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와는 썸 타는 사이가 아닌 이유

네 번째 만남

by 뿌리와 날개
데이트하는 남자는 아이에게 소개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만난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는다.
대학 동기와는 데이트하지 않는다.




망가진 문을 고치려면 쿵쿵 시끄러울 테니 해지기 전에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 그를 불러야 하는데, 그럼 아이에게 그를 소개해야 한다.



안 그래도 눈치가 빤한 아이인데, 집으로 찾아와 엄마 옆에 선 난생처음 보는 남자라….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혼란을 주고 싶지도 않고, 내가 세운 원칙을 어기고 싶지도 않다.



그는 너무나 괜찮은 남자였다. 섣부르게 대시했다 어색해지기에는 너무 아까울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졸업할 때까지 내가 도움받을 일도 많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와 썸 타는 사이로 발전했을 때와 지금처럼 담백한 사이로 지내는 것의 득과 실을 비교했을 때 후자로 얻는 이득이 여러모로 훨씬 크고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험한 썸남보다 안전한 대학 동기 카테고리에 남기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만나도 거리낄 것 없는, 엄마의 대학교 친구.








일을 마치고 저녁 6시쯤 도착한 그는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잠긴 문부터 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공구함을 들고 들어와 쿵쿵거리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 아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며 내 옆에 딱 붙어 그의 동작을 감시했다.



그 역시 나처럼 문을 흔들어도 보고, 철사 같은 것으로 열쇠 구멍에 쑤셔보기도 하고, 문 틈 사이로 각종 도구를 이용해 잠금쇠를 밀어 보기도 했다. 역시 소용없었다.



“내가 다 해봤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거야.”


“방법이 없네. 장도리를 써야지.”


“장도리? 그럼 망가지잖아.”


“망가뜨리지 않고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열쇠가 안에서 부러져버렸기 때문에. 그럼 그냥 내버려 둘까?”


“그건 안돼…. 자주 쓰는 잡동사니가 여기 다 들어있거든. 무엇보다 청소기가 들어있어서 열긴 열어야 돼….”


“그럼 연다!”


“으응…….”



그는 장도리를 지렛대 삼아 문 틈에 넣고 기울였고, 한 번의 시도로 문은 탁- 하고 열렸다. 몇 주째 속을 썩이던 문이 그렇게 간단하게 열려버렸다.



문은 생각보다 멀쩡했고, 나는 드디어 청소기를 돌릴 수 있게 됐다.



생각보다 별 일 아니네.








그날 공교롭게도 아이 자전거 역시 고장이 났다. 이미 내가 여러 번 손 본다고 봤는데도 자꾸 체인이 빠졌다.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가 네 자전거도 고쳐줄 거야. 같이 갔다 와.”



내 아이는 원래 거의 낯을 가리지 않는다. 초반에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살피며 관찰하지만, 엄마인 내가 마음을 여는 상대라는 게 확인되면 그게 누가 됐든 아이도 금세 마음을 연다.



“싫어. 엄마도 같이 와.”


“엄마는 요리해야 돼서 같이 갈 수가 없어. 같이 가서 네 자전거가 어떤 거고, 뭘 고쳐야 하는지 알려줘.”



뭔가 수행할 과제를 주고 책임감을 지우면 즐거워하는 아이다. 그에게 너의 지시가 필요하다는 말에 잠깐 생각하던 아이는 신발을 주섬주섬 신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창 밖을 내려다보니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조그만 자전거를 고치느라 분주한 그의 옆에 아이가 붙어서서는 조잘조잘 말도 잘한다. 그동안 몇 번이나 체인이 빠졌는지, 누구랑 어디서 뭘 하다 그랬는지, 엄마가 그걸 고치며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상세하게 보고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두서없고 정리가 안 되는 나와는 달리 꼼꼼하고 체계적인 성격을 가졌다. 돌 이후로 본 적 없는 자기 아빠의 그런 면을 닮은 걸 보면,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자전거를 고치고 올라와 손을 씻는 아이에게 물었다.



“자전거는 잘 고쳤어?”


“응. 그리고 안장도 올려주고 손잡이도 올려줬어.”



체인만 한번 봐달라고 했는데 아이 키에 맞게 자전거 높이까지 맞춰줬나 보다. 어쩐지 오래 걸린다 했다. 아이 깰까 봐 벨을 누르지 않은 것도 그렇고, 애도 없는 젊은 남자가 굉장히 섬세하다.



혹시 그도 아이가 있나…?



“엄마! 저 아저씨, 엄마랑 결혼하려고 오늘 우리 집에 온 거야?”


“어???”



방음이 거의 안 되는 옛날 집이라 문도 있으나 마나 한데 안 그래도 목청 큰 녀석이 화장실 문을 건너 그의 귀까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목소리로, 그것도 독일어로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들었을까 얼굴부터 빨개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엄마가 저 아저씨랑 결혼하면 좋을 거 같아. 우리 집 문도 따주고, 내 자전거도 고쳐줬잖아!”


“야아아, 우리 집에 수리하러 오는 아저씨가 몇인데. 그거 좀 고쳐줬다고 다 결혼을 해! 그런 거 아니야.”


“왜, 엄마는 하기 싫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결혼이 뭔지는 알고나 그러는 거야?”


“알지. 남자랑 여자랑 예쁜 옷 입고 같이 걸어간 담에 한 집에 사는 거잖아. 아무튼 나는 엄마가 저 아저씨랑 결혼하면 좋겠어!”


“…………. 저 아저씨 우리 집에 엄마랑 결혼하러 온 거 아니고, 그냥 같이 공부하는 친구니까 나가서 그런 말 물어보지 마. 알았지?”



아이가 나가서 헛소리를 할까 봐 신신당부했다. 당황스러웠다.



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에서 그가 말했다.



“체인 거는 곳이 휘었더라고. 그래서 자꾸 빠졌나 봐. 참, 자전거가 너무 작아 보여서 키에 맞게 다 높여줬어. 근데 자전거에 기름 칠을 좀 해야겠더라. 녹이 슨 부분이 몇 군데 있던데…. 괜찮다면 다음에 내가 기름 가져와서 닦아줄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어,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싱글맘이라고 하면 으레 여자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는 줄 지레짐작하고 먼저 도움을 준답시고 같잖게 치근덕거리는 인간들이 있다.



행여라도 먼저 도와달라고 하면 남자들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는 듯도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 남자들에게 거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웬만한 일은 혼자서 처리하거나, 시이모님 베아테가 왔을 때나, 여자 친구들과 힘을 합쳐 해결한다. 그래도 안되면 친구들의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이 도와준다.



그 외에도 친하지 않은 남자의 더러운 치근덕거림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도 살만한 노하우 정도는 충분하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 2주 넘게 닫혀있던 문처럼.



그런데 그는 정말 친절하다. 부담스럽지 않게, 딱 내가 원하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아이는 긴장이 조금 풀리자 그때부터 까불까불 정신이 없었다.



좋은 녀석이지만, 아직 어려서 산만한 구석도 있고, 때로는 너무 개구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 남자 앞에서 눈치 본다고 아이를 다르게 대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하던 대로 엄마 표정으로 엄마 목소리를 냈다.



이 개구쟁이는 그래도 뭔가 어색한 엄마 모습이 웃겼는지 유난히 더 까불다가 결국 방귀를 뿌우웅 하고 뀌었다. 하… 너 정말 왜 그러니! ㅠㅠ



내가 진짜…. 창피해서 원…!!!!!!!



잠시나마 이 남자와 썸을 탈까 말까 망설였던 내 꼴이 우스워졌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밥상머리 앞에서 아직 방귀도 제대로 못 가리는 녀석을 데리고 썸은 무슨 얼어 죽을 썸…….



그나마 그와 아이 없이 진지한 대화를 몇 번 해봤기에 망정이지, 이게 첫 만남이었다면 오늘 밥 먹고 일어난 뒤 그가 다음부터 내 연락을 피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겠다 싶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정작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식사를 잘 마쳤다.



아니, 잘 마친 것처럼 보였다.



잘 마쳤겠지….



잘 마쳤어야 할 텐데….



젠장.








서둘러 아이 양치를 시키고, 잠옷을 갈아입혀 이야기 책을 읽어주고, 자라고 불을 끄고 방을 나오니,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새 밥 먹은 식탁을 치우고 주방 정리까지 마치고 있었다.



이건 또 웬 시추에이션!!! 부끄러운 내 주방!!!!!



나는 원래 요리할 때 실컷 벌려놓은 뒤 밥 다 먹고 치울 때 한 번에 정리를 한다. 게다가 주방이 코딱지만 해 수납공간은 커녕 발 디딜 틈도 없는데, 요리를 즐기는 지라 살림살이는 차고 넘쳐 내 주방은 조금만 어질러져도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래서 일부러 문을 꼭 닫아놓은 건데, 그런 내 개판 오 분 전인 주방을 그가 거의 다 정리했다. 아무리 썸을 안 탈 거라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을 들켜 너무나 창피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난한 살림에 두서없이 가전을 모으느라 식기 세척기는 다른 가구보다 오센 치도 넘게 튀어나와 있고, 벽에 달린 찬장 세 개는 색깔도, 디자인도 다 제각각인 게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작은 주방에 190에 가까운 그가 서 있으니 내 작은 주방이 유난히 더 좁아 보였다.



그를 처음 집에 부르기로 했을 때, 집이 누추한 게 가장 망설여졌었다. 그래도 남자가 집에 온다는데 아이가 군데군데 찢어놓거나 낙서한 벽지 하며, 칠이 다 벗겨진 문과 문틀, 무거운 가구들을 혼자 밀고 끌어 옮기느라 바닥에 난 흠집들이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할 때마다 여기저기 기운 듯한 누더기 같은 집이 신경 쓰일 때면, 아무것도 없이 막막하던 때부터 내 힘으로 하나씩 이뤄온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이 날, 이 순간만큼은 화장기 하나 없이 지친 얼굴로 그 앞에 서서 이렇게 구질구질한 주방을 들킨 나 자신이 초라해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집에 초대한 여자들 중에 이렇게 형편없고 낡은 주방을 가진 여자가 있었을까?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까지 안 친절해도 되는데 굳이 문을 열고 들어가 그 꼴을 본 그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모든 게 다 엉망이다.



“너 가고 나면 조용히 혼자 할 건데 왜 정리했어. 남의 집이라 살림살이도 낯설 텐데…….”


“누가 하면 어때. 상황 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내 전직이 요양보호사잖아! 매일 할머니, 할아버지들 집에 방문하면 문 앞에서부터 어질러진 집안일을 하며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어.


누구네 집, 어떤 주방에 들어가도, 어떤 가전제품을 봐도 다 다룰 수 있어. 그리고 네가 나한테 벌써 두 번이나 밥해줬잖아. 매번 얻어만 먹을 수는 없지.”



그는 행주로 싱크대 위 물기를 닦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마실 거리를 찾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둘이 털썩 앉으니 힘이 쭉 빠진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가 보다.



“아까 당황했지. 미안해. 애가 없다가 있으니까 굉장히 정신없다, 그치? 하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굉장히 똘똘하더라, 네 아들. 깜짝 놀랐어.”


“아…. 응, 똘똘한 편이야. 그래서 가끔은 좀 힘들기도 해. 목소리도 크고, 어디 있어도 튀거든.”


“자기 엄마처럼?”



나처럼? 나도 우리 애처럼 목소리가 크고 튄다는 말인가? 흠…….



그렇게 묘한 말을 툭 던져놓고 그는 빙긋 웃었다.



“봐서 알겠지만, 식탁에 앉아서 방귀나 뀌는 저런 원숭이 한 마리를 데리고 내가 어떻게 누군가와 진지한 만남을 할 수 있겠어. 후훗. 로맨스는 물 건너갔지.”



농담 반 진심 반 그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대답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는 여자와 연애한다는 건.”








Ein Kind von Anderem. 그는 분명하게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표현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누가 연애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겠고, 겨우 네 번 만나 도움을 받은 게 다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속에 있던 뭔가가 툭- 하고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동안 데이트를 했던 그 어떤 남자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아이가 있다고 하면 첫마디는 대부분 “그렇구나!” 내지는 “오, 멋진데?”였다. 그 외의 대답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전혀, 내가 아이가 있다는 것에 개의치 않아했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나의 약점이 아니다. 아이를 내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라면, 그런 남자는 나도 필요 없다. 그동안 아이랑 둘이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니까.



그런데 나는 왜 지금 그의 대답에 이렇게 실망 아닌 실망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과연 그에게서 무슨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걸까…?








집에 가려고 문을 나서는 길에 그는 문 앞에 놓아둔 쓰레기봉투를 말없이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돼. 내버려 둬. 그거 나중에 내가 나갈 때 버릴 거야.”


“어차피 가는 길인데 뭐.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면서 그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쓱 뒤 돌아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내가 먼저 요청하지 않은 것들을 도와준다거나, 남의 주방에 멋대로 들어가 정리를 하고 있는 것 하며, 하다 하다 이제는 우리 집 쓰레기까지 버려준다.



내가 아는 독일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최대한 피해 안 주려고, 그들의 개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아무래도 나를 많이 자제하고 조심하며 살았다, 그동안.



그래도 나는 그들과 달라 이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뭐랄까. 나랑 정서가 비슷한 것 같다. 그가 하는 행동의 의도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내가 추측하는 것이 그의 의도가 정말 맞는지는 나중에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다른 독일 사람들과 있을 때와는 달리 나를 검열하고, 자제할 필요 없이 자유로운 느낌이다.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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