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연애를 할 때 그의 사촌 형제 중 한 명이 돌도 안된 아기를 두고 이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나는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아니, 불과 일 년 여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나누고, 아기를 가질 정도로 사랑했던 사이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금이 갈 수 있는 것일까?
뭔가 내가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그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년 뒤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나 역시 남편과 갈라서게 되었다.
이혼을 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평소 이혼에 관해 품었던 궁금증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정이 흔들리고 파경을 맞기까지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게 잡아야 반년이었고, 본격적으로 급물살을 탄 것은 두 달 남짓이었으니까.
그와 내가 꾸린 가정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혼해보기 전에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부 사이의 수많은, 미묘한 메커니즘을 체득할 수 있었다.
당사자이다 보니 물론 아팠지만, 한 편으로는 나라는 인간의 삶을 지켜보는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이혼에 관한 또 다른 궁금증은, 다들 말하는 ‘이혼은 진흙탕 싸움’이라는 말의 의미였다.
이별과 이혼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다르기에 진흙탕 싸움이라고 하는 것일까?
남편과 법정에 서서 이혼소송을 하던 날, 별거도 이미 4년이나 했겠다, 그냥 도장만 찍고 오면 될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던 나는 “이혼”의 실체와 그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판사는 나의 한국에서의 학사 학위를 구글링 해봤다며, 독일에서 찾을 수 있는 직업이 구글에 백 페이지도 넘게 뜨는데 왜 다시 대학을 가냐며, 스스로 돈을 벌지 않는 이유를 나에게 추궁하듯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남편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로 스토리를 본인에게 유리하게 각색해서 능숙한 독일어로 여유롭게 프레젠테이션 했다.
내가 어눌한 독일어로 반박을 할 때면 그의 변호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전형적이네.’ 내지는 ‘뻔한 스토리네.’라며 나를 유럽 남자 하나 잘 물어 평생 등골 빼먹고 살 작정을 한 흔해빠진 동양 여자 취급하며 비하했다.
나에게 이 독일 땅에 도와줄 가족이 없고, 기저귀를 떼지 못한 어린 자식이 있고, 언어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들 모르는 것 같았다.
왜 한 학기를 휴학했냐 내 불성실함을 비난하듯 캐묻는 판사에게 아이를 데리고 죽자 사자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더 이상의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아이가 있잖아요, 아이가!
유치원생 애를 데리고 어떻게 풀타임 대학공부를 하면서
240시간 실습까지 합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지가 부들거리면서도 매섭게 노려보는 내 서릿발 같은 기운에 순간 법정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 고함에 순간 몸을 움찔했던 판사는 곧 몸을 가다듬고 재판을 진행했다.
다들 인공지능처럼 감정 없이 핑퐁핑퐁 주고받는데 당하는 나만 혼자 피가 거꾸로 솟아 어쩔 줄 모르는 머저리였다.
상대 변호사는 모욕의 선을 영리하게 잘 탔고, 어차피 그것이 판사가 판결을 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내 변호사는 우아하고 고상하게 무시했다.
내 변호사에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일말의 언지도 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즉흥적인 추국장 속에서 나는 임기응변으로 상대방의 거짓말을 하나하나 받아쳐야만 했다.
거짓말을 나불거리는 인간은 지껄이면 그만이었지만, 그 거짓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는 논리적이며 영리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이성적으로 감정을 잘 컨트롤해야 했다.
원래 배정된 시간은 30분이었지만, 재판은 2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나는 그 잔인한 시간 동안 판사, 상대 변호사 그리고 남편의 공격을 혼자서 온 몸으로 받아냈다.
6학기 동안 남편에게 최저 생계비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과를 받아냈지만, 내 영혼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법정은 진실만을 말하는 엄숙한 공간이 아니라 온갖 권모술수와 거짓이 난무하는 더러운 곳.
판사는 진실을 가리고 정의를 심판하는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실패 없이 살아온 본인의 인생에 꼭 맞게 굳어진 좁은 소견을 바탕으로 탁상공론이나 지껄이는 바보, 등신, 머저리.
상대방의 변호사는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마.
남편은…. 이미 4년이 넘도록 자기 자식을 보지 않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그에게 더 이상의 실망은 없었다.
이혼 도장을 찍고 오는 날, 친구들과 이혼 파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혼자서 살아온 지 4년쯤 되어 어느 정도 평온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법원에서의 경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시간 동안 그들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총을 맞고 온 몸에 구멍이 나 피가 줄줄줄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무더운 한 여름, 이혼이 마무리된 그날 이후로 나는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창문을 꽉 닫고, 암막 커튼을 치고, 다섯 살짜리 아이를 내버려 둔 채 방에 틀어박혀 2주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분하고 억울해 한밤 중에도 벌떡 일어나 속으로 소리를 질렀고, 침대를 내리쳤으며, 분을 삭이지 못해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분하다는 것, 억울하다는 감정.
나는 슬픔이나 고통보다 이러한 감정이 더 견디기 힘들다.
2년이 넘어가도록 이혼에 대해 쓰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몇 글자 끄적일 수 있을 만큼, 이혼은 쇼킹했다.
연락이 두절된 나를 친구들이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다들 여름휴가를 떠나서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핸드폰을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급기야 200킬로가 넘게 떨어진 곳에 사는 시이모님, 베아테가 말도 없이 우리 집에 찾아오기에 이른다.
다 죽어가던 나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그녀의 방문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고, 더 짓무를 것도 없어진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환기를 시키고, 방을 정리하고, 우리에게 밥을 해 먹였고, 나와 아이를 데리고 나가 옷을 사주었다.
그렇게 주말 내내 그녀는 우리를 보살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를 추스를 수 있었다.
싱글인 친구 하나가 나를 잡아끌었다.
고생했다고, 그만하면 됐다고, 여름이 가기 전에 어디로든 떠나자고.
우리는 캠핑카를 빌려 그렇게 계획도 없이 여행을 떠났다.
끔찍했던 이혼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겠지….
그렇게 달리고 달려 우리는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을 바라보고 펼쳐진 벨기에의 어느 해안가에 닿았다.
온 동네 아이들이 덴마크로, 프랑스로, 이탈리아로, 포르투갈로 휴가를 떠나고 남은 동네에 우울증에 빠진 엄마와 단 둘이 남겨져 영문도 모른 채 2주가 넘도록 혼자 놀아야 했던 내 아들.
말썽꾸러기라고 학교에서 탈도 많지만,
누가 알까.
이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견뎌야만 했던 그 모진 시간들을….
나는 아이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내가 죽어갈 때마다 작은 손으로 나의 목숨줄을 잡아주었다.
예약도 없이 불쑥 찾아간 곳이었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가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평균 수준이었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도 깨끗했고, 캠핑카 주차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마당이 딸린 컨테이너 숙소도 여러 채 있어서 꼭 작은 마을 같았다.
괴로운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잊고 싶을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그 당시 내가 조금 더 현명하게 잘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울분으로 변해 나를 스스로 물어뜯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내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피폐함 말고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이혼이 이별과 다르게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것은 겪어보니 간단했다.
이별이 사랑의 끝이라는 추상적인 낭만이라면, 이혼은 “법적 의무와 그에 얽힌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계약 파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3년의 결혼 생활을 마친 뒤 내가 배운 것은,
결혼이 다른 커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택지 내지는 뜨거운 사랑의 결실, 또는 삶의 안정성 보증이 아니라는 것.
깨진 부부 사이에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힘은,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가정을 깨고자 하는 자에게 막강하게 있다는 비참한 아이러니.
이혼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가 아니라 최대한 금전적 손실을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책임을 묻고 계약을 파기하려는 두 인간의 아귀다툼이라는 것.
그리고 재판은, 누가 옳고 그른지 진실을 가르고 정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두 거짓말 중 더 그럴듯한 거짓말 쪽에 네 말이 맞다고 편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만 서른세 살 여름에 독일 땅에서 세상을 조금 더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