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교의 여름방학은 6주다. 개학은 신기하게도 수요일이며, 신입생 입학식은 대부분 개학 다음날인 목요일에 치러진다. 방학 시기는 매년 주 별로 바뀌지만 대략 6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이루어진다. 아래 표는 2021년 독일의 주 별 여름방학 플랜이며, 우리가 사는 노트라인 베스트팔렌 주는 17일에 방학이 끝났다.
매년 시기가 바뀌는 이유는 휴가철 이동인구를 분산시켜 교통체증과 휴가 지역의 인구밀도를 낮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황금 같은 여름휴가인데 어딜 가나 인산인해뿐이라면 서로 힘들기 때문이다. 주마다 조금씩 시간 간격을 두고 방학과 개학을 하면 교통체증도 줄어들고, 휴가지에서 붐비는 현상도 완화될 테니 서로 좋은 조치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주들은 방학 일정이 서로 돌고 도는 반면 부유한 바이에른 주는 방학 일정을 본인들이 원하는 시기로 선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가 원하는 가장 핫한 시즌은 늘 바이에른이 가져간다고 한다. 돈이 많은 도시가 권력도 센 법인가 보다.
아이가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니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8월은 휴가철이기도 하지만, 서류 갱신 시즌이기도 하다. 맛보기로 아래 사진에 집세 보조 신청서를 참조한다.
이 5장은 겨우 신청 서류에 불과하며, 이 모든 서류를 꼼꼼히 작성하고 나면 서류 작성 내용과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각종 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 월세계약서 사본
- 6개월 치 월세 납부 내역 사본
- 건강보험료 납부 서류 사본
- 차가 있다면 자동차 관련 서류 사본
- 동산 및 부동산 관련 서류 사본
- 모든 계좌 통장 내역 사본
- 소득증명서 사본
- 세금 내역서 사본
- 전기세 내역 사본
- 난방비 및 수도세 (Nebenkosten) 사본
- 장애가 있다면 관련 서류 사본
- 연금 내역 사본
- 각종 보험 내역 사본
- 양육수당, 부모수당 내역 사본
- 그밖에 각종 공과금 내역 사본
- 아르바이트 및 각종 자잘한 수입 내역 사본
대충 번역한 것만 이 정도이고, 하여간 저 5장에 나와있는 모든 것이 수입을 체크하는 항목이라고 보면 된다. 이 나라는 하찮게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휴대폰 번호 따위를 적으라고 하지 않는다.
닥치고, 그래서 너 얼마 버는데?
아래는 또 다른 서류, 이혼 소송 당시 청구했던 소송비 대리 신청서 관련 내용이다. 소송은 2년 전에 끝났지만, 향후 4년간 그들은 매년 나의 소득을 추적해 소송비를 납부할 경제력을 갖추는 순간 나에게 소급 청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묻는 것은, 어떤 크기(제곱미터)의 방 몇 개짜리(거실도 방으로 포함) 집에서 몇 명(동거인)과 어떤 관계(가족관계 또는 사실혼도 기재)로 언제부터 살고 있는지로 시작해 월세 중 실제로 내가 부담하는 액수는 얼마이고, 방이 여러 개라면 그것을 침실로 쓰는지 사무용으로 쓰는지 아니면 다시 누군가에게 월세를 내주는지까지 확인한다.
Bargeld라는 말은 현금이다. 서류는 내가 현재 통장에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것도 모자라 내 귀금속이 몇 개고 집안에 어떤 값나가는 가구가 있으며 지갑에는 얼마의 현금이 있는지까지 묻고 있다. 심지어 현금을 묻는 란에는 네/아니오에 체크도 불가능하다. 현금이 땡전 한 푼도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들은 정말로 묻고 있는 것이다.
서류 맨 마지막에는 총 몇 장의 증빙서류가 첨부되어 있는지 그 개수까지 쓰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서류에서 항목 별로 묻는 것들에 Ja(네)라고 체크를 한다면 관련 서류 사본을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 모든 질문이 모두 서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괜히 서류의 나라가 아니다.
이 서류뿐만 아니라 뭔가 정기적으로 국가보조를 받으려고 하면 대부분 소득증명서, 3개월 치 통장 내역 사본, 월세 증명서, 월세 납부 내역, 보험료 납부내역은 기본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집에 웬만한 공무원 뺨치게 서류 작업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있다.
프린터 & 스캐너, 서류철, 바인더 파일, 라벨 스티커, 구멍 뚫는 펀치, 클립, 스테이플러, 네임펜 등등…. 일상의 행정화랄까?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분류에 따르면 독일이라는 나라는 ISTJ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아니, JJTJ가 더 적절하겠다. 미친 서류뭉치와 약간의 논리로 굴러가는 나라.
이런 서류더미에 깔려 내가 받게 되는 월세 보조금은 얼마일까? 13만 원 정도 된다. 훗.
복지의 나라, 독일이라고 쉽게들 생각하지만 절대 돈 그냥 안 준다.
대부분의 보조금 신청 서류에는 내 동거인의 수입까지 제출하도록 되어있다. 말하자면, 내가 남자 친구와 살림을 합칠 시 정부가 남자 친구 소득까지 모두 체크해 내 전남편과의 이혼 소송비를 나 대신 남자 친구에게 소급 적용시킨다는 뜻이다.
웃긴 것은, 그럼 건강보험료도 둘 중 하나만 내게 해줘야 하는데 200유로가 넘는 건강보험료는 또 따로 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늬들이 얼마나 오래 같이 살았든 법적인 혼인관계가 아닌 이상 세금 혜택도 없고, 둘 중 하나가 죽어도 상대방이 평생 부어놓은 연금을 대신 주지는 않지만, 같이 산 지 한 달 남짓이어도 정부로부터 진 빚은 서로 갚아줘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싱글맘이 누군가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 아이 밑으로 들어가는 각종 자잘한 내역들에 대한 혜택 역시 사라진다. 같이 사는 남자에게 부양의 의무가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둘 중 누구 하나가 실직하거나 소득이 줄어들어도 가장 먼저 정부의 복지혜택을 받지는 못한다. 둘의 소득을 합산해 일단 서로에게 부양의 의무를 떠넘긴 후 정부는 천천히 고려한다. 세금도, 보험료도 여전히 두배로 내야 하고, 빚도 서로 갚아줘야 하는데 말이다.
독일의 싱글맘들이 굳이 연인과 재혼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고 혼자 사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적 이유이기도 하다.
싱글맘은 연인과 동거를 함으로써 싱글맘이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이 사라지고(누차 말하지만, 독일에서 복지 혜택이 사라진다는 뜻은 단순히 할인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내야 할 돈이 몇 배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법적으로 아무 안전장치도 되어있지 않은 연인일 뿐인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싱글맘의 연인은 사랑해서 함께 산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 대신 모든 경제적인 어려움을 떠안아야 한다.
미혼의 젊은 독일인들도 대부분 연인과 동거를 하는 나라인 독일에서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굳이 싱글맘과 동거를 하고 싶어 할까? 독일 정부는 싱글맘이 영원히 싱글맘으로 머물러있기를 원하는 것일까?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라면, 왜 싱글맘의 동거남에게 부담은 가중시키고 혜택은 제외시키는 것일까?
얼핏보면 그럼 동거 대신 재혼을 하면 될 것 같으니 정부가 재혼을 권장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독일의 돌싱들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동거 대신 굳이 집세를 두 배로 내가면서도, 때로는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도 따로 사는 것일까?그들은 셈도 못하는 바보란 말인가?
나는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악을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최저생계비로 살아가며 백수 생활을 유지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 고리를 끊고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늪으로 빠져들어 파산 직전으로 몰리는 상황.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이 독일 정부가 정말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그 안에 주저앉히려고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정부가 국민을 지지한다 내지는 돕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답이 안 나온다. 답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이유를 찾아나가는 게 아니라 사회현상들을 보고 거꾸로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라의 제도를 잘 들여다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를 알 수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가족제도를 어떤 식으로 지원하는지에 의해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 식의 복지 국가라는 독일의 타이틀 말고 그 밑에 과연 어떤 실체가 숨어있는지, 창의력을 발휘해 다들 한번씩 생각해보기 바란다.
살짝 언급하자면, 독일 정부는 아주 눈곱만큼의 명분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복지의 혜택을 거둘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잘 만들어놓았고,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독일 정부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육, 의료체계 등 독일 사회 전반을 관통해 자주 보이는 양상이기도 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이해관계가 있다. 그리고 독일 정부는 마음 따뜻한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이미지메이킹을 잘 하는 아주 영리한 기업가라는 것만 말해두고 싶다.
독일인과 국제결혼해서 사는 한국인들이, 본인이 얼마나 배우자에게서 독립해 자주적으로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런 서류 작업을 스스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보면 된다. 정부 보조금 신청서나 소송비 소급 청구서는 나의 개인적인 상황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서류더미를 받고 끊임없이 서류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은 숨 쉬고 사는 모든 독일인들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 시스템 다이어리 또는 휴대폰 다이어리 앱 (3-6개월치 행정/학업/휴가 관련 장기 일정 수록)
- 책장 한 편 본인 관련 서류가 담긴 종류별 바인더 파일 ex) 세금 관련, 보험 관련, 집세 및 각종 공과금 관련, 자녀 관련, 비자 관련, 학업 관련, 그 밖의 각종 계약서 및 기타 등등…
- 프린터 및 스캐너
- 개인 통장 계좌
집에 이런 것들을 갖고 있으며, 이런 서류 작업을 남의 도움 없이 또는 약간의 도움은 필요하지만 본인이 80퍼센트 이상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면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독일의 성인들도 다 이렇게 산다. 그래서 독일에는 Papierkram(서류 더미, 뭉치)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이 중 한 가지라도 지금 독일에 사는 내 방에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지금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넘어 법적인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을 확률이 높으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다면 누군가가 한 성인으로서 본인이 해야 할 이 어마어마한 작업을 대신해준다는 뜻이므로 잘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지금 내 인생을 누구에게 얹혀 공짜로 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위에서 언급한 서류에는 나의 학업과 아이의 학교 관련 서류는 있지도 않다. 특히 자녀가 있으면 정말 많은 것을 수시로 작성하고, 신청하고, 취소하고, 갱신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성격이 꼼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독일 사회에서 문제없이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다. 독일인들의 성격이 괜히 고지식하고 꼼꼼한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 독일 사람들을 봐도, 아무리 어리고 털털하고 자유분방하고 어리바리해도 서류 작업은 다들 기본 이상으로 한다. 어릴 때부터 일상이기 때문이다.
독일에 비하면 한국은 거의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고 즉흥적이며 유연하고 거침없다. 게다가 본래 타고난 성격도 꼼꼼하거나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별거 초반에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남자 친구도 독일에서는 서류 정리와 거리가 멀고, 일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분방한 편이라 학교 생활할 때 고충이 많았다고 했는데 독일에 와서 많이 정리되고, 계획적으로 변한 나 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다 보면 나보다 그가 훨씬 더 정리를 잘한다. 교육의 힘이 이래서 정말 큰 가보다.
아무튼 나는 어제부로 이 모든 Papierkram이 끝났고, 그래서 한동안은 다시 서류 뭉치로부터 자유다!!!!!!!!