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정신건강의 척도

by 뿌리와 날개

요 며칠 글을 쓴다고 발코니 식물들을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했다.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날씨가 적절히 잘 바뀐 것 같은데도 식물들은 내가 매일매일 돌볼 때와 아닐 때를 정확하게 안다.


가끔 보면, 이 녀석들 말만 안 할 뿐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꽃집에 가서 흙을 사다가 마음먹고 발코니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시든 화분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통째로 쓰레기통에 쏟아버렸을 화분에서 살릴 수 있는 꽃들을 조심스레 뽑아 하나씩 새 화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살아날 수 있겠지?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사치스러운 삶의 모습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식물을 키우는 삶”이다.


삶을 안정적으로 사는 사람 치고 식물을 기르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가 말하는 안정적인 삶이란, 소득 수준이나 사회적 위치, 가족관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의 내적인 안정에 기반한 평화로운 삶을 말한다.



오른쪽 예쁜 분홍꽃은 빈이가 학교에서 이름 모를 씨를 받아 반년 정도 서랍에 묵혀 뒀다가 봄이 되어 키우기 시작했다. 이름은 글뤽키이며, 빈이가 아주 애지중지한다.








식물을 가꾸고 잘 키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어느 쉬는 날 한꺼번에 몰아서가 아니라 매일매일 조금씩 꾸준히.


대충 봐서는 잘 모른다. 꼼꼼하게 여기저기 들춰보고 들여다보며, 색이 바래거나 마른 잎들을 떼어줘야 한다.


열심히 가꿔도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워하니, 원래 꽃은 피었다가 지는 거란다. 그렇게 지는 꽃들을 잘라주고, 마른 잎들은 떼어줬더니 뿌리가 있는 꽃들은 1-2주 뒤면 더 크게 자랐고 새 꽃망울을 틔웠다.


꽃이 피고 진다는 말을 듣기만 했지 실제로 그 과정을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피고 진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잡초도 뽑아줘야 하고, 힘이 없어 보이면 거름도 줘야 한다.


꽃집에서 2주에 한 번 정도는 Dünger (뒹어/ 거름)를 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식물은 물 잘 주고 햇빛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물은 말 그대로 물이고, 식물도 밥을 먹는단다. 그게 거름이란다.










식물을 만지기 시작한 지 5개월 남짓, 우리 집에 온 식물이 더 이상 처참하게 죽어 나가지 않는다.


처음 꽃을 고를 때에는 어떤 종류를 골라야 할지, 어떻게 매치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마치 안경을 처음 골라볼 때처럼…. 색깔이 어울리지 않을까 봐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결국, 용기를 내서 내가 사고 싶은 꽃들을 골랐다. 안 어울리면 어떤가, 어차피 내 발코니에 내가 만든 내 꽃밭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뒤로 나는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예쁠 때도 있고, 부조화스러울 때도 있지만, 부조화스럽다고 해서 보기 싫다거나 뽑아버리고 싶었던 적은 없다.


예쁘면 예쁜대로,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저희들끼리 또 알아서 조화를 찾아간다.








왼쪽은 식용 바질, 오른쪽은 라벤다와 이름 모를 꽃, 그리고 초록색 식물



독일 마트에 가면 Basilikum(바질리쿰/ 바질), Minze(민쩨/ 민트), Thymian(튀미안/ 타임), Petersilie(페타질리에/ 파슬리), Rosmarin(로즈마린/ 로즈마리) 등의 Kräuter(크로이터/ 식용 허브) 화분을 판다.


보통 주방 창가에 놓고 요리할 때 조금씩 뜯어서 쓰는데, 나는 물만 주면 자라는 이 허브화분 조차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이기 일쑤였다.


그런데 벌써 한 달 가까이 바질이 살아있다. 내 손이 점점 초록 손이 되어가고 있다.


바질을 사용해 요리를 하고 싶어지다 보니 이탈리아식 요리도 더 자주 하게 된다. 잘 안 하던 요리, 잘 안 먹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삶이 조금 더 풍성해진 느낌이다.


*독일에서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을 보고 eine Grüne Hand zu haben, 초록 손을 가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키우는 식물들을 둘러볼 때면,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행복함이 뱃속에서부터 차오르곤 한다.


식물을 기르는 여유를 가질 정도로 내 삶이 어느새 이렇게 사치스러워졌나 싶어 가끔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내 집에 온 식물이 끊임없이 죽어가던 인생의 단계를 거치고 나니, 정신 건강의 기준을 가장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식물을 키울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닌가 싶다.


그때는 정말, 싱싱했던 꽃나무들이 돌아서면 죽어 있었다.


빈이가 자라 독립할 나이가 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방에 꼭 식물 한 두 개 정도는 키우고 가꿀 수 있는 삶의 수준을 유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식물 하나조차도 함께 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인생이 지금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숨 고르고 생각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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