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식물에게 감동받아 본 적이 있나요?

by 뿌리와 날개

나의 삶은 언제나 식물을 키우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부모님은 맞벌이로 언제나 바쁘셨다.


나와 동생은 스스로 커야만 했으며, 나 크기도 바쁜 와중에 동생도 한 번씩 거들떠봐줘야 했으므로 딱히 다른 여유가 없었다.


주변에서 식물을 볼 기회도 자주 없었기 때문에 식물을 키운다라는 개념은 물론이고, 식물 자체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결혼한 뒤로 가끔 남편이 꽃을 선물하기는 했지만, 꽃병에 꽂아두면 며칠 가지 않아 금방 시들어 죽어버리는 것을 보며 나는 식물을 돌보는데 영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싱글맘이 된 뒤로는 더했다. 한 푼이 아까운 마당에 먹지도 못할 꽃 나부랭이에 돈과 에너지를 쓰다니.








독일 사람들은 특별한 날이나 어디 초대받거나 하면 식물을 잘 선물한다. 집을 가꾸고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 사람들에게 화분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적인 선물이다.


어쩌다 베아테 이모님이 오실 때면 꽃이나 화분, 작은 초목을 선물해주셨지만 나는 번번이 그들을 말라 죽이기 일쑤였다.


친구들이 가끔 선물해주는 식물도 부담스러웠다. 싸지도 않은 화분, 어차피 며칠 못 가 죽어버릴 텐데….


다들 가끔씩 물만 조금 주면 된다고, 일부러 손이 안 가는 가꾸기 쉬운 식물들로 선물해주며 어렵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애 데리고 살며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데 식물까지 가꾸라니….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꽃들은 어느새 말라비틀어졌고, 병에 고인 썩은 물 하며 흉측하게 변해버린 화분은 처리하기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를 줄 모른다고 몇 해에 걸쳐 꾸준히 말해줬더니 드디어 꽃 선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식물을 기르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물은 적어도 밥 달라고 울기라도 하지.


밥을 안 주거나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으면 짐승은 울부짖기라도 하니, 어쨌거나 아프거나 죽기 전에 손을 써 볼 방법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놈의 식물들은,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면서도 당최 말을 안 한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둘러보면 그냥 죽어있는 것이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식물을 기르는 친구들은 동물이 성가시다고 했지만, 나는 식물이 더 성가셨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따로 없다. 말 안 해도 알아서 고이 잘 모셔야 하는 상전.


안 그러면 얄짤없이 돌아가신다.








올 2월, 원래도 식물을 좋아하고 잘 키우는 옆집 여자가 오래 키우던 식물의 뿌리 일부를 나에게 선물했다.


발코니가 생기면서 슬슬 식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물에 담가만 놓으면 알아서 잘 큰 다기에 한 번 시도나 해보자 하고 물속에 담가 놓았다. 그랬더니 이 녀석은 성가시게 굴지 않으면서도 정말 하루가 다르게 잘 컸다.



옆집 여자가 몇 년 째 키우고 있는 원래 나비란


일부 뿌리를 얻어와 내가 키우게 된 나비란



시들 기색도 없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니 예뻤다. 그래서 생천 처음 분갈이라는 것을 해줘 봤다. 저 조그마한 화분을 채우자고 2리터짜리 흙도 샀다.


하지만 나의 정성과는 다르게 분갈이를 해준 이후로 녀석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생생하던 이파리들이 힘 없이 늘어지고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꽤 실망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줄 알았는데... 역시나 나는 식물을 기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름 열정을 들였는데 죽어가는 게 야속하기도 했고, 고작 풀때기 하나 기르자고 굳이 인터넷을 뒤져볼 만큼, 그 정도의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아이와 꽤 오래 집을 비울 일이 생겼다. 남자 친구에게 빈 집을 부탁하고 집을 떠났다.


집에 몇 가지 화분이 있기는 했지만 선물도 남자 친구가 해줬고, 돌보는 것도 남자 친구 몫이었다. 그래서 따로 돌봐달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돌아올 때면 이 녀석은 이미 죽고 없겠다고 어렴풋이 생각만 했다.


3주 뒤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남자 친구가 말했다.



“죽어가던 그 녀석 말이야. 내가 살려냈어.”



정말이었다. 분명 떠날 때에는 모든 이파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는데 그중에 이파리 세 개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고는 더 깜짝 놀랐다.





위 사진처럼, 꺾여서 부러져있던 이파리가 건강해져서 다시 빳빳하게 힘을 주고 스스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꺾인 이파리는 곧 떨어져 나갈 줄 알았지 다시 설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도끼 자국처럼 찍힌 상처가 남긴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힘 있게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대견할 수 없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찡해졌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식물을 사랑하게 된 것이.








매일 일어나면 이 녀석부터 찾아다 끌어안고 이파리들을 하나씩 떠들러 보았다. 부러진 녀석들 중에 밤새 누가 다시 일어났는지. 일어난 이파리들 중에 다시 꺾인 것은 없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다 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을 줄 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흙을 만져보고 마르면 줘라, 화분을 들어보고 가벼워지면 줘라, 너무 많이 주는 것보다 차라리 안주는 게 낫다 등등…. 별의별 팁을 다 듣고 시도해봤지만, 식물들은 어김없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이 녀석과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됐다.


풀 죽어 보이면 쓰다듬어줬고, 목이 말라 보이면 물을 줬다. 심심해 보이면 밖에 내놓고 바람을 맞게 해 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에 내놓고 목욕도 시켜줬다.



5개월이 지난 현재 모습



그렇게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이 녀석은 5개월이 넘도록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말 못 하는 식물에게 감동을 받는 것도 모자라 식물과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이야.


그로 인해 내 평생 아무 상관없던 식물 키우기를 즐기게 될 줄도 정말 몰랐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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