을까?
길 가다 마주치는 독일 사람들의 눈빛은 굶주린 이리, 승냥이처럼 사나웠고, 친절한 웃음 뒤에 숨겨진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속내는 역겨웠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안락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졌고, 따뜻한 커피 향이 가득한 아기 엄마들 모임에 있던 나와 아기는, 이제 찌든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 보호소에 적응해야 했다. 무더운 한여름이었지만, 우리가 살아남아야 했던 그날의 잿빛 도시는 냉기로 싸늘했다. 젖먹이 아기를 안은 나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결정을 미룰 수도 없었다. 독일어를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매일 수십 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고, 말을 할 줄 알든 모르든 매일 전화를 걸어 집을 알아보고, 병원을 예약하고, 변호사를 만나야 했다. 어느새 겨울이 왔지만 몇 달 만에 나아진 것은 집을 구했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그동안 대기하고 있던 밀린 감정과 상념들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커튼 하나 없는 휑한 창문 밖으로 발가벗은 나뭇가지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귀신 울음 같은 바람소리가 소름 끼치게 귀를 할퀴는 밤이면 아이를 재워 놓고 나와 소파에 앉아 울었다.
무서워서 울었고, 두려워서 울었다.
슬퍼서 울었고, 아파서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어도 어쩜 눈물은 마르지도 않는지..
칠흑 같은 어둠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수많은 밤들을, 고통에 팔딱거리는 심장을 움켜쥔 채 쭈그리고 앉아, 나는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생물학적 나이와 내면의 나이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이의 마음으로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는 나에게는 대략 12살 정도의 갭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왕의 노랫말처럼, 이제 그만 일어나 어른이 될 시간이라고 나를 달랬다. 내가 흘리는 이 모든 눈물이 언젠가는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거라 믿어야만 했다. 아침이면 어른이 되는 겉옷을 몸에 걸치고 문 밖을 나섰다. 어른의 표정을 하고, 어른의 목소리를 내고, 어른의 걸음걸이로 긴장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집에 돌아와 외투를 벗고 나면, 나는 비로소 다시 내면의 나이에 맞게 돌아올 수 있었고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신앙이 없는 나는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가수의 노랫말에 의지해 어른이 되어가는 법을 연습했다. 어른이 아니면서도 어른인 척 살아야 했던 그 나날들, 매일 아침 집 밖을 나서면서 “자식 때문에 산다 “는 말의 참뜻을,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부모 된 자의 비겁한 핑계가 아니라, “자식은, 오늘도 내가 이 사납고 험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갑옷“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 뜻을 깨닫던 날 나는, 처음으로 우리 아빠의 어깨를 떠올렸다. 복지 그물망이 남편의 부재를 대신하고도 남는 이 나라에서 이제 겨우 가장 비슷한 흉내를 내기 시작한 주제에도 나는 매일같이 중압감에 허덕이는데, 맨 몸으로 오롯이 그 긴 시간 가장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나의 아버지는 턱 밑에서 끊임없이 지지배배 거리던 어린 자식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렇게 거대한 아버지의 품에서 나는 내가 잘나 절로 큰 줄 알며 참도 철이 없었구나...
그 한없이 깊은 심정을 감히 그제야 조금씩 더듬다 문득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며,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갔다. 10년 넘게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남들은 청소년기부터 조금씩 되어가는 어른을, 나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어야 하니 보통 죽을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게으름 피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면의 나이가 점점 생물학적 나이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3년 정도가 지나니 문 밖을 나서는 것이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를 만나게 해달라고 아이가 조르던 날, 가슴이 아파 “아이 아빠가 언젠가 자기 아이를 외면한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 있을까? “ 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마땅히 겪어야 할 것을 제대로 겪지 않고 피하면, 언젠가 삶이 우리를 기필코 잡아다 그때 도망쳤던 그 자리에 다시 세운다고. 그리고 그것이 삶에 의해 강제되었을 때에는 몇 배로 더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이다.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은.” 하고 말했더니,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만큼 큰 고통이 뒤따른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나의 인생을 오롯이 책임지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한발 한발 내딛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요리조리 잘도 도망 다녔던 것일까?
그랬기에, 나 하나도 모자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까지 두 사람 몫을,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만리타국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짊어져야 했을 때 말문이 막혔다. 부들부들 손발이 떨리는 와중에도 “결국은 올 것이 오는구나” 싶은 그런 직관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쩌면 지난 5년이 내게 그러했는지 모른다. 내가 인생의 단계에서 더 이상 정체되지 않고 마침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삶이 나를 강제했던 시간들. 그래서 남보다 더 혹독했지만, 늦게라도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삶의 단계.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견뎌낸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생물학적 나이와 어느 정도 싱크로율이 맞는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다시 주어진 “나의 삶“이 그렇게 감사하고 소중할 수 없다. 이제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싫어했던 운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