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전 남편과 현 남친이 공존하는 공간

남편의 외도가 남긴 상처

by 뿌리와 날개

남자 친구와 잠옷 문제로 싸우기 이틀 전쯤 꿈을 꿨다.


전 남편과 내가 한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는 꿈.


재미있는 것은 내가 침실에 전 남편과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남자 친구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 남자 친구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내가 전 남편과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이는 꿈속에서 지금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작은 자전거를 타고 우리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반은 무관심, 반은 자기 아빠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아이의 주변에는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다른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아마도 친구들인 듯했다.








꿈에서 깬 뒤 남자 친구가 오면 이 이상한 꿈에 대해서 바로 말해줘야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잊어버렸다.


원래 꿈이라는 게 꿀 때는 아무리 생생했어도, 깨어나서 바로 적어 두거나 말로 뱉지 않으면 금방 잊혀진다.


분명 전 남편과 아주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분위기나 정서만 또렷하게 남아있을 뿐.


한쪽에 치우친 감정보다는 중립적이고 담백한 감정으로 대화를 했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둘 다 오른쪽으로 돌아 누워 있었고, 전 남편의 왼팔이 내 허리 위에 가볍게 걸쳐져 있었다.


더 이상의 터치는 없었지만 그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하기를 원한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남자 친구를 가리키며 그를 사랑한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 주변을 오고 가며 아이는 무심한 듯, 전 남편을 쳐다보며 한 번씩 “아빠!”하고 불렀다.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자 꿈속에서 나는 다시 아쉬운 생각이 들어 전 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이와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전 남편은 꿈에서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참나.... 그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다 정리된 줄 알았는데, 꿈속에서 나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나 보다.


내 마음인데도 무의식에서 날개를 달고 멋대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내 마음이 내 주인인 것 같다.








이제야 생각났다, 6년 전 그때 있었던 일.


한국에서 돌아와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열흘 간 남편과 지냈을 당시, 나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들을 정신과 의사처럼 귀담아 들어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위기의 남편을 잘 보살펴, 가정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남편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정이 깨지지 않도록 나라도 흔들리는 남편을 잘 붙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남편이 나를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받아주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을 다독여주었다.


그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매일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는 아이와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며 어서 빨리 이사도 가고, 집도 사고, 강아지도 키우고, 둘째도 낳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그러자고 했다.


그다음 날이면 그는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한국에 살랬더니 왜 다시 돌아와 내 인생을 망치느냐며, 당장 아이와 돌아가 버리라고, 나를 그만 괴롭히라고, 너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너만 없어지면 된다며 너 때문에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지 않냐며 다시 한번 노력해보자고 했다.








그 열흘 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남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숨 죽이고 오로지 남편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랬다.


일단 이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와야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정신력이 바닥 난 상태였지만, 그가 나보다 더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그 여자와 나눈 메시지들을 보여주며, 그 여자와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고, 그 여자와 얼마나 말이 잘 통하며,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여자인지 자랑하는 그에게, 정말 그렇다며 네가 행복해하니 그거면 됐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다 한 번은 나도 심통이 났다.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던졌다.


한국에 있는 동안 사실 다른 남자와 잤노라고.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되려 나에게 큰소리쳤다.


누구냐고 따져 묻기에 대충 둘러댔다.


없는 말을 하려니 진땀이 나면서도 뭔가 복수를 해준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2초도 되지 않아 “Naja, scheißegal…. (하긴, 그러거나 말거나 뭐 내 알바 아니지.)”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했다.


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데도 불 같이 화를 내거나 더 따져 묻는 대신, 관심을 끄는 남편.


남편과 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것이 그에게 상처가 되려면, 일단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에게 마음이 떠난 그는 내 거짓말에 상처는커녕 내 알바 아니라며 관심을 껐다.


바람피웠다는 말로 그를 상처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나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다.


바뀐 내 위치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편에게,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가치한 인간이었다.


아니, 인생에서 아웃시킨 줄 알았는데 15개월짜리 똥싸개, 울보를 달고 다시 나타나 그를 괴롭게 만드는 골칫거리였을 뿐이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다급하게 나에게 말했다.


이 집에서 나가 달라고.


비 오는 이 밤에 아기를 데리고 날 더러 어딜 가라는 거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곧 그녀가 집에 올 건데 너와 아이가 독일에 들어왔다는 말을 아직 안 했기 때문에 너희를 보일 수 없다며, 그녀가 알면 곤란하니 나가 달라고 했다.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었다.


남편과 바람 난 그의 직장 상사인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더 싫었다.


만에 하나 우리가 다시 살게 되면, 우리의 생계가, 남편의 커리어가 그녀의 손에 달려있으므로.


나는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알게 된 지 반년이 조금 넘은 아기 엄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


추적추적 비가 오던 6월의 어느 날 밤, 15개월의 아기를 품에 안고 비를 맞으며 차도 근처에 숨어서 그녀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남편과 바람 난 그 여자가 남편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우리와 마주칠까 봐.








갑작스러운 나의 부탁에 두말 않고 차를 끌고 나와 우리를 싣고 집으로 데려간 그녀.


우리가 도착하자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차를 끓여다 주었다.


그리고 아이 방에 매트리스를 깔고, 새 이불을 꺼내 주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 아름다운 곳들을 함께 여행했다. 나를 자기가 찾던 The right one 이라며, 꿈에 그리던 여자라고 했다.


나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남자들과 나 몰래 경쟁했었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야 말해주며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랬던 그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나는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빗 속에 쫓겨나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 쭈그리고 앉아 울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의 남편이, 그의 정부와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독일어도 못하고, 직업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멍청한 나.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비참함은 그때 다 느껴 본 것 같다.


이런 것이 결혼이라면,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 물었다.








그 모든 감정들이 6년 동안 내 안에 억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꾸고 난 이틀 뒤, 나는 남자 친구와의 싸움으로 해묵은 감정들을 쏟아내게 되었다.


내 무의식이 꿈으로 나에게 미리 알려줬던 걸까.


그때 두려워 꽁꽁 숨겨뒀던 그 비참하고 더러웠던 기억의 상자가 이제 곧 열릴 거라고.


넌 이제 준비가 됐으니, 똑바로 쳐다보고 깨끗하게 쏟아내 버리라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


드러난 억압을 가지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남자 친구는 내가 글을 쓰며 스스로를 잘 치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걸까?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밉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다.


나는 그것보다는, 그냥 그 당시의 나 자신이 많이 비참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비참하다는 것 말고는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큰 소리 치지 못하고, 그 자식 멱살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욕지거리나 따귀 한 번 갈겨주지 못하고 가정을 지키겠답시고 고분고분 비위를 맞췄던 그날의 내가 그냥 너무 비참하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자리에 나를 놓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이 있을 뿐이다.


다시는 가정을 지킨답시고, 그 따위 빌어먹을 참을성과 인내심으로 더러운 꼴을 감내하고 싶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기에 자기는 너무 좋은 남자라며, 때가 되면 꼭 나와 결혼할 거라는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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