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바바리안>의 배경이 된 숲으로의 소풍
나의 남자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일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가족과 사랑을 계속해서 뒷전으로 미루다 보면 어느새 곁에 아무도 남지 않고, 그렇게 이룬 것들 마저도 결국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진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 그래서 남자 친구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 반나절을 넘기지 않고 우리의 얼굴 정도는 보러 들린다.
그런데 요 근래 서로 바쁜 일이 많아 한동안 제대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잠깐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기 바빴으니까. 그런 그가 주말에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했다. Überraschung(깜짝 놀랄 일, 뜻밖의 선물)이 있다며.
그가 우리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가꿔나가는 데에는 물론 일차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큰 연관이 있겠지만, 우리가 제도적으로 묶여 법적인 책임과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라는 것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들여 노력하지 않으면, 함께 할 이유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것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거나 평가절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 집에 사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짬을 내서 만나러 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기도 하다.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짬을 내지 않으면 남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우리 집에 오면 나와 빈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나가 강아지처럼 그를 맞는다. 그는 우리 둘을 품에 안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우리 머리에 번갈아가며 뽀뽀를 해준다. 그럴 때 우리 셋은 행복하다.
오랜만에 차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처음 와보는 레스토랑이었다.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커플이다 보니, 밖에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여름 막바지, 평균 22도를 웃돌며 날씨도 모처럼 화창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로연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야외 테라스에는 하객들을 위한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고, 테라스 아래쪽에는 그릴과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릴 연기를 피해 안쪽에 자리 잡았다.
점심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커다란 테라스에 손님이 우리까지 두 테이블뿐이었고, 식사를 마치도록 결혼식 손님들은 오지 않아서 붐비지 않고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엄마와 가끔 데이트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샐러드에 발사믹 드레싱을 주문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샐러드드레싱 중에 가장 맛있는 드레싱으로 꼽을 만큼 맛있었다. 나는 샐러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 입에 맛있을 정도면 드레싱이 정말 맛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드레싱은 이 레스토랑을 포함에 딱 두 곳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레시피는 당연히 비밀이며, 소스만 따로 팔지도 않는다.
남자 친구가 우리를 데려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음식도, 직접 내린 신선한 맥주도 정말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깜짝 선물은 그다음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이동해 도착한 곳은 데트몰트라는 도시 근처에 위치한 관광지, 엑스테른슈타이네(Externsteine)였다.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넓은 평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걸어 들어가다 보면 멀리 보이는 이 다섯 개의 사암 기둥이 데트몰트의 명물, 엑스테른슈타이네이다.
하이킹도 좋아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경치 보는 것을 즐기는 나를 위해 고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틈나는 대로 챙겨주는 것은 늘 감사한 일이다. 내 웃는 얼굴이 보답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기쁜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이 엑스테른슈타이네는 약 7천만 년 전에 생성된 바위들이며 아프리카 지역에서 떠밀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제일 높은 것이 47.7m이고, 독일은 평지가 많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경치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이곳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블로거를 통해 자세히 읽을 수 있으니 링크를 첨부하겠다.
https://m.blog.naver.com/23hyunsj/220519065254
입장료를 내야 하는 바위는 이미 올라가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일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빈이에게 이곳은 사방이 훌륭한 놀이터였다. 아이는 날다람쥐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5분 정도 이런 산책로를 걸어 올라가니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가 나왔다. 드넓게 펼쳐진 이곳이 바로 기원 후 9세기경, 아르미니우스가 통합한 게르만 부족 연합군이 바루스 총독이 지휘한 로마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던 토이토부르거 전투(Schlacht im Teutoburger Wald 또는 Hermannsschlacht)로 유명한 토이토부르거 숲 (Teutoburger Wald)이다.
우리는 넷플릭스 드라마 <바바리안>의 주인공 아르미니우스가 승리를 거둔 이 토이토부르거 숲의 끝자락에 살고 있으며, 이 날 소풍 온 엑스테른슈타이네에서 약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이 아르미니우스를 기념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독일에서는 아르미니우스라는 라틴어 표기 대신 헤르만(Hermann)이라는 독일어를 사용해 이 동상을 헤르만 동상 (Hermannsdenkmal)이라고 부른다.
약 105km 정도 되는 토이토부르거 숲은 약 7개 도시에 걸쳐 있으며, 하이킹(Wanderung)을 사랑하는 독일인이라면 꼭 들리는 하이킹 코스 중 하나로 유명하다. 하이킹 코스로 들어가려면 자동차가 필수라 나도 아직 제대로 된 하이킹 코스를 경험해 본 적은 없다. 다만, 그 끝자락에 살다 보니 아이 하굣길에 산책 삼아 그 산등성이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던가 하는 식으로 일상에서 조금씩 즐길 뿐이다.
아르미니우스의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 <바바리안>에 대한 설명은 아래 블로그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blog.naver.com/kdw2000917/222477729667
실제로 보면 작은 연못인데 사진으로 찍으니 풍경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빼어나다. 사진만큼은 아니어도 아름답기는 하다. 슬프지만, 이곳에서 매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투신자살을 한다. 아까 말했다시피 높은 곳이 없고 평지뿐인 독일에서는 투신이 쉽지 않은데, 이곳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하기에 여러모로 안성맞춤이라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셋은 이 풍경을 배경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가족사진을 찍었다. 생각해보니 함께 한 이래 처음인 것 같다.
비교적 인적이 드문 평지 산책로를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독일은 숲이 많을 뿐 아니라 곳곳이 자연보호구역(Naturschutzgebiet)으로 지정되어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정말 울창하다. 수목원을 따로 갈 필요가 없다.
이렇게 커다란 나무줄기도 시작은 저렇게 연약한 줄기였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자연은 참 알아갈수록 신비하고, 오묘하다.
코로나로 인한 통제상황을 제외하고서도,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는 보통의 연인들처럼 데이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호감만 있는 상태인데 아이가 밥상 앞에서 방귀를 뀐다던가, 2-3분에 한 번씩 엄마를 외치는 통에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기도 어려우며 가끔 말 안 듣는 녀석에게 큰소리도 내야 한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데이트의 질도 천차만별로 오락가락하니, 사실 데이트라고 하기보다는 아이와 함께 하는 현장학습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남자 친구와 함께 할 때 분위기가 망가지는 이유의 90퍼센트 이상이 아이로부터 비롯된다. 남자 친구와만 그럴까. 아이 엄마 친구들을 만나면 한쪽에서는 뛰어다니는 아이 제지하기 바쁘고, 한쪽에서는 물 달라, 포크 달라는 아이 시중들기 바쁘다. 누구 하나 피곤해서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정리하고 집에 가야 한다. 하루 종일 혼을 쏙 빼놓는 어린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제법 자라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이를 동반한 만남과 제외한 만남은 천지 차이다. 이런 아이가 없었을 때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연인 사이에서 그렇게 싸웠었는지, 이제는 더 이상 기억도 안 나고 이해는 더더욱 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나의 약점은 아니지만, 연애 상대자로서 보통의 연인보다 더 복잡하고 수고스러운 조건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거침없이 나와 아이의 손을 잡고 그 뒤치다꺼리를 함께 하며 자신의 여유로운 시간을 기꺼이 할애한다는 것에 나는 깊은 존경과 감사를 가진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연애를 통해 나는 오늘도 그가 얼마나 성숙하고 강한 사람이며, 나를 아끼는 사람인지 느낀다. 그런 그를 나도 매우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